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y Z – The Blueprint – Roc A Fella, 2001 자기 성찰과 회귀로 이뤄낸 주류 랩의 청사진 흥미롭게도, 대부분 주류 랩 게임의 주체들은 음악적 진정성과 저항의 명제가 상업적인 성공에 대한 욕망과 결코 모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특히 제이 지(Jay-Z)는 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난 5년여간 지속적으로 타진해온 대표적인 랩 뮤지션이자 사업가이다. 그는 대도시 게토에서 성장한 아프로-아메리칸 청년들이 흔히 겪게 되는 거칠고 일탈적인 삶의 경험들을 구어적인 방식으로 엮어내는 MC로서의 재능과, 영리한 감각을 지닌 사업가로서의 수완을 동시에 지닌 몇 안 되는 랩 뮤지션 중의 한 명이다. 노토리어스 비아이지(Notorious B.I.G.)의 ‘썩(thug)’ 근성과 퍼프 대디(Puff Daddy)의 장삿속을 겸비한 그가 결국 뉴욕 랩 씬의 제왕으로 등극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사업가적 수완과 타고난 래퍼, 라이머로서의 재능이 인구에 회자되는 동안, 제이 지가 지난 5년여간 겪어온 일련의 음악적 시행착오, 그리고 교정을 위한 각고의 노력들은 지금 쉽게 잊혀지는 듯하다. 그저 5년 동안 5장의 정규앨범을 연속적으로 성공시킨 유일한 래퍼이자 의류회사(Rocawave)와 영화사(Roc-A-Fella Films)까지 거느린 젊은 힙합 모굴이라는 그의 이미지만이 미디어를 떠돌 뿐이다. 기억해 보라. 맨손으로 라카펠라(Roc-A-Fella) 레이블을 차리고 [Reasonable Doubt](1996)를 세상에 처음 내놓았을 때, 제이 지는 단지 자신의 허슬러로서의 개인사를 날 것으로 묘사한 가사와 빼어난 구어체적 라임만이 유일한 자산이었다. 이후 그의 음악적 노력들은 실로 게토 청년의 성공을 위한 눈물겨운 투쟁에 가깝다. 보다 비트에 강조를 둔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백인 록 음악을 샘플링해 보기도 하고([Vol.1: In My Lifetime](1997)), 심지어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접목하기도 한다([Vol. 2: Hard Knock Life](1998)). 그리고 상업적인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크로스오버가 지닌 음악적 한계를 깨달을 즈음, 그는 팀발랜드(Timbaland), 스위즈 비트(Swizz Beatz) 등 첨단 비트의 프로듀서들을 끌어 모아 새로운 비트 실험을 시도하고([Vol. 3: Life And Times Of S. Carter](1999)), 비니 시겔(Beanie Sigel), 멤피스 블릭(Memphis Bleek) 등 자신의 라카펠라 사단을 결집시켜 라임의 지평을 넓혀 보기도 한다([The Dynasty: Roc La Familia](2000)). 이러한 지속적인 변신과 적응을 위한 노력은 마침내 여섯 번째 정규 앨범인 [The Blueprint]에서 성숙한 결실을 맺는 듯하다. 말하자면, 제이 지는 자신의 가사가 지닌 메시지와 라임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사운드 해법을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사실 전작들에서 시도된 다양한 사운드 실험들은 일반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비트들의 접목을 바탕으로 상업적 성공을 위한 보증수표가 되기는 했지만, 비트를 위해 자신의 가장 큰 무기인 가사와 래퍼로서의 역량을 제한해야 하는 역효과를 가져왔었다. 그가 데뷔 앨범인 [Reasonable Doubt]에서 섹스와 폭력, ‘니가(nigga)’와 ‘비치(bitch)’에 대한 언급이나 기계적인 라임 없이도 구화에 가까운 부드럽고 자유로운 라임과 재빠른 딜리버리, 명료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내뱉는 고음의 래핑으로 많은 이들을 사로잡았음을 상기한다면, 결국 [The Blueprint]는 그만의 재능을 다시금 극대화시켰다는 점만으로도 더 없이 반가운 앨범이라 할 수 있다. 전작인 [The Dynasty: Roc La Familia]에서도 어느 정도 예견되긴 했지만, 사운드 면에서 이 앨범은 팀발랜드와의 공동작업 이전 시기 제이 지의 단순하면서도 밀도 있는 프로듀스 방법론으로 완전히 되돌아간 듯 하다. 대부분의 트랙들을 양분하며 프로듀싱을 담당하고 있는 케인 웨스트(Kayne West)와 저스트 블레이즈(Just Blaze)는 근사한 고전 소울의 강력한 보컬 샘플들을 빌려와 멋들어진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특히 잭슨 파이브(Jackson 5)의 “I Want You Back”이 사용된 첫 번째 싱글 “Izzo (H.O.V.A.)”, 바비 “블루” 블랜드(Bobby “Blue” Bland)의 “Ain’t No Love In The Heart Of The City”의 판박이에 가까운 “Heart Of The City (Ain’t No Love)”, 데이비드 러핀(David Ruffin)의 “Common Man”을 이용한 “Never Change”, 얼 그린(Al Green)의 “Free At Last”를 차용한 타이틀 트랙 등은, 근간에 보기 드문 샘플링의 묘미가 돋보이는 우수한 곡들이다. 제이 지는 퍼프 대디 식의 천박하고 노골적인 방식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샘플링을 통해 세련된 비트와 멜로디들을 주조해낼 수 있음을 과시한다. 대부분의 트랙에서 보컬 샘플들이 시종일관 강력한 훅으로 이용된다면, 전작들처럼 떼거지 게스트 보컬리스트와 래퍼들의 도움 또한 불필요하다. 게다가 제이 지 스스로가 탁월한 래퍼인 이상, 5년 전 [Reasonable Doubt]처럼 거의 혼자서 랩을 담당하면서 보컬 샘플들과 제대로 균형을 맞추기만 하면 된다. 물론 플로우를 늦추거나 멈추기보다 샘플링 비트에 맞서며 지속적으로 따라 다니는 그의 래핑이 간혹 비트를 죽일 때도 있지만, 보컬 샘플과 그의 랩의 자연스러운 대화는 왜 그가 명석한 라이머인지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가령, 샘플 보컬이 “Never changes”라고 노래하면, 그는 “I never change”라고 대꾸하고(“U Don’t Know”), “Ain’t no love in the heart of the city”에 대해서는 “Where’s the love?”라고 되받아치는 식이다(“Heart Of The City (Ain’t No Love)”). 한편 유일하게 게스트로 초빙된 에미넴(Eminem)이 함께 랩을 한 “Renegade”에서는, 에미넴의 속사포 같은 랩과 제이 지의 단단하고 분명한 라임의 대조가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변화를 위한 새로운 노력들이 사운드 속에 분명히 녹아들어 있다면, 가사를 통해 전달하려는 그의 메시지들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그간의 삶의 경험에 대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반영물의 역할에 충실하다. 물론 브루클린 거리에서 마약을 밀매매하던 허슬러로서의 성장기 경험이 여전히 가사의 많은 부분을 이루지만, 근년에 겪은 일련의 고통과 불이익에 대한 표현 역시 가사에서 드러난다. 가령 나스(Nas), 몹 딥(Mobb Deep) 등의 지속적인 ‘디쓰(diss)’에 대한 직접적인 맞공격을 가하기도 하고(“Takeover”), 랩 뮤지션들을 이해 못하는 한심한(?) 족속들에 대해 에미넴과 함께 신나게 까대기도 한다(“Renegade”). 하지만 대부분의 노래는 현실에 대한 진솔한 내러티브의 역할에 충실하다. 특히 전작 [The Dynasty: Roc La Familia]의 핵심적 주제였던,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The Blueprint]에서도 지속된다. 아버지가 부재한 가운데 어머니가 가장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전형적인 흑인 하층 계급 가정에서 자랐던 그가, 경제적인 안정을 찾은 후 이제 아버지의 역할과 가족애의 문제에 관심을 돌리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성장의 결과일지도 모른다(특히 타이틀 트랙). 덕분에 그의 디쓰조차 상대방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그가 다루는 모든 주제들은 자기 자신과 가족, 나아가 흑인 공동체의 삶에 대한 간접적인 송가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주류 랩 게임에서 5년여 동안 치고 받은 후, 제이 지는 마침내 자신의 분명한 정체성을 스스로 찾아낸 것 같다. 더 이상 서던 랩(Southern Rap)에 기웃거리고 마이크로-비트를 빌려쓰는 것은 최선의 선택이 아님을 이제는 깨달은 것이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샘플링 중심의 비트 프로덕션과 불필요한 게스트들의 제거 과정에서, 제이 지는 5년 전 [Reasonable Doubt]에서 보여준 래퍼, 라이머, 작사가로서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재발견한다. 이제 그는 보다 노골적으로 자신이 노토리어스 비아이지와 퍼프 대디의 장점만을 뽑아 신이 빚어낸 뉴욕 힙합의 마에스트로라고 뽐내고 다닐 것이다. 물론 전처럼 그의 거만한 자신감에 시비를 거는 것 또한 이제는 어려워졌다. 이 앨범 [The Blueprint]가 레코드 숍과 방송을 지배하는 현 시점에서 그는 분명 뉴욕 힙합, 아니 주류 랩 게임의 지존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20011027 | 양재영 cocto@hotmail.com 9/10 수록곡 1. The Ruler’s Back 2. Takeover 3. Izzo (H.O.V.A) 4. Girls, Girls, Girls 5. Jigga That Nigga 6. U Don’t Know 7. Hola’ Hovito 8. Heart Of The City (Ain’t No Love) 9. Never Change 10. Song Cry 11. All I Need 12. Renegade (featuring Eminem) 13. Blueprint (Momma Loves Me) 관련 글 제이 지, 칼 휘두른 혐의로 체포되다 – vol.1/no.9 [19991216] 관련 사이트 Jay-Z와 Roc-A-Fella 레이블 공식 사이트 http://www.jay-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