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가 ‘펑크 폭발’이 있은 지 25주년 되는 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펑크 폭발’은 존재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럴 가능성은 있는 것인가? 100클럽의 신화를 동경하고 섹스 피스톨스 전설의 재림을 꿈꾸는 적지 않은 펑크 키드들이 자연스럽게 “Punk not dead”를 외칠만큼 이 땅에 펑크는 자리잡혀 있으며 또한 앞으로 공고히 정착되어질 수 있을 것인가?

25년 역사동안 꾸준히 발전되어온 펑크의 각종 스타일과 문화적 아이콘들이 5년만에 거의 실시간으로 유입되어오고 힙합판에 뒤지지 않는, 살벌하기까지한 말싸움과 논란들로 언제나 시끌벅적한 이 동네에 감히 ‘역사’라 부를 수 있는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임에 분명하지만 특유의 배타성과 폐쇄성 등으로 인하여 대체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놀고 있는 펑크 키드들이 했던 일들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러면서 ‘왜 펑크인가, 혹은 펑크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스스로 펑크라 생각하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왔는가’라는 쪽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사람들마다 이견은 있겠지만, 한국 펑크의 원년은 1996년으로 볼 수 있다. 클럽 드럭에서 활동하던 크라잉 넛과 옐로우 키친의 스플릿 앨범이자 진정한 의미에서의 최초의 ‘인디 앨범’인 [Our Nation 1]이 발매되었던 시기이기도 하고 ‘소란’이라는 인디펜던트 록 페스티벌에서 펑크 밴드들이 다양하게 선을 보였던 해이기도 하다. 물론 ‘스트리트 펑크 쇼’가 열렸던 95년을 기점으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Our Nation 1] 이후 본격적으로 수많은 펑크 밴드들이 출연했고 이른바 클럽가의 주말 공연 레퍼토리에서 펑크 밴드들이 무대에 서기 시작한 시기도 이때부터이니 1996년을 펑크 원년으로 잡아도 크게 무리는 없으리라.

그로부터 지금까지 한국 펑크 씬의 역사는 크게 세 줄기로 나눌 수 있다.

클럽 드럭과 클럽 하드코어가 각기 다른 위치에서 주도하던 1998년까지의 시기가 그 첫 번째이다. 이 때는 ‘밴드 공동체’라기보다는 클럽을 중심으로 음반이 나오고 하우스 밴드 체제로 공연하던 시기로 노 브레인, 크라잉 넛, 삼청교육대 등의 밴드가 이때 출현, 성장하였다.

드럭이 ‘최초’의 역사를 써나가며 미디어의 관심 속에 한국 펑크의 초석을 쌓아나갔고 한국 인디 씬의 상징적 역할로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면, 클럽 하드코어는 1999년이래 ‘펑크 마이너리티 커뮤니티’의 탄생에 영향을 미쳤던 많은 밴드들을 배출하였다. 물론 두 클럽 공히 철저한 하우스 밴드 체제로 운영되어 밴드들이 어느정도는 안정적으로 성장하는데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998년 이른바 ‘인디 씬의 거품’이 절정에 치닫고, 하나둘씩 주류 음악시장에까지 이름을 알리는 팀들이 등장하고, ‘인디=펑크 또는 그런지’라는 등식이 더 이상 성립하지 않을만큼 다양한 색깔의 팀들이 자리를 굳혀나가던 무렵, 노 브레인의 독립으로 상징되는 ‘마이너리티 문화로서의 드럭 공동체의 붕괴’ – 물론 지금도 레이블로서의 드럭은 성황리에 굴러가고 있지만 – 와 1999년 운영난으로 인한 클럽 하드코어의 폐업 이후의 약 1년간은 한국 펑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시기로 기록될 것이다.

밴드 럭스를 중심으로 하여 스컹크 레이블이 탄생하였다.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거의 모든 펑크 밴드들이 4트랙 녹음기 하나만으로 조악하기 짝이 없지만 ‘날 것의 에너지’로 충만한 최초의 역사적인 DIY 컴필레이션 음반 [3000 Punk]가 스컹크 레이블에서 발매되었다. 클럽 트럭(Truck)에서 가졌던 음반 발매 기념 공연은 역시 음반에 참가한 대부분의 밴드가 무대에 섰으며 꽤 넓었던 그 클럽을 가득 매웠던 펑크족은 자생적인 펑크 씬의 형성을 꿈꿨던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기 충분했다.

그 후 1년간 스컹크 레이블의 행보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3000 Punk]의 약진 이후, 럭스의 데뷔 EP와 껌의 데뷔 앨범 등 단 2장의 음반을 자체 제작, 발매했을 뿐이지만 그들의 지하 합주실이었던 스컹크 합주실은 펑크 밴드들의 중심 근거지가 되었으며, 그들은 매주 수요일 마스터플랜, 한 달에 한번씩 이런 저런 클럽에서 자체적으로 공연을 기획, 진행하였다. 게다가 기존 인디 음반의 유통을 거의 독점하고 있던 레이블 인디의 유통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트럭을 타고 전국을 돌며 나름대로의 유통망을 개척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은 20세를 갓 넘은 청년의 혈기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특정 클럽 내지는 ‘어른’의 도움 없이도 펑크 키드들끼리 무엇인가를 한다는 즐거움이 있던 ‘좋았던 그 시절’이었다.

0%에 가까운 홍보. 음질따위는 상관하지 않는, 그저 펑크에 대한 순수한 열정만이 존재하고 행동으로 옮겨졌던 1999년 한해가 흘러갈 무렵, 멤버들의 군 문제로 인하여 스컹크 레이블이 휴면기에 들어가고 하드코어 레이블 GMC가 등장했다. 주로 PC통신 동호회 출신들로 구성되었던 GMC의 스태프들은 스스로 밴드를 하지는 않았지만 하드코어에 대한 해박한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한국에 하드코어를 전파하고 확산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었다.

해외 및 국내의 유명 하드코어 밴드들의 음원을 모아 [One Family]라는 컴필레이션 음반을 발매하는 것으로 레이블로서의 공식적 활동을 시작한 레이블 GMC는 바세린, 긱스 등의 양질의 하드코어 밴드 음반을 발매하고 한 달에 한번씩 ‘GMC Presents Show’를 진행해오고 있다. GMC의 활동 내용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행보는 창설이래 지금까지 일본의 하드코어 씬을 위주로 강력한 연대를 끌어내고 있으며 실제로 Endzweck, Oi Valcan, Decay, Envy 등 일본 언더그라운드의 실력파 하드코어 밴드들의 내한 공연을 추진, 성공시켜왔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스스로 제작한 음반들도 국내에서만 소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해외의 여러 하드코어 레이블을 통해서 배급하고 있으며 긱스, 바세린 등 소속 밴드들 또한 일본 투어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GMC가 초기에는 펑크/하드코어 밴드의 혼용 체제로 공연을 이끌다가 점차 자연스럽게 정통 하드코어 공동체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가고 있을 무렵, 기타리스트 차승우의 제대로 2000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한 노 브레인의 레이블 문화사기단(이하 문사단)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애초에 노 브레인, 푸펑충, 지랄탄 99, 삼청교육대 등 4팀으로 시작한 문사단은 점차 신인 밴드의 발굴 및 지원 쪽으로 서서히 방향을 전환했다. 또 ‘인디 거품’이후 만성적인 무기력증에 시달리던 클럽들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기획, 홍보를 나름대로 프로페셔널하게 수행했으며 스태프를 자원봉사자로 활용하면서 홍보 및 공연진행에 있어서 밴드들의 번거로움을 줄여주었다. 게다가 ‘연예면 보다는 사회면에 실리는 것이 우리의 할 일. 사고를 쳐보자!’로 상징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어설프나마 ‘펑크 상황주의’의 한국적 발현들이었다. 요컨대 펑크 키드와 자본, 그리고 상황주의 전략이 만나 일정한 조화를 이룬 첫 번째 케이스였던 것이다.

붉은 별 마크에 文자가 박혀있는 문사단의 심볼 마크는 한국 펑크 씬의 인물들에게 하나의 상징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문사단의 등장과 함께 기존의 펑크 커뮤니티는 ‘밴드 중심’에서 ‘팬 중심’으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갈 곳 없고 돈 없는 그들이 모여들었던 곳은 홍대 앞 놀이터였으며 1년이 지난 지금 그곳은 몇 번의 세대 교체를 거쳐 영국의 캠튼 타운과 같이 오갈 데 없는 한국의 ‘펑크족’들이 아무런 사전약속 없이 주말이면 모여들어 함께 밤을 지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제 홍대 앞에서 비비드 컬러로 염색한 머리를 세우고 허리에는 체인을, 팔뚝에는 스파이크 팔찌를 차고 다니는 펑크 소년 소녀들을 보는 것은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꽤 많은 음반들이 발매되었고 밴드와 팬들이 함께 만드는 펑크 커뮤니티는 이제 하나의 트렌드라기보다는 ‘부족 문화’의 가능성을 점점 키워가고 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이제 무대가 아니면 밴드와 팬을 구분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이것이 미디어의 여론 몰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과 정체성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자생적 펑크’로서의 모습에 꿀림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스컹크 레이블을 비롯한 ‘왕년의 용사들’은 멤버들의 제대와 함께 또 한번 그들만의 무엇인가를 꿈꾸고 있는 상태다. 단절이 아닌 지속의 예감이 점점 커져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한계점도 적지 않다. ’21세기의 한국’이라는 시공간적 특수성은 ‘1970년대 영국’의 펑크 씬과의 차이점을 크게 드러내지 못하는 것 같다. 게다가 5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펑크 커뮤니티 및 펑크 문화는 부산 일부를 제외한다면 확산의 기미를 보이고 있지 못하며 전체적인 ‘시장’은 오히려 축소일변도를 걷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늘 곁에 존재한다.

그러니까 어떤 음반이 발매되었을 때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는 최소한의 시장마저 아직 형성이 되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다. 전업뮤지션으로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 불가능에 가까운, 그렇다고 다른 일을 하면서 음악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도 그에 못지 않게 힘든 한국에서 이런 계속되는 악조건은 ‘패션과 놀이 문화’라는 이미지와 트렌드로서의 펑크는 지속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밴드로서의 성장’과 음악적 측면에서의 펑크의 앞날에 먹구름을 걷어내기 힘들 것이다(아예 징병제 문제는 거론조차 않기로 하자).

게다가 한국 펑크 초기부터 있어온 “펑크란 대체 무엇인가”에서부터 시작해서 “누구는 펑크 장사꾼이요, 누구는 진짜 펑크다” 류의 소모적인 논쟁들은 그 논쟁 이상의 어떤 결과물도 펑크 씬에 안겨주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년에도 몇 번씩이나 ‘물이 바뀌곤 하는’ 이 쪽의 인력 공급은 하나의 청년 하위문화 라이프 스타일, 내지는 세대적 계급적 문화라는 문화정착의 가능성을 그야말로 늘 가능성 그 자체로만 남겨놓고 있는 듯하다.

전반적 인디 씬에서 부인할 수 없는 주류를 차지하고 있지만 트렌드적 측면에서나 양적인 측면에서나 점점 밀려나가는 상황에서 앞으로 한국에서 펑크가 1980년대 헤비 메탈 씬의 전철을 밟아 붕괴될지, 아니면 꾸준히 지속될지는 점치기 힘들다. 언제나 그랬듯 전체적인 상황은 불안하기만 하다.

하지만 오로지 ‘(늘 변덕스러운)매니아’지향적이었던 헤비 메탈과는 달리 청년문화이자 라이프 스타일을 가능성으로나마 어렵사리 가져가고 있는 펑크 씬에 크고 작은 부침은 계속 될지언정 아예 소멸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은 1980년대의 암흑기를 거쳤던 펑크가 1990년대에 이르러 다시 부활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적어도 현재의 펑크 씬에는 나름대로의 ‘애티튜드’가 존재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런 흐름들이 한 방에 날아가는 사태는 없을 거라 믿고 싶다. 아마 많은 펑크 소년 소녀들이 더 이상 펑크를 ‘음악의 한 장르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더욱 그럴 것이다.

펑크는 생활이다. 하나의 생활 패턴은 마이너리티의 마이너리티로 떨어질지언정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불안함 속에서도 ‘한국에서의 펑크’에 디스토피아적 판결을 내리고 싶지 않은 가장 큰 이유다. 20011029 | 김작가 http://www.kimzakk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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