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301122259-marley로버트 네스타 말리(Robert Nesta Marley). 1945년 2월 6일 자메이카 세인트 앤(St. Ann)의 나인 마일(Nine Mile)에서 출생. 그가 세상을 뜬 지도 어느 덧 스무 해가 넘었지만 해마다 그의 생일이 돌아오면 자메이카뿐 아니라 세계 각처에서 기념 콘서트 및 행사들이 벌어지는데, 내가 사는 이곳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아마도 별다른 이론의 여지 없이 범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대중음악 스타일 것이다. 인도양의 적도 근방 섬나라 몰디브의 흑인 짐꾼으로부터 대서양이 펼쳐진 뉴잉글랜드의 백인 피서객 아주머니에 이르기까지, 밥 말리의 모습이 담긴 내 티셔츠를 가리키며 그의 팬임을 자처하는 걸 보면 그의 이미지가 지닌 위력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과연 무엇이 그를 전설의 지위로 끌어올린 것일까?

하나의 해답은 그의 음악에 깊게 뿌리박혀 있는 영성(靈性; spirituality)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밥 말리는 드레드록(dreadlock)을 나부끼는 독실한 라스타파리주의(Rastafarianism)의 신봉자로서, 그 자신이 레게 음악과 라스타 신앙의 결합을 체현한다. 하지만 레게 뮤지션들이 다 라스타주의자인 것도 아닐뿐더러, 라스타주의가 자메이카를 대표하는 신앙은 결코 아니다. 전통적으로 라스타들이 마치 유럽의 집시들처럼 사회적으로 배척받는 일종의 불가촉 천민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하층 계급들 중의 하층 계급’의 믿음과 생활양식에 따라붙는 일종의 낙인이자 영기(靈氣; aura)가 이른바 루츠 레게(roots reggae)에 신비적인 힘을 부여하는 것일 터이다. 밥 말리가 라스타주의를 본격적으로 표방한 것은 비교적 뒤늦은 일이지만, 이런 사실이 그가 라스타주의로부터 진 빚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은 아닌 듯하다.

20020301121521-selassie라스타주의의 살아있는 신(神)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의 초상을 치켜든 밥 말리.

“Rastaman Chant”from Live at the BBC Radio 1, 5/24/1973

또 다른 하나의 해답은 밥 말리가 대변하는 자메이카의 민중, 즉 기독교적인 비유를 통해 스스로를 수난자(sufferah)로 칭하는 이들의 정치경제적 현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후반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이래, 자메이카는 풍부한 천연자원과 관광자원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으로 실패한 ‘제3세계’ 경제의 길을 걷게 되는데, 여기에는 온건 사회주의 경향의 정당인 인민국가당(People’s National Party: PNP)과 미국 CIA의 전폭적 지원을 등에 업은 우익 자메이카 노동당(Jamaica Labor Party: JLP) 간의 혈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말리가 ‘콘크리트 정글’이라 칭한 킹스턴의 게토는 그 직접적 산물로서, 거기에서는 소요와 폭동, 그리고 정치권과 손잡은 갱단들이 영토를 놓고 벌이는 총격전이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끊이질 않았다. 이 시기 밥 말리가 얻은 별명인 ‘터프 공(Tuff Gong)’은 그가 이 비정한 거리에서 쌓은 평판(이른바 ‘street credibility’)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알려주는 좋은 지표가 된다. 또한 이와 관련해서 후일의 한 인터뷰에서 그가 “자메이카에서는 모든 것이 정치적”이라고 말한 것은 왜 그의 음악이 ‘반항의 음악(rebel music)’이 되었는가를 자연스레 설명해준다.

“Burnin’ And Lootin'” from Live at the Record Plant, Sausalito, California 2/12/1973

자메이카 민중에게 레게 음악은 국내 정치와 직결되어 있었기에, 세계적 수퍼스타로 발돋움해 명실상부하게 레게의 화신이 된 밥 말리가 지닌 정치적 무게는 더할 나위 없이 컸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1976년 고향 자메이카에서의 대형 콘서트를 앞두고 암살 기도의 표적이 되었다. 팔꿈치에 총상을 입는 것으로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넘긴 뒤 2년간 영국에서 피신 아닌 피신생활 끝에 자메이카로 다시 돌아온 말리는 역사적인 ‘One Love Peace Concert’를 열고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영향력을 통해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분열된 나라를 하나로 묶는다는 거창한 시도를 감행했다. 공연이 막바지에 치달을 즈음, 말리는 준 내전상태로 치닫고 있던 PNP와 JLP의 두 지도자를 무대 위로 끌어내 서로 악수하게끔 하는 역사상 보기 드문 장면을 연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두 정치인들의 표정이 말해주듯 내키지 않는 화해의 제스처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말았지만.

20020301121521-oneloveOne Love Peace Concert. 허울뿐인 화해, 그러나 위대한 음악의 힘.

“Jammin'” from One Love Peace Concert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밥 말리가 인구 갓 2백만의 섬나라 자메이카를 벗어나 세계적인 전설이 된 데는 그가 가졌던 뿌리깊은 이상, 약 반 세기 전 동포 자메이카인이자 선각자인 마커스 가비(Marcus Garvey)가 미국에 건너가 설파하기 시작한 범아프리카주의(Pan-Africanism)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노예무역으로 인해 세계 각지로 흩어져 이른바 흑인 디아스포라(black diaspora)를 이루게 된 아프리카인들의 자각과 자존, 그리고 자조(自助)를 표방하는 범아프리카주의의 사상은 밥 말리의 음악과 가사에서 확연한 모습으로 드러난다(예컨대 “Africa Unite”). 무엇보다도 그가 1980년 짐바브웨의 독립에 음악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초대되어 수많은 외교 사절들 앞에서 공연을 하게 된 사실은, 비록 말리 자신은 그를 보려고 몰려든 흑인 대중들이 최루탄과 곤봉에 밀려 공연장 진입을 금지당한 것을 알고 진저리를 치긴 했지만, ‘레게의 사절’이자 범아프리카주의의 문화적 상징으로서 그의 지위를 웅변하는 것이었다.

“Zimbabwe” from Live at Stadio San Siro, Milan, Italy, 6/27/80

뇌와 폐로까지 전이된 암세포가 생명을 먹어들어가는 와중에도 밥 말리는 공연과 녹음을 계속하지만, 1980년 가을 뉴욕에서 쓰러진 후 그는 결국 이듬해 5월 눈을 감는다. 그가 남긴 마지막 정규 앨범의 맨 끝 곡은 다름 아닌 “Redemption Song”인데, 그 가사에는 라스타주의나 범아프리카주의를 넘어서는 정신적인 울림이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20세기 또 하나의 전설은 막을 내린다.

Emancipate yourselves from mental slavery
None but ourselves can free our minds
Have no fear for atomic energy
Cause none of them can stop the time
How long shall they kill our prophets
While we stand aside and look
Some say it’s just a part of it
We’ve got to fulfil the book

Won’t you help to sing, these songs of freedom
Cause all I ever had, redemption songs
All I ever had, redemption songs
These songs of freedom, songs of freedom

“Redemption Song” from Bob Marley’s last show, Live at Stanley Theatre, Pittsburgh, 9/23/1980

p.s. 원래 이 글은 밥 말리의 생일이 있는 2월경에 실렸어야 마땅할 터이나 필자의 게으름으로 인해 늦어지고 말았다. 독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20020224 | 김필호 antioedipe@hanmail.net

관련 사이트
밥 말리 공식 사이트
http://www.bobmarley.com
미국 공영 TV 밥 말리 다큐멘터리
http://www.pbs.org/wnet/americanmasters/database/marley_b.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