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로 번역해 놓으니 다소 우습게 읽히는 제목이긴 하지만, 이 ‘젠체하기’란 요즘 아메리칸 인디 록 음악계를 풍미하는 새로운 태도(attitude)인 성싶어 몇 마디 안할 수 없다. 그리고 짐 오루크는 그런 주제를 논하기에 딱 알맞은 인물이기도 하다. 세간에 알려져 있다시피 오루크는 소위 시카고 포스트록 씬의 두뇌격인 기타리스트/프로듀서/멀티 인스트루먼티스트로서, 레드 크레욜라(Red Krayola)와 가스트르 델 솔(Gastr del Sol)에서의 밴드 활동을 비롯, 스테레오랩(Stereolab)과 소닉 유쓰(Sonic Youth) 최근작들의 프로듀싱 및 엔지니어링, 더 나아가 유럽의 소위 ‘지적인 댄스 음악'(Intelligent Dance Music: IDM) 레이블인 밀 쁠라토 (Mille Plateaux) – 오발(Oval), 가스(Gas)등을 거느린 – 의 리믹스 작업 및 노장 크라우트록 밴드 파우스트(Faust)의 20년만의 컴백 앨범 제작에 이르는, 대서양을 넘나들며 장르를 횡단하는 그야말로 휘황찬란한 경력을 자랑한다. 이쯤 되면 차세대 브라이언 이노라고 불러도 별 무리가 없을 듯싶다.

20011216010154-0324us_gastr가스트르 델 솔, 왼쪽이 짐 오루크, 오른쪽은 데이비드 그럽스(David Grubbs)

돌이켜보면 1990년대 초중반 시카고-루이빌을 잇는 미국 중부의 언더그라운드 음악 씬은 그 용광로적인 성격 면에서 1970년대 말 – 1980년대 초 펑크/포스트펑크의 주무대였던 런던과 뉴욕에 비견할 만하다. 그중 몇몇 대표적인 흐름만 꼽아서 말하자면, 너바나 덕택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노이즈 펑크의 대명사 스티브 앨비니(Steve Albini), 루이빌 얼터너티브 컨트리의 괴짜 윌 올댐(Will Oldham), 힙스터 재즈 뮤지션 롭 마주렉 (Rob Mazurek)이 이끄는 시카고 언더그라운드 공동체, 그리고 물론 토터스(Tortoise)를 빼놓을 수 없겠다.

이런 ‘펑크 + 프리 재즈 + 컨트리’의 복합체에 오루크는 정규 음악 교육을 바탕으로 한 현대 실험음악의 작법을 포개놓았다. 실제로 1995년의 [Terminal Pharmacy]까지 무조(無調)의 전자음향을 앞세운 그의 초기 솔로 작업들은 대중음악보다는 현대 클래식 음악의 영역에 훨씬 더 가깝다. 그가 대중음악의 문법에 가까운 음악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은 가스트르 델 솔에 참여하면서부터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1996년의 [Upgrade And Afterlife]로 시작해서 이듬해 오루크의 또 다른 솔로 앨범인 [Bad Timing], 그리고 가스트르 델 솔의 마지막 앨범인 [Camoufleur]로 이어지는 유려한 멜로디와 명징한 어쿠스틱 기타 사운드로 나타난다. 본격적인 솔로 뮤지션으로 복귀한 오루크가 발표한 1999년의 [Eureka]는 그전까지의 점진적인 스타일 변화에 주목해온 사람들에게조차 일종의 충격을 던지는 것이었는데, 여기가 바로 이 글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만한 웹진 피치포크 미디어(pitchforkmedia.com)가 등장해야 할 시점이다.

20011216010154-0324us_eureka[Eureka]의 앨범 표지. 일본 만화가 도모자와 미미요의 우편엽서 그림.

아메리칸 인디 록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면 이미 잘 알고 있을 웹진 피치포크 미디어는 최신 앨범 리뷰를 중심으로 하고, 그 외에 인디 밴드들의 신작 출시일 및 투어 일정 등의 뉴스와 뮤지션 인터뷰를 싣는 미국 인디 록의 일종의 트렌드 세터(trend setter)격인 매체다.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유보를 달아야 하겠지만, 피치포크 미디어의 리뷰와 인터뷰들은 간혹 ‘인디 록의 젠체하기’라는 태도를 잘 보여주곤 한다. 전문 음악지에 기고하는 평자들이 지난번 잠시 언급한 바 있는 이른바 ‘엘리트 청중’의 범주에 속할 것임은 분명한데, 이런 엘리트적 취향은 어떤 식으로든 출판됨과 동시에 추종과 더불어 저항을 낳는다. 피치포크의 10점제 평점이든 [weiv]의 5개짜리 별점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조금이라도 평가절하한다면 누구든 기분이 좋을 리 만무하다. 그걸 만들어낸 음악인의 기분은 더더구나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래서 대중음악 연구자인 로이 셔커 (Roy Shuker)가 말했다시피, 음악인과 평론가, 평론가와 청중은 언제 어디서든 늘 교전 중에 있게 마련이다. 즉, 취향은 갈등을 내포한다. 어떤 종류의 음악이든 이런 갈등을 안고 있게 마련이지만, 제도화된 엘리트/대중의 경계가 불분명할수록 갈등은 증폭된다. 예컨대, 얼마 전 10부작 [재즈 Jazz]를 내놓은 미국의 대표적 다큐멘터리 제작자 켄 번즈(Ken Burns)는, 한 인터뷰에서 [재즈]를 제작하면서 매우 곤란했던 점들 중 하나로 ‘재저라지'(jazzerazzi: jazz와 paparazzi의 합성어로, 나름대로의 전문적 지식과 취향으로 무장하여 기성 평단에 끊임없는 불만을 터뜨리는 재즈광들을 가리킨다)의 끊임없는 간섭을 들고 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인디 록의 젠체하기’라는 태도 또한 비슷한 상황을 설명하는 데 쓰일 수 있겠는데, 피치포크 미디어의 때로는 오만해 보이조차 하는 리뷰나 인터뷰 스타일 등이 여기에 한몫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래도 역시 먼저 언급할 필요가 있는 건 이 웹진의 주요 독자들이다.

얼마 전부터 나는 우연한 기회에 한 조그만 사설 인터넷 포럼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데, 거기 모인 20대-30대 초반의 인디 음악 팬들은 내게 최근 인디 록 청중의 성격에 대한 참여관찰의 기회를 자연스레 제공해 주었다. 대학생이거나 컴퓨터 관련 전문직이 주종을 이루지만 간간이 지역 뮤지션이나 DJ 혹은 인디 레이블 운영자도 눈에 띄는 이 집단은 90% 이상이 백인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CD 복제와 고속 광대역 인터넷 접속은 기본인 것으로 보아 최소한 중산층 이상의 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음악적 취향 면에서는 인디 록, IDM은 말할 것도 없고 언더그라운드 힙합, 쿨 및 프리 재즈, 크로노스 쿼텟(Kronos Quartet)이나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등의 현대 전위 음악, 펠라 쿠띠의 아프로비트와 까에따누 벨로주의 뜨로피칼리아를 아우르는 상당한 폭을 지니는데, 앞서 짐 오루크의 경우처럼 최근의 인디 록, 특히 ‘포스트록’으로 일컬어지는 조류가 참조하는 방대하고 복잡다단한 음악적 흐름들을 감안한다면 이는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전체 인디 록 청중을 놓고 볼 때 이런 집단의 비중이 얼마나 될 지는 나로선 알 도리가 없지만, ‘젠체하는’ 태도가 횡행하는 데 이들의 역할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한편으로는 피치포크를 ‘비치포크'(bitchfork)라고 비웃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곳의 신규 평자 모집에 슬며시 응모해서 리뷰를 써 보내기도 하는 데서 드러나는 전형적인 양가감정은, 피치포크의 필진이나 주요 독자들이 그다지 크게 다른 부류가 아님을 입증하는 듯하다. 아마도 이렇듯 같은 지반에서 벌어지기에 ‘서로 더 잘났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들의 취향 투쟁이 더욱 격렬해 보이는 것이겠지만.

이제 다시 짐 오루크 얘기로 돌아와서, 우리의 두 주인공들을 맞대결시켜 보도록 하자. 사건의 발단은 피치포크 미디어의 현 편집장인 라이언 슈라이버 (Ryan Schreiber)가 [Eureka]에 대해 매우 ‘악질적인’ 리뷰를 쓴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앨범에서 오루크가 선보인 충격적인 멜로딕 팝과 아기자기한 코러스 및 관현악 편곡, 그리고 버트 배커랙(Burt Bacharach) 커버는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는데, 슈라이버는 이참에 ‘짐 오루크 밴드왜건’에서 뛰어내릴 단단한 작심이라도 한 듯 좀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이 앨범을 깎아 내렸다. 그의 평에 동의하건 말건 간에, 자신의 의견과 취향을 표현하는 건 그의 권리에 속하는 것이므로 문제삼을 이유는 별로 없다. 하지만 이게 제 2 라운드로 넘어가면서 점차 가관이 되어 가는데, 오루크의 후속 EP [Halfway To A Threeway](2000) 리뷰에서 슈라이버는 정작 음악 평은 한 문단으로 줄여놓고, 나머지는 자신의 지난 앨범 리뷰에 대해 오루크가 얼마나 무례하게 반응했으며 따라서 그에게 인간적으로 실망했다는 투의 이야기로 채우고 있다. 슈라이버와 오루크의 무산된 피치포크 인터뷰에 대한 일종의 가십 기사가 되어버린 이 글을 읽고 있노라면, 둘 중 누가 정말로 ‘못돼먹은’ 인간인지에 대한 평가를 유보한다손 치더라도, 피치포크 풍의 ‘인디 록 젠체하기’의 빤한 바닥이 들여다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Something Big composed by Burt Bacharach, from [Eureka]

20011216010154-0324us_karaoke일본의 한 가라오케에서 열창하는 짐 오루크.

올해 10월 새로 발매된 오루크의 [Insignificance]는 전반적으로 이전 두 앨범들과 같은 맥락에 놓이지만, 거기에 또 한번 예상을 뒤엎는 회전을 줘서 단순한 록큰롤이 얼마만큼이나 말끔하게 포장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첫 트랙 “All Downhill From Here”는 전기 기타가 이끄는 흥겨운 드라이브에 오루크의 약간 코웃음치는 듯한 보컬이 자조적인 가사를 읊는 것으로 시작해서는, 중간에 두어 차례 어쿠스틱 기타, 피아노, 비브라폰이 자아내는 특유의 전원풍 간주를 삽입했다가 막판의 rock-on으로 끝을 맺는데, 이는 앨범의 전반적 분위기를 대변한다. 헤비 기타 리프의 박력에 비치 보이스 식 남성 코러스가 귀를 끄는 “Therefore I Am”이나, 싱코페이션이 걸린 리듬감이 돋보이는 “Memory Lane”이 21세기적으로 프로듀싱된 복고 록큰롤로 들린다면, 후반부를 장식하는 “Get A Room”이나 “Life Goes Off”(마지막 2분 여간 노이즈의 향연을 제외하고)은, 미국 하트랜드(Heartland)의 싱어송라이터 전통으로 회귀하는 것 같다. ‘젠체하기’ 좋아하는 짐 오루크씨는 이런저런 시도가 다 그저 별로 하찮은(insignificant) 장난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All Downhill From Here
Therefore I Am
from [Insignificance]

피치포크의 반응은? 이번 리뷰는 슈라이버가 아닌 다른 사람이 쓰면서 좀 나아지긴 했지만, 오루크에 대한 인신공격은 여전히 상당한 지면을 차지한다. 이번엔 그가 최근 뉴욕으로 이주한 것이 문제시되는데, 자신이 시카고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평자는 오루크가 고향을 떠나면서 시카고 씬에 대해 ‘악질적인’ 코멘트를 해댄 것에 대해 불만이 상당히 많은 모양인지, 이번 앨범의 가사를 그에 두들겨 맞춰 해석하려 한다. 오루크가 시카고 음악판을 가리켜 뭐라고 했던 간에 별 관심 없는 나로서는, 그런 ‘별로 하찮은’ 일들은 잊고 좋은 음악을 즐기고 싶을 따름이다. 20011211 | 김필호 antioedipe@hanmail.net

후기: 이 글을 마칠 무렵 피치포크 미디어를 다시 들여다보니, 오루크가 또 다른 신작 앨범을 오스트리아 Mego 레이블을 통해 발매한 모양이다. 그들의 ‘악연’이 또 다시 이어질 지는 두고 봐야 하겠다.

관련 사이트
피치포크 미디어 Jim O’Rourke 리뷰
[Eureka] http://pitchforkmedia.com/record-reviews/o/orourke_jim/eureka.shtml
[Halfway To A Threeway] http://pitchforkmedia.com/record-reviews/o/orourke_jim/halfway-to-a-threeway.shtml
[Insignificance] http://pitchforkmedia.com/record-reviews/o/orourke_jim/insignificance.shtml
Jim O’Rourke 인터뷰: “무식한 인디 키드”들에 대한 오루크의 신랄한 반격. 그래서 피치포크 필진들이 오루크의 ‘인간성’을 문제삼는 것도 이유가 없진 않다. 리얼오디오 링크 포함.
http://chicago.citysearch.com/feature/15887
Jim O’Rourke 디스코그라피
http://tisue.net/orour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