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미국 주류 힙합 시장을 들썩거리게 할 빅 뉴스는 아니겠지만, 영국 래퍼 루츠 마뉴바(Roots Manuva)의 최근 미국 시장 진출은 특히 인디와 칼리지 힙합 씬을 중심으로 잔잔한 화젯거리를 제공한 듯하다. 물론 작년 하반기에 미국 내에서도 발매된 그의 신보 [Run Come Save Me]가 미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마케팅이 된 최초의 간판급 영국 엠씨의 앨범이라는 점을 논외로 하더라도, 그의 음악은 영국 힙합과 미국 힙합의 장점을 절묘하게 섞은 탁월한 사운드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인디 힙합 팬들과 평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 미국 힙합과 변별되는 브리티쉬 힙합(British Hip Hop) 혹은 브릿 합(Brit-Hop)의 장점을 견지하면서도 미국 인디 힙합 팬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루츠 마뉴바의 두터운 사운드 질감과 개성 넘치는 라임은, 장차 실력파 영국 힙합 뮤지션들의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한 일종의 모범답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 힙합 vs. 미국 힙합

20020216121135-TheGreatAdventuresOf사진설명: Slick Rick의 힙합 클래식 [The Great Adventures Of Slick Rick](1988)
사실 루츠 마뉴바에 의해 촉발된 영국 힙합에 대한 미국 대학가 매체들과 인디 힙합 씬의 관심은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미국 힙합 뮤지션들의 음악이 영국의 차트를 장악해온 역사가 이미 십여 년을 넘었고,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아예 자생적으로 성장한 영국 본토 힙합 뮤지션들까지 가세하면서 너무도 비대해진 영국의 힙합 시장을 감안하면 지금 미국 내에서의 브리티쉬 힙합에 대한 호들갑은 어떤 면에서 창피를 무릅쓴 ‘용감 무식’에 다름 아니다. 무엇보다 영국 출신 힙합 뮤지션들의 미국 시장 내에서의 오랜 영향력을 되새겨볼 때, 최근의 영국 힙합에 대한 ‘하입(hype)’은 오히려 경이롭기까지(?) 하다. 가령 1980년대 후반 가장 탁월한 엠씨 중의 한 명으로 미국 내에서 명성을 날렸던 슬릭 릭(Slick Rick)이 영국 출신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그만큼의 명성은 얻지 못했지만, 퀸 라티파(Queen Latifah)와의 공동작업으로 실력을 검증 받았던 여성 래퍼 엠씨 멜로(MC Mell”O”), 차후의 노 리미트(No Limit)나 캐쉬 마니(Cash Money) 레이블 사운드의 전범이 된 “Rock The Beat”(1989)의 데릭 비(Derek B) 또한 미국 내에서 영국 힙합 사단의 저력을 대표하기에 충분하였다.

미국 힙합 씬과 매체의 영국 힙합에 대한 그간의 오랜 침묵은 사실 자생적 힙합 씬에 대한 영국 언론과 힙합 팬들의 오랜 무지 혹은 무시에서 기인한다. 말하자면, 이들 뮤지션이 미국의 골수 힙합 팬들로부터 적으나마 주목을 받던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영국의 언론 매체와 힙합 팬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배출한 탁월한 힙합 음악과 뮤지션들의 장점에 대한 언급을 노골적으로 피해왔다. 흥미로운 것은, 영국 언론과 힙하퍼들이 오히려 자생적 힙합에 대한 흠집내기에 급급했다는 점이다. 가령 쿠키 크루(Cookie Crew)의 “Rok Da House”(1987)는 영국 평자들로부터 최초의 ‘힙 하우스(hip-house)’ 트랙이라는 기이하고 불명예스러운 작명을 받았고, 위 파 걸 래퍼스(Wee Paa Girl Rappers)나 쉬 록커스(She Rockers) 같은 또 다른 여성 랩 그룹들에 대한 비웃음 또한 이에 못지 않았다. 결국 전에도 언급했었지만, 이러한 자생적 힙합 씬에 대한 극단적인 폄하 속에, 역으로 미국 힙합 뮤지션들과 그들의 음악은 주류와 언더그라운드를 막론하고 1990년대 중반까지 영국 내에서 절대적인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자세한 것은 “브리티쉬 힙합은 존재하는가?” 참조). 따라서 이런 열악한 당시의 영국 내 상황을 감안한다면, 미국 힙합 씬에서 영국의 자생적 힙합에 대한 정보를 취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아마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브릿 합 컴 얼라이브!

20020216121135-WorldService사진설명:1990년대 중반 영국 인디 힙합의 수작, First Down의 [World Service](1994)
그렇다면 오랜 기간 지속된 영국 힙합 씬의 전반적인 침체를 감안할 때, 1990년대 후반 영국 내에서 자생적 힙합 뮤지션들의 뒤늦은 약진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난, 일종의 ‘벼락치기’가 아닌가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초, 중반의 천대받던 시기조차도 탁월한 힙합 뮤지션들이 영국 내에서 존재했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오늘날의 ‘브릿 합 르네상스’를 위한 선구자의 역할을 해왔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가령 아프리카 중심주의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오버로드 엑스(Overlord X), 하드코어 래퍼 하이잭(Hijack), 퍼스트 다운(First Down) 등의 고군분투는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한다.

특히 이스트 엔드(East End) 갱스타 듀오 런던 파씨(London Posse)는 그들의 기념비적 앨범 [Gangster Chronicles](1990)에서 미국 힙합에 대한 의식적인 모방을 지양하고 고유의 라임 스타일을 선보이면서, 독자적 브리티쉬 힙합의 발전을 위한 근간을 마련하였고 오늘날까지도 영국 힙합의 간판 스타 중 하나로 군림하고 있다. 이후 건숏(Gunshot)의 [Patriot Games](1993), 퍼스트 다운의 [World Service](1994), 블랙 트왱(Black Twang)의 [19 Long Time](1998) 등 브릿 합 클래식들이 간헐적으로 나오면서, 미국 힙합을 영국식으로 재해석하고 고유의 스타일을 연마할 수 있는 방법론들이 하나씩 정련되기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루츠 마뉴바나 파이 라이프 사이퍼(Phi-Life Cypher) 등의 새로운 세대 엠씨들이 1990년대 후반에 드디어 영국 힙합 씬의 전면에 부상하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의 영국 힙합 씬에서 이들 탁월한 엠씨들의 활약 외에, 턴테이블리즘의 폭발적 인기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미국(디제이 섀도 DJ Shadow), 일본(디제이 크러쉬 DJ Krush), 러시아(디제이 바딤 DJ Vadim) 등 전 세계의 톱 클래스 턴테이블리스트들이 1990년대 중, 후반에 영국을 기점으로 자신들의 지명도를 확보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닌자 튠(Ninja Tune)을 비롯한 전문 레이블들은 턴테이블리즘의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물론 러프(The Ruf)가 주도하는 지프 비트 콜렉티브(Jeep Beat Collective) 같은 그룹의 영국산 턴테이블리즘 사운드는 현재 ‘추상 힙합(abstract hip hop)’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으며, 더욱이 토니 베가스(Tony Vegas), 프라임 커트(Prime Cuts), 퍼스트 레이트(First Rate), 미스터 씽(Mr Thing), 해리 러브(Harry Love) 같은 영국 출신 디제이들이 ITF나 DMC에서 보여준 성적들은 영국 턴테이블리즘의 드높은 위상과 자존심을 드러내고도 남는다.

이쯤 되면, 영국 힙합 혹은 브릿 합은 적어도 자국 내에서는 1990년대 후반 이후 일종의 르네상스를 만끽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영국의 간판급 엠씨인 루츠 마뉴바의 미국 시장 진출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브릿 합의 미 대륙 상륙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음은 다소 뒤늦은 감이 있다. 물론 미국의 톱 클래스 엠씨들에게 비트를 제공하며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크리에이터스(The Creators), 넥스트 멘(The Next Men) 같은 프로듀서 팀들의 활약이 진작부터 있어왔지만 무대 전면에 나서는 엠씨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루츠 마뉴바와 그의 두 번째 앨범 [Run Come Save Me]는 브릿 합의 미국 시장 내에서의 성공 가능성을 최초로 타진하고 있는 셈이다.

브릿 합 혹은 루츠 마뉴바의 미국 상륙

20020216121135-RunComeSaveMe사진설명 :작년 하반기에 발매된 Roots Manuva의 두 번째 앨범 [Run Come Save Me](2001)
루츠 마뉴바의 음악 스타일은 브릿 합의 전형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단점 또한 극복함으로써, 일단 미국의 인디 힙합 팬들과 언론 매체로부터 만장일치의 긍정적 반응을 얻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사우쓰 런던(South London) 출신의 루츠 마뉴바(본명 로드니 스미쓰 Rodney Smith)는 자메이카 출신 부모 밑에서 태어나, 영국의 사운드 시스템과 레게, 미국 힙합을 들으며 성장한 전형적인 런던의 흑인 청년이다. 노쓰 런던(North London) 출신의 실력파 엠씨 블랙 트왱과의 협업으로 이름을 날린 후 루츠 마뉴바는 1999년에 마침내 자신의 솔로 앨범 [Brand New Second Hand]를 세상에 내놓으며 일약 브릿 합의 간판 스타가 된다. 닌자 튠의 자매 레이블인 빅 다다(Big Dada)를 통해 발매된 이 앨범에서 루츠 마뉴바는 전형적인 트립합에서부터 미니멀한 플로우, 그리고 라가(ragga)에 이르는 폭넓은 사운드 스케이프를 과시하며 영국 내의 골수 미국 힙합 팬들과 클럽의 트립하퍼들, 그리고 사운드 시스템 매니아들을 한꺼번에 사로잡는데 성공하였다.

Witness (1 Hope)
Dreamy Days
(Roots Manuva, [Run Come Save Me] 수록곡 중에서)

대부분의 영국 엠씨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의 라임과 래핑에는 메쏘드 맨(Method Man)이나 라킴(Rakim) 같은 미국의 주류 래퍼들과 배링턴 레비(Barrington Levy)나 케이플톤(Capleton) 같은 자메이칸 뮤지션들의 목소리와 창법이 공존한다. 따라서 엠씨로서 그의 재능을 돋보이게 하고 여타의 브릿 합 엠씨들과 그를 구분하는 것은 단순한 그의 창법 자체라기보다, 지적이면서도 행간의 의미가 돋보이는 가사를 견지한 채 가장 효과적으로 비트를 공격하고 이해할 수 있는 래핑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물론 닌자 튠에서 한발 더 나아간 빅 다다 레이블 특유의 어둡고 두터운 추상적 비트와 기묘한 건반이 조화를 이루며 제공하는 탁월한 사운드가 루츠 마뉴바의 재능을 뒷받침하고 극대화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데뷔 앨범에 대한 영국 내 인디 힙합 팬들과 평자들의 호평에 힘입어, 2년이 지난 후 루츠 마뉴바는 드디어 [Run Come Save Me]라는 두 번째 앨범을 작년 하반기에 발매하였다. 영국 내에서는 팝 차트 상위에 오를 정도로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이 앨범을 통해, 루츠 마뉴바는 예의 두터운 사운드 텍스처와 엠씨로서의 재능을 과시하면서 드디어 본격적으로 미국 시장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있다. 섀기(Shaggy)와 트리키(Tricky)의 사운드에 런 디엠씨(Run-DMC) 같은 전형적 뉴욕 스타일 힙합이 가미되었다는 AMG의 [Run Come Save Me]에 대한 호의적 평가는, 왜 이 앨범이 미국 평단과 인디 힙하퍼들로부터 작지만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지를 증명한다. 자메이칸 스타일의 엠씨잉과 추상적인 힙합 비트의 결합을 특징으로 하는 전형적 브릿 합 위에 지적인 가사와 미국 주류 힙합의 아우라를 덧칠함으로써, 루츠 마뉴바는 영국 힙합의 본격적 미 대륙 침공을 위한 중요한 초석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브릿 합의 정체성을 견지하되 결코 고집을 피우지 않는 루츠 마뉴바, 그리고 같은 레이블 소속의 실력파 엠씨 타이(Ty)나 현재 영국 내에서 가장 잘 나가는 마크 비 앤 블레이드(Mark B & Blade) 같은 뮤지션들이 브릿 합의 미국 침공 선발주자로서 미국 힙합 씬 내에서 당장 어떤 평가와 결과들을 얻어낼지 우리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비록 인디 힙하퍼들과 대학가의 매체들에 국한되었다 하더라도, 이들이 미국 내에서 자신들의 인지도를 한층 더 높여 나간다면 분명 힙합을 매개로 미국과 영국을 잇는, 2000년대를 위한 새로운 ‘블랙 아틀랜틱 커넥션(Black Atlantic Connection)’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20020214 | 양재영 cocto@hotmail.com

관련 글
브리티쉬 힙합은 존재하는가? – vol.2/no.13 [20000701]

관련 사이트
Roots Manuva가 소속된 레이블 Big Dada의 공식 사이트
http://bigdada.com
Roots Manuva의 공식 사이트
http://www.rootsmanuva.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