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228094102-clinicClinic – Walking With Thee – Domino, 2002

 

 

수술실에서 되살아난 인디 록

“죽은 자가 산 자의 목을 조른다”는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언명은 오늘날의 인디 록 씬에 대해서도 이보다 더 이상 적확한 통찰이 될 수 없다. 21세기 벽두의 인디 록을 지배하는 것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과거의 음악이다. 과거의 것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복고주의자든 과거의 것으로부터 뭔가 새로운 것을 도출하려는 실험주의자든, 인디 로커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크게 과거에 의존하고 있다. 오늘날의 인디 록에 있어 외부 세계와의 교감의 산물로서의 음악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운 듯 하다. 이제 음악은 철저히 자기에 준거하고 자기를 참조하는 텍스트적 관심에만 추동될 뿐이다. 이것이 음악의 논리와 주장 보다는 참고문헌에 더 관심을 갖는 음악 저널들의 가르침 탓인지, 아니면 미디어가 곧 현실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문화적 정황의 산물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과거의 지배력이 절대적인 상황 속에서 가장 지적인 (또는 영리한) 음악인들이 현실 돌파를 위해 취하는 전략은, 과거를 회피하기 보다는 그것을 전면화하고 극단화하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베타 밴드(The Beta Band)가 이의 대표적인 경우고 일전에 웨이브 지면을 통해 소개된 아이슬랜드의 카나다(Kanada)도 이 부류에 속한다. 비록 베타 밴드의 유명세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지만 리버풀 출신의 4인조 그룹 클리닉(Clinic)은 현재 이 방면에서 가장 성공적인 음악적 실험을 수행하는 밴드 중 하나다. 싸이키델릭 포크 성향의 베타 밴드와, 와이어(Wire) 계열의 아트 펑크에 뿌리박고 있는 이들의 음악 사이에는 물론 적지 않은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지구상의 어떤 밴드와도 다른 사운드를 만들어내겠다’는 베타 밴드의 출사표와 ‘록 음악의 뿌리깊은 질병을 고쳐 새 삶을 불어넣겠다’는 클리닉의 창립 이념은 그리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지 않다. 이들은 거대 음반사의 개입으로 획일화되고 고착화된 ‘메인스트림 인디’ 또는 ‘인디 메인스트림’에 대안을 제시하는 21세기형 얼터너티브 밴드로서 현재의 영국 록 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베타 밴드와 마찬가지로, 클리닉은 지금까지 한 장의 EP 모음집과 두 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Clinic]이라는 제목으로 1999년에 발매된 EP 모음집은 베타 밴드의 전설적인 [3 EP’s]에 필적하는 놀라운 작품이었다. 1997년부터 2년간의 활동을 결산한 이 앨범에서 이들이 들려준 과감한 실험과 용솟음치는 에너지는 가히 무서운 신인의 등장을 운위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들의 진정한 역량은 이듬해에 발표된 데뷔 앨범 [Internal Wrangler]에서야 비로소 만개할 수 있었다. 비록 EP들에 비해 에너지 레벨은 다소 낮아진 감이 있었지만, 이들은 여기서 보다 세련되고 정교한 사운드를 구사함으로써 EP들의 실험적 아이디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고 더욱 만족스러운 음악적 결과를 만들어냈다. 베타 밴드의 실험이 때때로 강요된 듯한 거북함을 노정하는데 비해, 이 앨범에서 이들이 수행한 실험은 음악에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움을 과시했다.

데뷔 앨범 이후 2년 만에 등장한 [Walking With Thee]는 이들의 음악적 비전이 보다 구체화되고 전면화된 역작이다. 이들은 여기서 에너지를 좀 더 희생한 대신, 보다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사운드를 획득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전작 앨범에 비해 에너지가 다소 모자라는 것으로 들리는 것은 기타와 드럼이 후방에 배치되고 키보드와 베이스가 전면에 나서는 사운드의 변화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이들은 펑크의 영향에서 다소 거리를 두는 동시에 아트 록/크라우트 록의 영향을 더욱 부각시킨다. 사운드의 이러한 재배치를 통해 전열을 정비한 이들은 초창기부터 지속되어 온 음악적 실험에 박차를 가한다. 그것은 록과 팝의 전 역사를 통해 명멸해간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완전히 분해/재조합하는 것이다. 로네츠(The Ronettes)와 자니 캐쉬(Johnny Cash)에서 수어사이드(Suicide)와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에 이르는 단골 소재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앨범은 전작의 작업을 그대로 계승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들은 전작의 성과를 토대로 드디어 ‘배합의 황금비율’을 찾아낸 듯하다.

이들이 음악을 다루는 독특한 방식은 이 앨범에 수록된 트랙 “Welcome”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이 곡의 보컬 멜로디는 샤우팅 창법으로 부르면 걸맞을 거라지 펑크 스타일의 선율이다. 그러나 보컬리스트 에이드 블랙번(Ade Blackburn)은 이를 감정이 억제된 여리고 힘없는 톤으로 노래함으로써 멜로디에 내재된 느낌을 반전시킨다. 그의 보컬을 뒷받침하는 베이스는 유로 디스코 풍의 베이스 라인을 퉁기고 이에 조응하는 기타는 써프 록적인 리프를 연주한다. 여기에 간헐적으로 멜로디카와 키보드의 디테일이 곁들여지면서 곡의 분위기는 초현실적인 것으로 상승한다. 이런 방식으로 축조되는 이들의 음악세계는 한마디로 ‘기묘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이 앨범에서 우리에게 낯선 음악은 하나도 없다. 펑크가 있는가 하면 유로 디스코가 있고 팝이 있는가 하면 발라드가 있다. 그러나 이들의 펑크는 펑크 같지 않고 디스코는 디스코와 다르다. 달콤함을 잃어버린 팝과 발라드도 더 이상 장르의 규준에서는 취급될 수 없다. 친숙하던 음악은 불현듯 낯설어지며 편안함은 불편함으로 바뀐다.

이 앨범을 통해 클리닉의 음악은 ‘누구 누구’를 언급함으로써 이해되는 수준을 훌쩍 뛰어 넘었다. “평범한 작곡가는 빌어오지만 위대한 작곡가는 훔쳐온다”는 토머스 비첨 경(Sir. Thomas Beecham)의 말처럼 이들은 드디어 ‘훔쳐오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전작에 비해 힘이나 신선미가 다소 떨어진다는 불만도 있을 수 있지만 어차피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이들이 여기서 들려주는 지극히 경제적(즉, 음이나 소리의 불필요한 낭비가 없는)이고 알찬 내용의 음악에 불만을 품는다면 그것은 욕심이 지나치거나 음악적 안목이 없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들은 이 앨범을 통해 난국에 빠진 인디 록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명의들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이제 이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습성화된 매너리즘에 빠지는 일이다. 이것만 극복할 수 있다면 이들은 비틀즈(The Beatles)와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에 이어 리버풀의 영원한 자랑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올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렇게 훌륭한 앨범이 등장한 것을 보면 2002년은 음악적으로 대단히 멋진 한 해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20020222 | 이기웅 keewlee@hotmail.com

8/10

수록곡
1. Harmony
2. The Equaliser
3. Welcome
4. Walking With Thee
5. Pet Eunuch
6. Mr. Moonlight
7. Come Into Our Room
8. The Vulture
9. The Bridge
10. Sunlight Bathes Our Home
11. For The Wars

관련 사이트
클리닉 공식 사이트
http://surf.to/clin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