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구분짓는 선들 – 장르라 부르든 뭐라 하든 – 은 단지 음악만을 갈라놓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것들은 청중들을 구별짓고, 그들의 생활양식을 표상하며, 지역, 인종, 계급, 성, 그리고 세대를 갈라놓고 또 때로는 대립시킨다. 당연히 음악을 만들어내는 음악인들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적당히 훈련된 귀를 갖고 있다면, 서로 다른 두 연주자(또는 가수)가 설사 악보 상으로는 똑같은 단 한 소절만 연주한다 해도 어느 편이 내쉬빌(Nashville)에 가깝고 어느 편이 디트로이트(Detroit)에 가까운지 판별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여기서 내쉬빌이나 디트로이트가 단순한 지명(地名) 이상의 의미를 띠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런 구별의 선들은 자주 우리에게 불편함을 주거나 불쾌함을 주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을 단칼에 자르듯 거부해 버릴 수 있느냐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예컨대, 당신은 모든 종류의 음악을 차별없이 다 좋아한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건 뒤집어 말하면 ‘(특별히) 좋아하는 음악이 없다’거나 ‘음악 그 자체에 큰 관심이 없다’는 얘기와 별반 다를 바 없이 들린다. ‘무차별=무관심’이라는 등식이 단지 영어 단어 ‘indifference’의 어원학적 유래에만 머물지 않듯이. 그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음악을 듣고 관련 지식을 쌓아서 모든 장르, 모든 분야에서 옥석을 가려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구별의 선들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더 세분화하고 내면화함으로써 결국 청중은 자기 자신을 더더욱 (남들로부터) 차별화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세련된 ‘엘리트’ 청중의 등가물은 음악인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이런 엘리트 음악인들에게 음악적 경계(장르 구분)를 넘나드는 것은 종종 음악과 비(非)음악간의 경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의 부산물이라는 점이다. 이런 이들에게 따라붙는 칭호는 ‘전위(avant-garde)’인데, 이 또한 결국은 이들을 다른 음악인들과 구별짓는 또 다른 선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서설이 길어진 것은 여기 또 한 사람의 ‘전위 음악가’ 기타리스트 마크 리보(를 소개하기 위해서다. 그의 음악에서 알기 쉬운 구별의 선들을 뽑아내 보자면 클래식 기타 솔로, 재즈, 록, 라틴 음악(쿠바 및 아이티)이 되겠지만, 실제로 그는 어느 한 곳에도 딱히 머물러 있지 않는다. 마크 리보와 모조 꾸바인들 내가 그를 처음 본(그리고 들은) 것은 작년 겨울 크리스마스 무렵, 그와 동료 전위 음악 패거리들 – 존 존(John Zorn), 존 루리(John Lurie), 아르뚜 린지(Arto Lindsay), 이꾸에 모리(Ikue Mori) 등 – 의 아지트 격인 뉴욕 맨해튼 다운타운의 실험음악 클럽 토닉(Tonic)에서였는데, 거기서 그는 자신의 밴드인 마크 리보 이 로스 꾸바노스 뽀스띠조스(Marc Ribot y Los Cubanos Postizos)를 이끌고 꾸바 손(son)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Arsenio Rodriguez)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을 필두로 한 당시의 꾸바 음악 붐에 눈치 빠르게 편승한 듯한 이 시도는 달리 보면 그에 대한 신랄한 풍자로 읽힌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밴드의 이름과 그들의 첫 앨범 제목(“Prosthetic Cubans”)은 똑같이 ‘모조(가짜) 꾸바인들’로 번역되는데, 이는 그들이 진정한(authentic) 꾸바 음악을 발굴하는 것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음을 보여준다. 리보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로드리게스의 음악은 로큰롤과 매우 흡사한 단순하고 흥겨운 코드진행을 따른다고 하는데, 이는 최소한 리보 자신의 모조 꾸바 음악에는 잘 들어맞는 것임에 틀림없다. 하여간 얼마간의 청각적 고문을 기대하고 그곳을 찾은 나로서는 의외의 수확이었고, 개인적으로는 테러 이전 뉴욕의 마지막 기억으로 남는 것이다. 공연을 보고 돌아와서 좀 자세히 살펴본 리보의 음악적 경력에는 저 멀리 한구석에 아이티의 클래식 기타리스트 프란츠 카세우스(Franz Casseus)와 또 다른 한구석에 집시 출신 재즈 기타리스트 쟝고 라인하트(Django Reinhardt)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한편으로는 노 웨이브(No Wave)라고 불린 1980년대 뉴욕 전위 펑크 록 씬에서 활약했던 재즈-펑크 밴드 라운지 리자즈(Lounge Lizards)가, 다른 한편으로는 탐 웨이츠(Tom Waits)나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같은 록 음악의 작가(auteur)들과의 협력이 자리잡고 있지만, 실제로 그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부터였다. 그의 노 웨이브 동료들이 ‘전위’라는 칭호에 걸맞게 앞장서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는 동안, 그는 주로 “재능 있는 반주자”(뉴욕 타임즈)의 역할에 충실한 채 별반 이름을 날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동안 그는 뉴욕 전위음악 씬의 간판(frontman)은 아닐지라도, 솜씨 좋은 장인(craftsman)의 지위를 굳힌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음악이 다른 전위음악 동료들에 비해 덜 오만하고, 덜 엘리트지향적이며 따라서 좀더 친근하게 들리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으려니 하고 넘겨짚어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사진설명:재즈-펑크 밴드 라운지 리자즈. 왼쪽에서 네 번째가 마크 리보. 말이 난 김에, 이들 ‘엘리트 음악인’들 특유의 접근하기 어려움은 단지 음악 그 자체의 난해함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선 이들의 음악은 낮 시간 라디오를 틀면 아무 때나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찾아 들어야 하고, 물론 동네 레코드 가게에서 음반을 수월히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공연을 보려 한다면 비행기를 타거나 천 마일을 하루 내내 자동차로 달려서 뉴욕까지 가는 게 상책이다. 같은 미국이라지만, 중서부에서 이들을 볼 기회는 차라리 유럽에서보다 못하다. 데이빗 번(David Byrne)이 진행하는 미국 공영 TV(PBS) 음악 프로그램 ‘Sessions at West 54th’에서의 마크 리보. 그런 사정을 감안해 보면 리보가 최근 내가 사는 이곳 위스콘신의 중소도시 매디슨을 찾아온 것은 약간의 과장을 덧붙이자면 감격할 만한 일이었다. 공연장으로 쓰인 조그만 재즈 카페에서 누군가 주고받던 귓속말에서처럼 테러로 쑥대밭이 된 뉴욕을 잠시 떠나 조용한 곳에서 평온을 되찾고 싶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그가 최근 발매한 새 앨범 [Saints]를 이곳의 그다지 적지 않은 – 도시 규모에 비해서 – ‘엘리트’ 청중들에게 홍보하기 위해서였는지, 까닭은 알 수 없지만 하여간 그는 기타 두 대를 들고 단신으로 이곳에 왔다. 바에서 들려오는 잔 부딪치는 소리와 계산대의 현금지급기 여닫는 소리가 다소 신경을 쓰이게 하는 비좁은 공간에서, 그는 일년 전의 꾸바 음악과는 한참 동떨어진 그의 뉴욕 동료 존 존의 음악 “Book Of Heads #13″으로 포문을 열었다. 기타의 현을 너트(nut)와 브리지(bridge) 사이에서 뜯는 연주에 익숙해 온 나로서는 그가 특유의 자세 – 고개를 거의 기타 몸통에 쳐박다시피 수그린 채 청중에게 머리꼭지만을 보여주는 – 로 너트 위와 브리지 아래를 넘나들며 연주하는 동작은 꽤나 신선한 것이었다. 이어지는 “Empty”와 또 다른 존 존의 작품인 “Book Of Heads #27″에서 리보는 미리 녹음된 농밀한 신서사이저 음을 배경으로 전기 기타의 찢어지는 듯한 음색을 갖가지 이펙터 놉을 통해서 흘려보내고 있었다. Book Of Heads” (from album [Saints]) “Holy Holy Holy” (from album [Saints]) 다른 한편, 청중들이 계속되는 음의 공격에 피곤한 기색이 보일 때쯤이면 그는 훨씬 접근하기 쉬운 곡들로 돌아가 때로는 찐한 블루스를(“St. James Infirmary Blues”), 때로는 로맨틱 스탠다드 재즈 넘버를(“I’m Getting Sentimental Over You”) 들려주면서 느슨해진 집중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그가 기타로 어떤 색다른 음들을, 아니 소리들을 ‘연주’할 수 있는지 보여준 “Holy Holy Holy”였는데, 검지 손가락에 침칠을 해서 어쿠스틱 기타의 니스칠된 목제 울림통 표면 위에 미끄러뜨리듯 문지르는 소리 – 궁금하면 직접 한번 실험해 보시길 바란다 – 는 음악적 상상력이 단지 주어진 형식적 틀에만 머물 이유가 없음을 새삼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실험 (혹은 재치)은 소위 전위음악이 얼마만큼이나 행위예술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지, 따라서 녹음된 음반을 들을 때 그 특질이 얼마만큼이나 삭감되는지 깨달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하여, 당신이 이해하건 이해하지 못하건,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이해한다고 생각하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건 간에, 때로 이런 ‘엘리트’들의 음악을 들어줄 만한 가치는 있게 마련이다. 점잖은 콘서트 홀에서 귀기울여 듣는 음악이 길거리 공사장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다를 바 없다면, 아니 사실은 그로부터 영감을 얻고 음의 구조나 짜임새(texture)를 빌려온 시뮬라크럼(simulacrum)에 지나지 않는다면 얼마나 배신당한 느낌이 들까? 적어도 내게 그런 ‘전위적 실험’이란 고상한 새로운 예술적 가치의 창조에 복무한다기보다는, ‘고귀함’과 ‘천함’을 나누는 구별의 선을 가로지르며 그 인위성을 보여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런 면에서 리보가 보여주는 장르횡단적인 다채로움과 그리 뽐내지 않는 전위주의는 매력적이다. 20011112 | 김필호 antioedipe@hanmail.net 관련 사이트 Marc Ribot 공식 사이트 http://www.marcribot.com 유럽 재즈 네트워크 Marc Ribot 페이지 http://www.ejn.it/mus/ribot.htm 미국 공영 라디오(NPR)의 Marc Ribot y Los Cubanos Postizos 2번째 음반 리뷰. 리얼오디오 링크 포함 http://www.nprjazz.org/reviews/mribot.cd.html Marc Ribot Sessions at West 54th. http://www.sessions54.com/artists/ribot03/index.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