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115105134-0322reviewddtlyubovD.D.T.- Lyubov(Love) – DDT Records, 1996

 

 

로컬 록 음악이 국제화할 때의 모습

국제 시각으로 1994년은 ‘그런지가 죽은 해’이지만 그 파장이 변방까지 파급되는데는 다소의 시차가 존재했다. 러시아의 경우 나름대로 ‘얼터너티브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는 D.D.T.와 알리사(Alisa)의 1994년작들은 ‘메인스트림 하드 록’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경우 상황과 조건의 차이로 하드 록 특유의 과시적이고 남근적인 성격은 덜했지만 무언가 시대에 뒤떨어져 가고 있다는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하긴 오직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던 시기에서 ‘음악적 혁신’을 기대한다는 것이 무리다. 그 점에서 D.D.T.의 1994년 작품 [Eto Vsyo(That’s All)]에서 마지막 트랙으로 수록된 동명의 타이틀곡은 일종의 만가이자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곡이기도 하다. 딜레이 걸린 기타, 발랄라이카와 바이올린이 낑낑거리는 긴 후주와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는 밴드의 프론트맨 유리 셰브추끄(Yuri Shevchuk)가 쉽게 포기할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1994년 독자 레이블 DDT 레코드(DDT Records)를 설립하여, D.D.T.가 ‘음반의 법적 권리를 스스로 보유하게 된 러시아 최초의 록 밴드’가 된 사실도 또하나의 새출발을 상징한다.

이 앨범은 ‘미국 시장 발매’를 계획하여 제작된 음반이고 레코딩도 미국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인지 ‘러시아산 음반’으로서는 드물게 말끔한 음질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음악 스타일도 마찬가지다. 이전의 D.D.T.의 음반들이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싸구려 스튜디오에서 레코딩한 것 같았다면, 이 음반은 U2의 최신 레코딩을 듣는 기분이다. ‘모던’하다는 뜻이다. 만약 U2를 연상했다면 타이틀곡 “Lyubov”는 사운드나 메시지 양면 모두에서 “Pride(In The Name Of Love)”가 연상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가사는 네바 강변에서 고도(古都) 뻬쩨르부르그의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디스토션과 딜레이를 적절하게 가미한 기타 톤, 선창과 후창(call and response) 형식의 반복 등은 이른바 ‘송가적 록(anthemic rock)’으로 적절하다.

“Fonogammshik”는 휘감아도는 기타 사운드가, “Onanist”는 짧게 툭툭 끊어치는 기타 사운드가 ‘주류 진입 이후의 얼터너티브 록’ 스타일을 연상케 한다. “….를 연상케 한다”는 말은 독창성의 부족을 암시하는 용도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국제감각을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성실한 이들의 태도를 지칭한다. 물론 “Zheleznodoroznik(철도 노동자)”, “Ya U Vas(나는 당신의 것)” 등에서 유리 셰브추끄 특유의 건강하고 낙관적인 멜로디는 누구도 모방하기 힘든 것이고, “Voroni(까마귀)”와 “Daleko Daleko(Far Far)”의 비장한 절창도 마찬가지다. 특히 뒤의 곡에서 기타 아르페지오는 ‘어쿠스틱 기타는 연주하는 사람에 따라서 참 다르게 들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섬세하면서도 힘이 있다. 물론 다른 멤버의 연주력이나 밴드 전체의 합주력도 일취월장한 탄탄한 모습을 보여 준다.

다른 한편 가사에서도 적지 않은 변화가 보인다. 밖으로 외치는 이전의 가사는 점차 사라지고 그 대신 ‘내면적이고 개인적’이라는 평에 어울리는 가사가 등장한다. 묘사하는 대상도 일상적이다. “Polnaya Luna(만월)”은 달밤의 광기어린 향연을 묘사하고 있고, “Zheleznodoroznik(철도노동자)”는 기차가 떠나버린 역에서 철도원의 집에 들어가 나눈 대화를 묘사하고 있다. “Ya U Vas(나는 당신의 것)”은 하드 록으로서는 뜻밖으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고, “Daleko Daleko(멀리 멀리)”는 혼자 떠돌아 다니는 여행객의 이야기다. 가장 흥미로운 가사는 ‘음악산업’에 대한 생각을 담은 “Fonogammshik(레코드 플레이어)”다. “레코드 플레이어는 나의 영웅, 그는 천사이자 악마”라는 애증은 ‘프로듀서에 대한 뮤지션에 불만’으로, 그리고 러시아 음악산업 전체에 대한 분노로 비화한다. “저명한 프로듀서, 그는 수도의 도둑놈 / 그는 불평을 해대지: 자넨 이제 좀 그만하지 그래, 최신 히트곡이 필요해.”

그렇지만 변방의 로컬 영웅에게는 미국이라고 해서 음악산업의 속성이 러시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름 아니라 미국에서 레코딩 세션을 마치고 러시아 공연 일정을 위해 잠시 뻬쩨르부르그로 먼저 돌아온 12월, 돌연 미국측 에이전트가 미국에서의 앨범 발매가 취소되었다고 통보해 온 것이다. 이번에는 아무리 셰브추끄라도 상심이 너무 컸는지 오랫동안 잠적했다고 한다. 변방의 록 베테랑의 ‘슬픈 성공 스토리’는 이렇게 계속된다. 20011115 | 신현준 homey@orgio.net

8/10

* 박일경 nikcuf@hanmail.net의 도움으로 씀.

수록곡
1. Polnaya Luna(Full Moon)
2. Zheleznodoroznik(Railroad Worker)
3. Ya U Vas(I Am Your Own)
4. Voroni(Crows)
5. Daleko Daleko(Far Far)
6. Lyubov(Love)
7. Fonogammshik(Record Player)
8. Onanist(Masturbater)
9. Skazka(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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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D.D.T. 공식 사이트(러시아어)
http://www.ddt.ru
떼아뜨르 D.D.T. 공식 사이트(러시아어)
http://ddt.freelines.ru
D.D.T.에 관한 바이오그래피, 디스코그래피, 음원(영어)
http://russia-in-us.com/Music/Rock/DD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