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216123252-0324essay_strokes1올 한 해 서양의 평단을 가장 열광시켰던 밴드는 말할 나위 없이 스트록스(The Strokes)다. 음악 전문지들에서는 그들에게 온갖 찬사를 쏟아 부었고 그들의 앨범 [Is This It]은 [NME] 선정 올해의 앨범 1위에 등극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그들의 음악을 접한 일반 팬들의 열기는 그렇게 달아오르지 않은 것 같다. 스트록스는 그저 괜찮은 신인 밴드에 불과할 뿐 그렇게 대단한 그룹은 아니라는 것이 적지 않은 사람들의 반응이다.

그렇다면 평론가들은 왜 그토록 스트록스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까? 스트록스는 또 하나의 거대한 로크롤 사기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평론가들이 집단적으로 뭐에 홀리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러나 서양의 평론가 및 언론을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좀 성급한 행동인 듯싶다. 그들은 음악에 대한 판단을 직업으로 삼고 있으며 누구보다도 열심히 음악을 접하는 사람들이다. 이 점에서 적어도 그들의 안목과 식견을 어느 정도 존중해줄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과연 이들이 왜 이런 판단에 도달하게 되었는가를 따져보는 일이다.

내가 보기에 스트록스의 등장은 록 음악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표상하는 일대 사건이며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야말로 오늘날의 시대정신을 정확히 반영하는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록 음악은 언제나 반체제적 성향을 지녀왔다. 물론 여기서 반체제를 말하는 것은 ‘록=저항’이라는 낡은 공식으로 회귀하기 위함이 아니다. 록은 그것이 저항성을 지녔든 지니지 않았든 지배체제의 외부에서 발생하고 성장해왔다는 뜻이다. 1950년대 미국에서 로큰롤이 발명된 이래로 록 음악을 했던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사회의 소외계층 출신이었다. 그들은 노동계급의 성장배경을 갖고 있든지 아니면 유복한 가정환경을 부정하고 뛰쳐나온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항상 지배체제의 골칫거리로 여겨졌고 이들의 음악은 지배계급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무시당해 왔다.

이들이 이러한 지배계급에 대응하는 방식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1950년대의 로큰롤러들은 자신들을 깔보는 지배계급의 탄압에 묵묵히 버티면서 음악을 했다. 록 음악인들이 이런 상황에 대해 자의식을 갖고 대응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부터였다. 이들의 대응방식은 록 음악을 보다 깊이 있고 진지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지배문화의 인정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시도는 지배층 일부의 지지를 이끌어 냈고 이에 따라 록을 함부로 볼 수만은 없다는 견해가 조금씩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배계급 사이에 ‘록=저질음악’이라는 일반적 선입견은 아직도 요지부동이었다.

1970년대에 등장한 펑크는 이러한 지배계급에 대한 전쟁선포였다. 펑크는 ‘너희가 우리를 깔보면 우리도 너희를 무시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부르주아의 취향과 가장 배치되는 음악적 형태를 채택해서 자신들만의 미학관을 통해 펑크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펑크의 수명은 너무나 짧았고 이를 끝으로 반체제로서의 록도 그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어 갔다. 지배계급이 드디어 록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인정한 것은 그것의 예술적 가치가 아니라 그것의 상품가치였다. 이 시기에 접어들어 음반 제작비와 공연 규모는 엄청나게 커졌고 이에 따라 록 음악인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만질 수 있었다. 자연히 1980년대의 음악은 ‘돈 많이 벌어서 신나게 즐겨보자’는 방향으로 치닫게 되었다.

1990년대 초가 되어 록은 그런지라는 이름으로 모처럼 지배체제에 대한 공격적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지 않아 제풀에 꺾이고 말았다. 지배체제는 더 이상 록의 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록이 돈벌이가 잘되는 사업인 한 지배계급이 그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지배계급은 이제 스스로도 록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런지의 좌절 이후 등장한 브릿팝은 록이 지배체제에 완전히 통합되었음을 알려주는 징표였다. 이제 록은 체제의 아웃사이더로서의 긴장과 에너지를 상실한 채 스스로에 대한 패스티시로 수명을 유지해나가는 음악으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 속에서 록은 급속히 성장한 힙합과 하우스에 청년문화의 제왕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20011216123252-0324essay_strokes221세기 초엽에 나타난 스트록스는 이러한 록의 발달과정을 새로운 국면으로 끌어 올렸다. 비록 1980년대 이후부터 체제에 편입되기 시작했지만 록은 노동계급 및 소외계층의 음악으로서의 전통을 유지함으로써 마지막 남은 진정성을 보존해 왔다. 그러나 스트록스는 이러한 전통에 대해서마저도 작별을 고함으로써 진정성의 문제를 완전히 제거해 버렸다. 이들은 과거의 록 음악인들과는 달리 자신들이 부유층의 자제임을 숨기려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값비싼 디자이너 브랜드로 차려입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톱 클래스의 레코드 콜렉션을 앞세운 이들은 록을 소외계층의 거친 자기표현에서 지배계급의 특권화된 취향으로 전환시킨다. 이들은 오늘날 지배계급의 성원으로 탈바꿈한 1960년대 부르주아 히피의 자제들이다. 이들 1960년대 히피는 젊은 시절부터 록에 대한 취향을 발전시켜 왔고 지금은 그것을 지배계급 문화의 한 요소로까지 격상시켰다. 따라서 현재의 지배계급은 록을 경멸하던 과거의 구지배계급과는 다르다. 현재의 지배계급은 자기의 자제들이 록 뮤지션이 되겠다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고급스러운 음악을 하기만을 바라는 것뿐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지배계급은 소비자였을 뿐 생산자는 아니었다. 생산은 언제나 사회의 기층을 이루는 인민대중의 몫이었다. 이것이 음악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지배계급의 성원들이 하는 록이란 듣기에 고상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계급적 에너지와 인생의 깊이가 담긴 것일 수는 없다. 그들은 인생의 고통이나 소외의 경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록의 진정성을 구성해온 것은 바로 이 계급적 에너지였다. 그것이 증발해버린 록은 현실 속에서 꿈틀거리는 삶의 표현이 아니라 박제로 굳어진 스타일에 불과하다. 스트록스는 록의 이러한 현실을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꿰뚫고 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자기 표현으로서의 록이 아니라 ‘고급 음악’으로서의 록이다. 이들의 록은 ‘외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충동의 산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풍족한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문화적 활동이다. 이들의 등장은 이제 록이 부르주아의 칵테일 파티에서 나눠지는 교양 있는 대화의 소재로 격상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삐까뻔쩍한 외모와 이들이 들려주는 귀족적 취향의 음악은 어쩌면 오늘날의 록 음악이 가장 간절히 요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서양의 비평가들은 바로 이 점을 매우 예리하게 그리고 섬뜩할 만큼 예지력 있게 포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011213 | 이기웅 keewle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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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kes [Is This It] 리뷰 – vol.3/no.19 [20011001]

관련 사이트
The Strokes 공식 사이트
http://www.thestrok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