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228094246-cooper20temple20clauseCooper Temple Clause – See This Through And Leave – Morning, 2002

 

 

프로그레시브 록 드디어 재림하다

영국 레딩(Reading) 출신의 신인 밴드 쿠퍼 템플 클로즈(The Cooper Temple Clause)는 근래의 프로그레시브 록 열풍 속에서도 드물게 1970년대 프로그레시브 록 전성기의 음악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그룹이다. 몽롱하고 환각적인 분위기를 통해서 프로그레시브 록과 느슨한 연관만을 맺는 여타 그룹들과 달리, 이들은 1970년대 프로그레시브 록의 장대한 스케일과 역동적인 구조를 되살림으로써 그것의 전통을 오늘에 부활시킨다. 비록 끝없이 이어지는 솔로 악기 연주를 지양하고 샘플러와 드럼 머신을 채용함으로써 현대적인 감각을 불어넣고는 있지만 이들 음악의 심각한 분위기와 클래시컬한(즉 ‘고풍스런 느낌’의) 디테일은 ‘그 때 그 음악’의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단순히 과거의 음악을 업데이트된 사운드로만 연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고전적인 프로그레시브 록에 펑크의 거친 에너지와 저돌성을 도입함으로써,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를 거부하고 그것을 아드레날린이 분출하는 격정적인 음악으로 재정의하는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사운드는 고만고만한 ‘궁상파 음악’이 지배하던 영국의 팝/록 씬에 신선한 자극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NME(New Musical Express)]를 비롯한 음악지들은 이들을 2002년 최고의 기대주로 치켜세웠고, 이들은 신인 밴드로는 드물게 메이저 레이블인 BMG와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기대 속에서 발표된 이들의 공식 데뷔 앨범 [See This Through And Leave]는 아쉽게도 예상만큼의 흥분을 자아내지는 못하고 있다. [Q]는 이 음반의 과잉 프로덕션을 문제 삼았고[NME]는 감정적 공허함을 지적했다. 비록 다소의 미숙함은 있었지만, 그 동안 EP와 싱글들을 통해 이들이 들려준 사운드는 누구에게나 선명한 인상을 남길 만큼 거침없고 강렬한 것이었다. 그러나 데뷔 앨범에서 이들은 지나친 야심과 과도한 부담에 사로잡힌 나머지, ‘한 번 해보자’는 도전과 패기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지나치게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접근은 음악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힘있는 전개를 가로막고, 이 앨범을 계산적이고 인위적인 것으로 들리게 한다.

음악적인 면에서 이 앨범은 과거 프로그레시브 록 명반들의 영화를 재현하려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수록곡들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컨셉트 앨범의 외양을 취하고 있고 군데군데 7-8분 여의 대곡도 포진되어 있다. 고전적인 VCS3 신디사이저의 활용과 관악 섹션의 동원을 통해 사운드의 규모를 부풀리는 것도 이러한 의도의 일단이다. 연주는 정교함에 더욱 치중하며, 음악의 구조는 보다 극적인 효과를 지향한다. 그러나 이들은 갖가지 장치를 통해 이 앨범의 상업적 안전성을 확보하는데도 이에 못지 않게 부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느린 곡의 비중이 커졌고 특유의 박력있는 연주곡들이 배제되었으며 대부분의 곡들이 싱글 커트를 염두에 둔 3-4분 길이로 단축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이러한 세심한 고려가 반드시 의도와 일치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만은 아닌 듯 싶다. 이 앨범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이들의 원숙한 음악성이나 뛰어난 상업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신인 밴드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판단착오다.

베테랑 프로듀서 폴 코켓(Paul Corkett)과 함께 작업했음을 감안하면 이들이 여기서 범하고 있는 판단착오는 때로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두 배까지도 확장이 가능한 “Did You Miss Me?”는 제대로 발전되지 않은 채 짧은 인트로로 사용된 반면 별로 내용도 풍부하지 않은 “Digital Observations”와 “Murder Song”은 7-8분 여의 대곡으로 늘려진 것이 그 예다. 이 때문에 “Did You Miss Me?”는 충분한 전개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성급하게 끝나버리며 대곡들은 프로그레시브 록의 단점인 지루함만을 부각시키면서 한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 앨범에서 최악의 판단착오라고 할만한 트랙은 단연 “555-4823″이라는 제목의 곡이다. 그 동안에도 이들이 드럼 머신과 샘플러에 손댄 작품들은 언제나 그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이 곡은 그야말로 기계를 작동시켜 놓고 점심 먹으러 나간 듯한 무의미하고 내용 없는 쓰레기일 뿐이다. 앞으로 어떤 프로듀서가 이들과 작업할지 모르겠지만 누가 됐든 이들이 드럼 머신과 샘플러에만은 제발 손을 못 대도록 말려줬으면 좋겠다.

CD의 장점 중 하나는 듣기 싫은 곡들을 편집해 제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위에 언급한 몇 곡을 이렇게 제거하고 나면 이 앨범은 상당히 멋진 작품으로 둔갑한다. 특히 “Did You Miss Me?”에서 “Film Maker”와 “Panzer Attack”으로 이어지는 도입부는 이들의 힘찬 질주를 만끽할 수 있는 이 앨범의 백미다. 이들은 역시 “Film Maker”나 “Panzer Attack”처럼 호크윈드(Hawkwind)적인 상승하는 베이스 라인과 호쾌하고 직선적인 하드 록의 접근이 채택된 곡들에서 가장 강점을 발휘한다. 장 미셸 자르(Jean-Michel Jarre)적인 아날로그 신디사이저와 노이(Neu!) 풍의 깊이 있는 리듬이 결합된 “Let’s Kill Music”이나 블랙 사바쓰(Black Sabbath)적인 무거운 기타 리프가 신디사이저의 가세로 의미변형을 이루는 “Been Training Dogs” 등도 이 앨범의 주목할만할 트랙들이다. 한가지 아이러니는 “Panzer Attack”과 “Let’s Kill Music”이 이들의 초기 작품 중에서 재수록된 곡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이 굳이 과거의 발표곡들을 마다하고 신곡 위주로 앨범을 꾸몄지만 이 앨범의 진면목은 바로 과거의 곡들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쿠퍼 템플 클로즈의 프로그레시브 록이 인디 록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장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이 미디어의 주목을 받기 전부터 이미 입소문을 통해 거물급 언더그라운드 컬트 밴드로 성장했음을 감안하면, 이들의 음악적 선택은 어느 정도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최근 각광받고 있는 로켓골드스타(RocketGoldstar)나 뮤직(The Music) 등의 그룹은 펑크 이전 시기의 ‘거대음악’을 연주하고 있고 코너숍(Cornershop)의 새 싱글 “Lessons Learned From Rocky I to Rocky III”도 1970년대 하드 록에 대한 오마주 형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들의 음악을 통해 영국 인디 록은 이제 ‘1970년대 초’라는 새로운 화두를 중심으로 재편성에 접어든 것이 분명한 듯 싶다. 펑크의 등장 이후 25년간 금단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이 시기의 음악이 전면적으로 무대에 복귀한다는 것은, 견해에 따라 눈살이 찌푸려질 만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1970년대 하위문화의 대척점에 존재하던 프로그레시브 록과 펑크가 쿠퍼 템플 클로즈의 음악 속에 사이 좋게 공존하는 것을 보면 음악의 내용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이제 다 부질없는 일로 생각된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은 ‘내용 없는 스타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0020222 | 이기웅 keewlee@hotmail.com

6/10

20020228094246-coopertempleclause(ltd)사족) 이 앨범은 모두 네 가지 버전으로 발매되었다. 정규 CD버전 외에 여섯장의 7″ 비닐로 이루어진 박스 셋 버전이 있고 보너스 트랙 한 곡이 더 들어간 일본 발매판이 있으며 두 장의 CD로 이루어진 한정판이 있다. 한정판의 보너스 CD에는 EP 수록곡들인 “Devil Walks In The Sand”, “Way Out West”, “I’ll Still Write” 같은 곡들이 들어있고 “Panzer Attack”과 “Let’s Kill Music”의 공연 녹음 그리고 “Let’s Kill Music”, “Film Maker”, “Been Training Dogs”의 비디오가 수록되어 있다. 이렇게 푸짐한 메뉴를 값도 더 치르지 않고 덤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이익이 아닐 수 없다. 국내 수입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의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가급적 한정판을 노리도록 권하고 싶다.

수록곡
1. Did You Miss Me?
2. Film-Maker
3. Panzer Attack
4. Who Needs Enemies?
5. Amber
6. Digital Observations
7. Let’s Kill Music
8. 555-4823
9. Been Training Dogs
10. The Lake
11. Murder Song

관련 사이트
The Cooper Temple Clause 공식 사이트
http://www.thecoopertempleclause.com/
The Cooper Temple Clause 비공식 사이트
http://www.coopersville.co.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