20020315040159-teenageTeenage Fanclub & Jad Fair – Words Of Wisdom And Hope – Geographic, 2002

 

 

반가운 옛 친구와의 재회

음악을 ‘시간예술’로 정의할 때 재드 페어(Jad Fair)의 음악을 묘사하는 가장 적합한 표현은 ‘시간낭비’다. 그의 음악은 극단으로 치달은 DIY(Do-It-Yourself) 윤리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음악을 할 수 없는 인물이다. 아는 코드 하나 없이 기타를 치고 음정도 못 잡으면서 노래 부르는 뮤지션(!)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그가 음악적 재능의 결여를 탁월한 문학적 능력으로 보충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어리석고 천진한 유아적 가사는 어떠한 깊이나 통찰도 담고 있지 않다. 이런 그가 2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음악계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일종의 경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재드 페어의 이러한 기본 소양, 그리고 아메리칸 인디 록의 거장 요 라 텡고(Yo La Tengo)를 처참하게 무너뜨린 그의 최근 전력 등을 감안할 때 틴에이지 팬클럽(Teenage Fanclub)과의 새로운 프로젝트 [Words Of Wisdom And Hope]에 대해 기대를 갖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앨범이 나오기 전 유일하게 흥미를 자극했던 대목은 “과연 틴에이지 팬클럽이 어떻게 망가질 것인가?”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본 이들의 협연은 대단히 성공적인 것이었고 그 결과물인 이 앨범은 수많은 놀라움을 품고 있는 멋진 작품이었다. 이 앨범에서 협연의 두 당사자는 각자의 음악적 성향을 고집하기보다는 공통의 관심사를 추출해 그것에 매진함으로써 예상과 달리 매우 훌륭하고 만족스러운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들이 이 앨범에서 들려주는 음악은 이들 사이의 첫 만남의 계기가 된 틴에이지 팬클럽의 데뷔 싱글 “Everything Flows” 시기의 음악이다(재드 페어는 이 싱글의 커버아트를 담당했다). 틴에이지 팬클럽은 당시 너바나(Nirvana)와 함께 한창 부상 중인 그런지 록의 선두주자 노릇을 했고 일부에서는 이들이 너바나보다도 더 큰 밴드로 성장할 것을 점치기도 했다. 그러나 1991년에 나온 후속작 [Bandwagonesque]를 전환점으로 이들의 음악이 파워 팝으로 방향을 선회함에 따라 이들의 그런지 록 시대는 단명에 그쳤고 많은 사람들은 이에 대해 커다란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이들의 그런지 록은 ‘세상도 싫고 나도 싫고…’류의 청소년적 울분과 좌절을 분출시키는 너바나식 그런지와 달리 닐 영과 크레이지 호스(Neil Young & Crazy Horse)적인 느슨하고 너저분한 사운드 위에서 세상에 대한 관조적 태도를 표명한 좀 더 성숙한 것이었다. 틴에이지 팬클럽이 10여년만에 초창기의 사운드를 재답사한 이 앨범은 이들의 이 시기 음악에 익숙한 팬들에게는 더 없는 반가움을, 그렇지 못한 팬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이 앨범에서 드러나는 틴에이지 팬클럽의 변신은 그에 동반하는 재드 페어의 변화와 어우러져 긍정적 상승효과를 일으킨다. 재드 페어가 그 동안의 활동에서 보여준 종잡을 수 없는 치기와 변덕은 이 앨범에 대해서도 주된 우려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팬들은 그의 극단적인 자유분방함이 혹시라도 틴에이지 팬클럽의 꽉 짜이고 세심하게 정돈된 팝송과 화해 불가능한 충돌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그는 앨범의 음악적 초점과 분위기 형성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보컬의 중책을 무난히 완수해냄으로써 이러한 우려를 말끔히 불식했다. 이 앨범에서 그가 들려주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보컬이라기보다는 루 리드(Lou Reed)를 연상케 하는 중얼거림이다. 비록 그에게서 루 리드의 섬세함이나 퇴폐주의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지만 예상을 훨씬 능가하는 그의 안정되고 통제된 보컬은 이 앨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적인 것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사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은 그 동안 과잉 착취된 감이 없지 않고 이 점에서 이들의 선택은 그리 환영받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서도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이름을 듣고 “또?”라고 반문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앨범에서 틴에이지 팬클럽과 재드 페어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수많은 벨벳 언더그라운드 아류들의 음악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앨범의 음악적 열쇠를 쥐고 있는 틴에이지 팬클럽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여기서 들려주는 음악은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컨디션 좋을 때’ 만든 음악들의 수준에 육박한다. 게다가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이 앨범 내용의 전부인 것도 아니다. 명백하게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스타일을 겨냥한 “Crush On You”나 “Power Of Your Tenderness” 등 몇 개의 곡을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 곡들에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재드 페어의 보컬 밖에 없다. “Behold The Miracle”과 “Near To You”는 틴에이지 팬클럽의 초창기 사운드를 재현한 트랙들이고 “Love Will Conquer”와 “You Rock”은 [On The Beach] 시기의 닐 영 사운드를 되살린 작품들이다.

이 앨범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이들이 벨벳 언더그라운드나 닐 영 같은 흔해 빠진 음악적 재료를 ‘인디가 진짜 인디였던’ 1980년대 인디 록의 렌즈를 통해 재조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이노서 주니어(Dinosaur Jr.), 소닉 유쓰(Sonic Youth), 미니트멘(Minutemen), 바이올런트 팜스(Violent Femmes) 등 1980년대 인디 록의 거장들이 보여줬던 자연발생적 에너지와 가식 없는 솔직함은 이 앨범에도 공명되어 음악을 관통하는 정서적 근거를 형성한다. 틴에이지 팬클럽과 재드 페어는 작은 클럽들을 전전하면서 현장을 누빈 그 때의 그 경험을 되살려 1980년대 인디 록을 단순한 스타일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는 정서적 베이스 캠프로 활용한다. 이들의 이러한 접근은 이 앨범의 음악을 그것의 뻔한 소재에도 불구하고 더 없이 신선하고 깊이 있는 것으로 들리게 만든다. 최근 각광받는 니클백(Nickelback)의 그런지 리바이벌이 닳고 닳은 진부함을 노정하는데 반해 이들이 여기서 들려주는 그런지는 조금도 시들지 않은 싱싱함을 그대로 유지한다.

이 앨범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가 호의적이라고 해서 여기에 약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물론 아니다. 브레이크 비트와 알앤비(R&B) 베이스라인으로 과감한 파격을 시도한 “Secret Heart”는 의도와 달리 다소 맥이 빠지는 경향이 있고 “You Rock”이나 “Vampire’s Claw”같은 곡은 재드 페어의 목소리로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답다. 그러나 이런 작은 불만에 심각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재드 페어와 틴에이지 팬클럽의 10년지기 우정이 대단히 값진 음악적 결실을 만들어냈다는 점이고, 청취자에게 그것은 마치 까맣게 잊고 있던 옛 친구를 다시 만난 듯한 반갑고도 정겨운 느낌을 안겨준다는 점이다. 수많은 스타일의 홍수 속에서 온갖 의미없는 제스처에만 익숙해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이들 두 베테랑은 ‘진심어린 음악’의 미덕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잘 가르쳐준다. 비록 시대를 앞서나가는 선구자도 아니고 끝없이 한계를 돌파하는 개척자도 아니지만 이들의 존재는 이런 점에서 더 없이 소중하기만 하다. 20020313 | 이기웅 keewlee@hotmail.com

8/10

수록곡
1. Behold The Miracle
2. I Feel Fine
3. Near To You
4. Smile
5. Crush On You
6. Love Will Conquer
7. Power Of Your Tenderness
8. Vampire’s Claw
9. Secret Heart
10. You Rock
11. Love’s Taken Over
12. Good Thing

관련 사이트
재드 페어 공식 사이트
http://www.jadfair.com
틴에이지 팬클럽 공식 사이트
http://www.teenagefanclub.com
틴에이지 팬클럽 팬 사이트
http://diskobox.net/teenagefan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