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130112608-0323zemfira-zemfiraZemfira – Zemfira – Zemfira/Real Records, 1999

 

 

러시안 ‘얼터너 걸(alterna girl)’의 분홍색 상처

앨범 커버는 전체적으로 보면 연분홍색이고, Zemfira라는 말의 러시아어 문자가 적혀 있을 뿐이다. 자세히 보면 연분홍색은 꽃이고 그래서 무슨 벽지 같다. ‘비주얼’을 강조하는 음악산업의 경향이 러시아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라면 매우 이례적이다. 뮤지션의 이미지는 커버 뿐만 아니라 부클릿 등 음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음반의 주인공이 ‘여성’이라면 더욱 이상하다. 얼굴이 못 생겼기 때문에? 최근 등장하는 러시아의 젊은 여가수들처럼 꽃 같은 미모를 자랑하지는 않더라도, 나름의 카리스마와 중성적 매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이는 의도적으로 보인다.

이는 이 음반이 ‘인디펜던트’하게 제작되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가수의 모든 것’을 관리한다는 러시아 프로듀서의 입김을 배제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음반은 1999년을 ‘젬피라의 해’로 만든 작품이 되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젬피라를 발굴한 인물은 ‘1997년의 발견’인 무미 뜨랄(Mumiy Troll)의 리더 일리야 라구쩬꼬(Ilya Lagutenko)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 음반은 팝 스타덤에 오른 뮤지션의 작품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충분한 자율성을 지니고 제작되었다.

첫 트랙 “Pochemu(왜)”의 가사는 남자와 헤어진 여자의 애증 섞인 미련을 담고 있다. 키보드라고 부르기에는 촌스러운 오르간 소리는 러시아 대중음악의 전통(이른바 ‘에스뜨라다(estrada)’)을 떠오르게 한다. 집시 음악에서 원용한 단조(주로 A minor)의 코드 진행, 신서사이저 음향에 기초한 편곡, 고독한 사랑타령을 담은 가사로 요약되는 ‘전통’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뜻이다(알라 뿌가쵸바의 “백만송이 장미”를 연상하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이 곡은 젬피라 최초의 히트곡이 되었다. 그렇지만 곡이 진행되면서 느낌은 묘하게 변한다. “Pochemu(‘빠체무’라고 발음한다)”라고 외치는 코러스가 시작되면서 짧게 끊어치는 기타, “빠라빠빠”라면서 무의미한 의미의 보컬 애드립 부분에 이르면 ‘무언가 다르다’는 인상이 확연해진다.

비음이 섞였으면서도 날카롭고 수다스러운 목소리의 매력은 어쿠스틱 기타의 스트러밍 위에서 부르는 두 번째 곡 “Sneg(눈)”에서 유감없이 드러난다. 특히 마지막에서 “Sneg…(‘스녝’으로 발음한다)”이라고 외치는 부분은 얼음공주(ice princess) 같은 서늘함으로 다가온다. 이 곡만 해도 ‘무언가 열정을 숨기고 있다’고 느꼈다면, “Sinoptik(기상예보관)”을 거쳐 “Skandal(스캔들)”이나 “Rakety(불꽃놀이)”에 이르면 거친 톤의 기타와 더불어 터지는 그녀의 격정적 보컬을 들을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몇 개의 조용하고 차분한 곡들도 있다. “Prapevochka(대중가요)”는 비극적 바르드(bard)인 양까 지야길레바(Yanka Dyagileva)가 천국에서 춤을 배우고 돌아와서 부르는 노래 같고, 마지막에 있는 “Zemfira”는 ‘트립합의 국제적 영향’을 확인하라는 듯 음울한 일렉트로닉 음향 위에서 상처받은 여인의 토치 싱잉(torch song)이 흘러나온다.

방금 언급한 “Zemfira”와 “Ne Poshloe(속물적이지 않아)”의 무드와 코드 진행이 무언가 재지(jazz)하다고 느꼈다면, “Rumba”는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 남미의 정열이 녹아 있고, “-140″같은 곡은 본격적으로 보싸 노바라고 해도 좋을 코드 진행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추운 지방에 살면서 웬 룸바와 보싸 노바?’라는 의문이 든다면 젬피라가 16살 때부터 지방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로 재즈 보컬과 모타운 소울을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말하자면 현대 세계는 지리적으로 오지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문화적으로는 ‘글로벌라이즈’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왠지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다 하지는 못했다는 인상을 준다. 22살의 나이로는 앨범의 제작 전체를 통제하기는 무리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이 정도만으로도 파격적이라는 것을 의식했기 때문일까. 그래 맞다. “애니는 요구했다. 티셔츠를 벗으라고”(“Maechki(티셔츠)”)라든가 “우리는 이제 곧 모두 죽을 거야 랄랄라”(“Spid(에이즈)”)라는 가사만으로도 충분히 쇼킹하니까. 20011130 | 신현준 homey@orgio.net

7/10

수록곡
1. Pochemu(Why)
2. Sneg(Snow)
3. Sinoptik(Weather Forecaster)
4. Romashki(Camomile)
5. Maechki(T-Shirts)
6. Spid(AIDS)
7. Rumba(Rumba)
8. Skandal(Scandal)
9. Ne Poshloe(Not Vulgar)
10. Prapevochka(Pop Song)
11. -140
12. Arivederchi(Arrivederci)
13. Rakety(Fireworks)
14. Zemfira(Zemfi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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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도 ‘록의 시대’가 있었네(7): 글로벌 시대의 로컬 록을 향하여 – vol.3/no.23 [20011201]
Zemfira, [Prosti Menya, Moya Lyubov’] 리뷰 – vol.3/no.23 [20011201]

관련 사이트
Zemfira 온라인 (러시아어)
http://www.zemfira-online.orc.ru
Zemfira 관련 기사 (영어)
http://www.salon.com/ent/music/feature/2000/02/29/zemfira
Zemfira, [Zemfira] 전곡 mp3 다운로드 사이트
http://txt.zvuki.ru/M/P/8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