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115101605-0402us1홈 테이핑은 무엇을 죽이는가? 한 소비자의 대답

지금은 주로 수집가들과 턴테이블리스트 DJ들을 위해 존재하는 전문적 기호품이 되었지만, 1990년대 들어 CD에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는 지배적인 음악 매체였던 비닐 음반은 두 겹의 ‘재킷’ 혹은 ‘슬리브'(sleeve)로 싸여있는 것이 보통이다. 겉의 것은 앨범 제목, 아티스트 이름, 그리고 커버 아트로 치장되어 있는 두툼한 골판지이고, 음반과 직접 접촉하게 되어 있는 안의 것은 대개 플래스틱 코팅을 입힌 종이로 만들어진다. CD가 존재하기 이전 시절, 라이선스를 받아 국내 음반사에서 찍어낸 음반들과 구별하기 위해 ‘원판’이란 용어로 불렸던 수입 비닐 음반들의 안쪽 슬리브에는 간혹 이런 글귀가 눈에 띄곤 했다: “Home taping is killing music.” 아울러 이런 ‘무단 복제’에 대한 경각심을 한층 더 일깨우려는 양 삽화가 거기 따라붙는 수도 있었는데, 카세트 테이프를 해골 바가지로 둔갑시키고 그 아래 뼈다귀 두 개를 교차시켜 놓은 이 그림 — 어떤 모양이 될 지는 상상에 맡긴다 — 은 우습다 못해 차라리 귀엽기라도 했지만, 그게 음반사들의 이 위협적인 경고에 대한 거부감을 상쇄시키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번 돈주고 샀으면 내 것이 틀림없는 마당에, 그들이 뭐라고 감놔라 배놔라 한단 말인가. 음악을 죽여? 비닐 음반으로 산 음악을 버스 안에서 듣고 싶어서 테이프에 녹음하면 죽은 음악을 듣게 된다는 말인가?

물론 이런 반응을 즉물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복잡한 문제들이 소위 ‘복제권'(좁은 의미에서의 문자 그대로 ‘copyright’)을 두고 얽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약간 진지하게 이 문제를 두 가지 다른 각도에서 고찰해보자. 과연 음악을 죽인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첫 번째는 이 문제를 넓은 의미에서의 저작권과 관련된 법률적인 각도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특별한 법률적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일반 청중들에게는 골치 아픈 법조문 및 용어들을 나열하는 게 그다지 관심 끌리는 일은 아니지만 상식적인 수준에서 얘기를 풀어나가 보자. 테이프나 CD-R 등의 공(空) 매체를 이용한 복제행위를 통칭하는 의미로서 홈 테이핑을 둘러싼 주요 쟁점은 이른바 ‘공정한 사용'(fair use)이라는 법률 용어의 적용 한계일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야 ‘상업적 이윤을 목적으로 무단 복제 및 배포’하는 것이 아닌 이상 공정한 사용으로 봐야한다는 입장에 설 테지만, 거대 음악자본과 그 얼굴마담인 미국 음반산업협회(RIAA)가 이런 식의 ‘허술한’ 경계선을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지난 해 ‘냅스터 공방’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의기양양해진 이들은 한 발 더 나아가 복제 방지 기술이 적용된 CD를 내놓기 시작했다. ‘공정한 사용’이고 어쩌고를 떠나서 디지털 홈 테이핑을 아예 원천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일반 소비자들은 자기가 구입한 물건을 사용하는데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된 꼴이다. 왜냐하면 현재 제작되고 있는 복제 방지 CD들은 특정한 기기들에서는(예컨대 컴퓨터 CD-Rom 드라이브) 녹음은커녕 심지어는 재생조차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음악을 죽이는 것은 누구란 말인가?

최근 미국 버지니아주 출신 하원의원 릭 바우처(Rick Boucher)는 홈 테이핑에 관련된 기존 법령들의 모순과 상충되는 점들을 지적하면서, 음반사들이 디지털 녹음 매체(디지털 오디오 테이프(DAT), CD-R, 미니디스크)의 판매수입으로부터 일정액을 일종의 인세로 징수해 왔음을 밝힌 바 있다. 이쯤 되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울분이 안 터질 수 없다. 어쨌든 홈 테이핑의 합법성을 둘러싼 논쟁은 온라인 음악 판매 및 공유 문제와 맞물리면서, 음악인, 음악산업 경영자, 정치인 및 저작권법 변호사가 한데 모인 ‘음악 정책의 미래 정상회의'(Future of Music Policy Summit)라는 공식적인 토론의 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로비활동을 펼치는 음반산업의 대자본에 맞서 과연 소비자들이 지금과 같이 부정적이고 제한적이기만 한 복제권의 일부를 자신들의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권리로 되찾을 수 있을는지는 미지수이지만, 일단은 ‘음악의 미래 연합'(Future of Music Coalition)이라는 조직을 결성해서 이 회의를 성사시킨 뜻 있는 일군의 음악인들과 청중들의 활동은 두고볼 만한 가치가 있다.

20020115101605-0402us2록 밴드 푸가지(Fugazi)의 리더이자 인디 레이블 디스코드(Dischord)의 사장인 이언 맥케이(Ian MacKaye, 사진 왼쪽)가 ‘음악 정책의 미래 정상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저작권과는 또 다른 각도에서 문제에 접근해보자. 홈 테이핑을 굳이 ‘자가 복제’라고 번역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자기가 구입한 상품과 똑같은 물건을 찍어내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단순 복제가 아닌 홈 테이핑은 음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창조적인 이용, 더 나아가 변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장 초보적인 예로는 음악 소비자 자신이 선곡해서 만드는 믹스 테이프(혹은 믹스 CD) 제작을 들 수 있는데, 영화 [High Fidelity]에서 존 쿠색이 설파하는 믹스 테이프 제작의 예술론은 만들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공감할 만한 이야기다. 소비자, 즉 청중의 관점에서 홈 테이핑은 음악 듣기라는 문화적 과정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주요한 수단이자 통로 역할을 한다. 20세기 말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새로운 유형의 음악인들의 성장기에는 아마도 악기를 다루는 훈련만큼이나 집에서 음반들과 녹음 장비를 갖고 놀던 것이 중요한 위치를 점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일리가 없진 않다. 그리고 이들이 숙달하고 있는 테이프 루핑, 샘플링, 컷 앤 믹스 등의 테크닉들은 이런 유치한 수준의 홈 레코딩-홈 테이핑과 직간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으리란 것도. 그렇게 보면 홈 테이핑은 도리어 대중음악 창작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이다.

홈 테이핑에 관한 얘기가 좀 길어진 감이 있는데, 사실 이 글이 다루려고 하는 주 무대는 집이 아니라 공연장이다. 디지털 녹음기술의 발전은 홈 테이핑 뿐 아니라 그 자매뻘이라 할 수 있는 필드 레코딩(field recording), 그 중에서도 공연 부틀렉 녹음을 촉진시켰다. 음향산업체들간의 담합 덕택에 일반인들이 구입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표를 달고 등장한 휴대용 DAT 녹음기는 디지털 부틀렉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미국 시장에서는 CD와 mp3 포맷에 밀려 거의 사장될 지경이었던 소니의 미니디스크(MD)가 고성능 초소형 녹음기로서 틈새 시장을 개척함으로써 그 가능성은 대중화되기에 이른다. 수요의 점진적 증가와 더불어 소형 스테레오 마이크도 저가화 추세를 따르고, 그조차 돈이 아까운 사람들은 동네 전파사에서 재료를 구입해 자가 제작하기도 한다.

물론 디지털 녹음기술이 무슨 특별한 마법이라도 부리는 것은 아니다. 마이크를 사용해 공연을 녹음한다고 할 때, 음질을 좌우하는 것은 디지털이냐 아날로그냐 보다는 우선 마이크의 성능일 것이다. 원래 긴 장화(boot)의 목에다 물건을 슬쩍 숨겨 갖고 들어오는(혹은 나가는) 것을 의미한 ‘부틀렉'(bootleg)의 어원이 시사하듯 밀반입하는 녹음장비들은 작고 간단할수록 좋을 텐데, 대개 성능은 크기와 복잡성에 비례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어찌되었든 간에 마이크를 갖고 청중들 틈에서 녹음하는 이런 류의 부틀렉은 음질 면에서 공식 라이브 녹음에 비할 바 못되는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비교적 덜 상업성을 띠는 중소규모 인디 공연의 경우, 공연 관리자들이나 음악인들에게 말만 잘 하면 공연의 음향을 통제하는 믹싱 콘솔(사운드 보드)에 녹음기를 연결시킬 수도 있는데, 운이 좋으면 이렇게 해서 고음질의 ‘반(半)합법적’ 부틀렉이 탄생한다. 윌 올댐(Will Oldham)의 분신인 보니 프린스 빌리(Bonnie Prince Billy)의 독일 공연 부틀렉이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20020115101605-0402us3보니 프린스 빌리의 2001년 유럽 투어

Bonnie Prince Billy, “A King At Night”, Live in Munich, Germany, 8/4/2001

메이저 레이블에 소속된 음악인들의 공연에서 이런 류의 행운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때로는 고음질의 ‘불법’ 부틀렉이 떠돌아다니는 수도 있는데, 이는 공연 관련 내부자가 밀반출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종류의 비교적 고음질인 부틀렉은 라디오 실황공연을 녹음하는 것인데, 영국 BBC 1 라디오의 DJ 존 필 세션(John Peel Sessions)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사실 필 세션의 경우 BBC 웹사이트에서 리얼오디오를 통해 감상할 수 있는데도 부틀렉이 나도는 걸 보면, 열성적인 팬들은 광적인 수집가들이기도 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Low, “Last Snowstorm Of The Year”, Peel Session, 1/2/2002

이런 부틀렉 공연 녹음들은 mp3 압축 기술 및 고속 인터넷 덕택에 대개는 비상업적 경로로 유통된다. 표값이 비싼 공연일수록 녹음장비 밀반입을 막으려는 입장 전의 몸수색 및 소지품 검사는 더 철저하지만, 거기서 나온 부틀렉이 입장료에 비례하는 상업적 가치를 띠고 있느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특히 앞서 말한 자가 제작 로 파이 부틀렉의 경우는 그 자체의 상업적 혹은 미학적 가치보다는 정서적 가치가 지배적이다([weiv]에도 리뷰가 실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부틀렉 시리즈는 로 파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적’ 가치 덕택에 상업성을 인정받은 드문 경우에 속할 것이다). 마치 여행가서 자기 모습이 들어간 기념사진을 찍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녹음된 음악은 체험된 시간성과 공간성을 부여받는다. 몇 년 몇 월 며칠 어느 도시 어느 공연장에서. 돌아와서 얼마 지난 후 다시 들어보는 녹음된 음악은 음질은 떨어질지 몰라도, 가장 가까이 들리는 자기 자신의 박수 소리, 옆에 있는 사람의 기침 소리와 같은 소음들조차도 그 때 그 자리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려 줄 것이다. 따라서 부틀렉 녹음을 뜨는 것은 청중으로서 또 하나의 적극적인 문화적 소비행위인 셈이다. 비록 그것이 저작권 침해라는 ‘범죄’의 구성요건이 된다 하더라도.

Suzanne Vega, “Left Of Center”, Live at Barrymore Theater, Madison, Wisconsin, 12/5/2001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의 미디어 학자인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는 스타 트렉이나 스타 워즈 같은 공상과학 TV 드라마나 영화의 열성적인 팬들이 화면을 보고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스타 워즈 외전(外傳)’ 따위의 비공식 대본을 쓰거나 홈 비디오를 만들고 돌려보면서 즐기는 현상에 주목한다. 이처럼 주어진 문화 상품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전유(專有)와 변형을 통해 새로운 문화적 산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그는 ‘밀렵꾼 예술'(poacher’s art)이라 부르는데, 대중음악의 영역에서 홈 테이핑이나 공연 부틀렉 녹음도 이런 개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문화가 생산되고 향유되는 장에서 생산과 소비의 과정은 뒤엉키고, 교류하며, 치환된다. 그러나 생산자와 소비자의 역할을 항상 명확하게 구분 짓는 데는 거간꾼들, 중간 상인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밀렵꾼 예술을 증오하고, 그게 음악을 죽인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이다. 20020112 | 김필호 antioedipe@hanmail.net

p.s. 이런 저런 공연 부틀렉을 소개하는 ‘Bootleg Galore’는 앞으로 US line의 일부로 연재할 계획이다.

관련 사이트
CD 복제 합법화를 다룬 기사들
Could CD-copying actually be legal?
Lawmaker: Legalize home CD burning

음악의 미래 연합 사이트
http://www.futureofmusic.org/index.cfm
BBC1 라디오 존 필 세션 페이지
http://www.bbc.co.uk/radio1/alt/peel.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