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4: 소비에트판 ‘도덕적 공황(moral panic)’?

러시아 및 소비에트 사회에서 이 시리즈의 전체 제목인 ‘록의 시대’는 언제였는가. 대략 ‘1980년대’라고 말하면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고, 지난 번에 언급한 [뜨빌리시 80(Tbilisi 80] 페스티벌이 중요한 계기를 이루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단, ‘록의 시대’라는 표현은 임의적인 것이고, ‘예술-반항-비즈니스의 3위일체’라는 서양에서의 공식이 구현된 것도 아니다. 그러니 러시아 및 소비에트 사회에서 ‘록의 시대’란 록 음악이 가장 영광스러웠던 시기라는 정도로 느슨하게 이해해 두자. 이때 ‘영광스럽다’는 말은 두 개의 측면으로 구분해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록 음악이 활발하게 창작되고 수용되면서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록 음악이 록 커뮤니티를 넘어 사회적으로 넓은 파장을 미쳤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록 음악이 실제로 어떻게 생산되고 소비되었는가 뿐만 아니라 록 음악이 공식 사회에서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뒤의 문제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주로 참고할 텍스트는 워싱턴 주의 잭슨 국제연구 학교(Jackson School of International Studies)의 교수이자 [Rocking The State](Westview Press, 1994)의 저자인 사브리나 라메트(Sabrina Petra Ramet)의 연구다. 그녀는 1980년대 이후 소비에트의 록 음악을 바라보는 세 개의 관점을 소개하고 있는데, ‘외부자’의 시선이므로 내부의 문제를 소상하게 파악하지는 못하겠지만 내부자보다는 상대적으로 중립적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녀가 말하는 세 개의 관점이란 각각 느슨한(lax) 관점, 리버럴(liberal)한 관점, 보수적(conservative) 관점이다. 먼저 ‘느슨한 관점’의 경우 록 음악은 정당한 예술형식이며 클럽이나 디스코텍은 청년들의 자연발생적이고 창조적인 행동의 장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자연발생성’에 대한 낭만적 가정을 가지고 있는 주장이었으므로 소비에트 사회의 경직된 분위기에서는 소수 의견에 머물렀다. 결과적으로 적극적 논쟁은 리버럴한 관점과 보수적 관점 사이에서 전개되었다.

리버럴한 관점은 이 시리즈의 앞선 글에서 여러 번 인용했던 아르뗌 뜨로이쯔끼(Artem Troitsky)를 비롯한 일군의 평론가들에 의해 개진되었다. 이들은 서방과 러시아의 록 음악에 대한 칼럼을 기고하면서, 록 음악의 사회적 측면보다는 미학적 측면을 강조했다. 라메트는 이들 리버럴한 논자들의 관점이 가장 ‘균형잡힌’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라메트 본인의 정치적 입장도 어느 정도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들은 록 음악의 문화적 측면에 대해서는 비교적 신중했지만, ‘세대간 단절’, ‘공동의 가치의 붕괴’ 등의 표현을 사용하면서 록 음악이 사회적 현상이며 따라서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특정한 입장(position) 혹은 감정의 방식(way of feeling)이라는 점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소비에트 당국에서 지배적 관점은 보수적 관점이었다. 군 당국, KGB 그리고 ‘러시아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들은 록 음악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이들의 시각에서 록 음악은 ‘서방의 찬미, 도피주의, 회의주의, 수동성을 유포하는 통로’일 뿐이었고, 당 기관지 [쁘라브다]는 록 음악을 소비에트 사회를 붕괴시키려는 ‘책략(plot)’으로 간주하는 논조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즉, 이들이 록 음악을 반대하는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었고, 이들의 정치적 입장이란 ‘사회주의’라기보다는 ‘민족주의’가 더욱 중요했다. 작곡가 동맹처럼 ‘경제적’ 이유에서 록 음악을 반대하거나 문인 동맹처럼 ‘미학적’ 이유에서 록 음악을 반대하는 견해도 있었지만, 정치적 효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수적 관점이 절정에 달한 것은 1982년 11월 KGB 의장 출신인 유리 안드로포프가 브레즈네프에 이어 집권하면서부터다. 안드로포프는 다른 분야에서는 개혁과 현대화를 부르짖었지만 록 음악에 대해서는 매우 보수적이었다. 1983년 경 안드로포프는 “수상한 레퍼토리를 연주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미학적으로 해로운 그룹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경고를 했다. 한 사회의 최고 지도자가 이 정도의 발언을 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1984년 9월 [Komsomol’skaia Pravda]는 NATO가 “Operation Barbarossa Rock’n’roll”이라는 이름 아래 소비에트 사회를 붕괴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는 소비에트 사회가 록 음악을 ‘탄압’했던 가장 중요한 문서로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단지 ‘선전·선동’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1984년 소비에트 정부의 문화성은 68개의 서양 록 밴드의 레퍼토리를 연주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리스트를 만들어 공개했다. 리스트 중에는 키스(Kiss), 블랙 사바쓰(Black Sabbath) 니나 하겐(Nina Hagen), AC/DC, 밴 헤일런(Van Halen), 앨리스 쿠퍼(Alice Cooper),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토킹 헤즈(The Talking Heads), 섹스 피스톨스(The Sex Pistols), 패티 스미쓰(Patti Smith),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디페시 모드(Depeche Mode) 등 ‘각 장르’의 아티스트들이 고루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더불어 서방의 음악인들의 공연도 잇달아 취소되었다. 이전까지 클리프 리처드(Cliff Richard), 엘튼 존(Elton John), 보니 엠(Boney M), B.B. 킹(B.B. King) 등이 소련 공연을 가졌지만 1980년대에는 이런 ‘안전한’ 음악인들의 공연도 보기 힘들어졌다.

다른 한편 러시아의 록 밴드들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낯선 이상과 조류를 유포하는 비공식적 그룹” 38개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본 아끄바리움(Akvarium)과 끼노(Kino)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1980년부터 프로페셔널 그룹이 된 마쉬나 브레메니는 리스트에서는 빠져 있었지만 험악한 분위기 탓에 멜로지야에서 앨범을 발표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전전해야 했다. 테리 브라이트(Terry Bright)가 말하듯 ‘소비에트판 모럴 패닉’이었다.

그런데 의문이 있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언더그라운드 록 밴드의 ‘불법’ 음반들은 계속 발매되었고, 록 음악을 연주하는 클럽이 폐쇄되거나 공연이 완전히 금지된 적은 없었다. 방금 살펴본 리버럴한 관점과 보수적 관점의 토론만 해도 ‘지하언론’이 아니라 ‘공식언론’에서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록 음악을 옹호하는 주장이 오래 전부터 ‘공론’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폐쇄 사회에서의 가혹한 탄압’이 단행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소비에트 사회가 워낙 부패하여 상부의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지하경제는 융성했다’고 보는 것이 편리한 시각이었다. 이것으로 충분할까.

안드레이의 스튜디오와 ‘언더그라운드 스타 시스템’

여기서는 뻬쩨르부르그에 초점을 맞춰 보자. 이는 현실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뻬쩨르부르그에 대한 연구가 많다는 점 때문이지만, 이곳이 록 음악이 가장 풍성하게 개화한 곳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가 언급한 아끄바리움과 끼노 뿐만 아니라 주빠르끄(Zoopark), 알리사(Alisa), 스트레인지 게임스(Strange Games), 아욱찌온(Auktyon), 뗄레비조르(Televizor) 등 한 시대를 풍미한 밴드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활동했다. D.D.T.의 경우 리더인 유리 셰브추끄(Yuri Shevchuk)는 우랄 산맥 근처의 우파(Ufa)에서 음악 활동을 시작했지만 지방 당국의 탄압을 피해 뻬쩨르부르그로 피신한 경우고, 알리사(Alisa)의 프론트맨 꼰스딴찐 낀체프(Konstantin Kintsev)의 경우도 ‘자신의 음악적 실험에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모스끄바로부터 이주해 온 경우다. 말하자면 뻬쩨르부르그는 가히 소비에트 록의 ‘행동의 중심’이자 ‘신성한 사원’이었다.

Alisa – Vse Eto Rok-n-roll(All That Rock’n’roll) (live) : 가사에서 시드 비셔스(Sid Vicious)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20011016102201-0320series02사진설명: 토머스 쿠쉬먼(Thomas Cushman)의 연구서 [Notes from Underground: Rock Music Counterculture in Russia](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5)의 표지
뻬쩨르부르그 록 커뮤니티에서 음반을 제작하고 음악인을 발굴하는 것은 어떤 시스템 하에서 이루어졌을까. 웰슬리 대학(Wellesley College)의 교수인 토머스 쿠쉬먼(Thomas Cushman)에 의하면 1980년대 초반 뻬쩨르부르그에서 대부분의 록 음반은 ‘안드레이’주)라고 불리는 인물의 지휘하에 만들어졌다. 안드레이는 뻬제르부르그에 있는 한 건물의 지하실에 소규모 레코딩 스튜디오를 만들었고, 이곳이 바로 뻬쩨르부르그 록 음악인들의 ‘마그니즈다뜨’가 제작되는 곳이었다. 지하실은 전기 기타를 둘러맨 뮤지션들이 찾아와서 오디션을 보고, 오디션에 합격하면 레코딩을 하고, 레코딩이 완료되면 테이프에서 테이프로 복제되어 뻬쩨르부르그의 록 팬들(러시아어로 뚜소브까(tusovka))에게 전달되는 일련의 과정의 출발점이었다.

주) 쿠쉬먼의 연구 [Notes From Underground: Rock Music Counterculture In Russia](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5)는 러시아인의 인명을 ‘퍼스트 네임’만 표기하고 있다. 그 결과 안드레이의 성(姓)은 정확히 알아낼 수 없었다. 전후의 상황을 살펴보면 아끄바리움과 끼노의 앨범의 음악감독인 안드레이 뜨로삘로(Andrei Tropillo)로 짐작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 책에는 안드레이라는 이름의 또 한 명의 인디펜던트 프로듀서도 등장하기 때문에 혼동이 더하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은 안드레이 뜨로삘로와 안드레이 블라디미로비치(Andrei Vladimirovich) 둘 중 하나일 것이라는 점이다. 끼노의 [46]을 음악인 본인들의 허락없이 유포하고, [Noch’]를 멜로지야에서 정식 발매한 것도 안드레이의 소행이었다. Kino [46] 앨범 리뷰Kino [Noch'(The Night)] 앨범 리뷰를 참고하라.

그 점에서 안드레이는 가히 러시아 록 음악 역사상 최초의 ‘레코드 프로듀서’라고 할 만한 인물이고, 그래서 ‘러시아 록 음악의 구텐베르크’라고 불리고 있다(그의 스튜디오에 제작된 음반에 안드레이의 이름은 ‘음악감독(Zvukorezhisser)’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영어의 ‘producer’의 러시아식 표현으로 보인다). 조악한 장비와 열악한 환경이긴 했어도 안드레이의 스튜디오를 거친 앨범들은 밴드의 ‘정규 디스코그래피’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1970년대의 가내수공업 테이프(homemade tape)와는 달랐다(한 예로 아끄바리움의 1970년대 레코딩은 ‘선사시대의 앨범(pre-historic album)으로 불린다). 이렇게 하여 안드레이의 스튜디오는 라이브 연주에만 의존했던 록 음악인에게 레코딩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미디어’의 수단을 창출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안드레이의 스튜디오는 순기능과 역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레코딩할 자격이 있는 음악을 선별하기 위해 오디션을 거치는 것은 일반적 과정이다. 그런데 이런 결정권은 안드레이 개인에게 독점되어 있었고, 실제로 안드레이는 ‘아티스트들에 대한 독재적 통제’를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스튜디오에서 레코딩을 했다는 점은 선택받은 특권으로 간주되었고, 그래서 뻬쩨르부르그의 록 음악 씬은 일종의 ‘언더그라운드 스타 시스템’을 형성했다. 대안적 레코딩 기회가 부재한 상태에서 아티스트들로서 안드레이는 ‘덜 나쁜 악(lesser evil)’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의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진 테이프를 통해 ‘언더그라운드의 영웅’이 된 아티스트들의 경우도 뒤에는 그와 불편한 관계를 맺게 된다. 문화적 생산물의 내용물에 대한 통제 뿐만 아니라 ‘흥행’도 좌우한다는 점에서 안드레이는 1980년대 뻬쩨르부르그 출신 록 밴드들의 ‘프로듀서’이자 ‘매니저’였다고 말할 수 있다. 매니저에 의한 ‘비즈니스’라고 할 만한 것이 부재한 상태에서 안드레이의 결정은 록 커뮤니티에서 특정 밴드의 ‘사회적 지위’에 결정적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이다.

잠시 서양의 록 음악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신성한’ 음악 뒤에는 그리 아름답지 않은 매니지먼트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엘비스 프레슬리와 ‘멤피스 로큰롤(혹은 로커빌리)’의 배후에는 톰 파커(Tom Parker) 대령, 비틀스와 ‘머지 비트(Mersey Beat)’의 배후에는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ein), 섹스 피스톨스와 런던 펑크(London Punk)의 배후에는 맬컴 매클래런(Malcom McClaren)이라는 수완 좋은 매니저가 있었다. 매니지먼트의 세계가 반드시 추잡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또한 음악인이 반드시 ‘순수한’ 존재라고 말할 수도 없겠지만, 음악인과 매니저의 관계가 ‘불평등한 공생(symbiotic inequality)’이라는 점은 일반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이 점은 소비에트 록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단, 서방과 양상이 달랐을 뿐이다.

안드레이가 1980년대 후반 ‘글라스노스찌 시기’에 멜로지야의 대표가 되어 본격적 ‘비즈니스맨’이 된 것을 보면 그가 공식적 음반산업계와도 어느 정도 커넥션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멜로지야가 록 앨범들을 공식적으로 발매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이때 발매한 앨범들 중에는 1970-80년대 러시아의 언더그라운드 록 밴드의 레코딩이 많았고, 안드레이는 저작권자들에게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고 마음대로 레코드를 ‘재발매’할 수 있었다. 매스터 테이프는 그의 수중에 있었고 ‘레코딩 계약서’같은 것은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는 보편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수상쩍은 점이 있다. 1983-4년 록 음악에 대한 서릿발같은 탄압 하에서 록 음반의 불법복제의 온상인 안드레이의 스튜디오가 어떻게 건재했을까라는 점이다. 안드레이는 1990년대 이후에는 ‘암시장의 실력자(black marketeer)’로 군림하고 있다는 설이 들리며(역시 머리 좋은 사람은 체제가 바뀌어도 잘 적응하는 법이다), 그 때문인지 외부인과의 인터뷰를 거절하고 있다고 하므로 상세한 사정을 알 수 없다. 그래서 또 하나의 사례를 알아볼 수밖에 없다.

‘레닌그라드 록 클럽’과 그리고 내부검열?

20011016102201-0320series03-akvarium사진설명 : 레닌그라드 록 클럽이 소재한 루벤스따인가를 걸어가는 아끄바리움의 멤버들. 가운데가 보리스 그레벤쉬꼬프
‘불평등한 공생’의 또 하나의 사례는 ‘레닌그라드 록 클럽’(지금은 뻬쩨르부르그 록 클럽)이다. 이 경우 불평등한 공생은 개별 아티스트와 레코딩 프로듀서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뮤지션 전체와 시 당국 사이의 관계의 문제다. 뻬쩨르부르그의 도심인 루벤스따인가(街)에 위치한 이 클럽은 1980년부터 준비되어 1981년 3월에 공식적으로 개장했다. 지난번 시리즈에서 “1980년 개별 아마추어 연주 센터(Centre for Individual Amateur Performance), 국가 공연 조직(State Concert Organization: Goskontsert) 등의 기관을 설립하여 록 클럽에게 가사 검열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록 그룹의 합법화와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고 언급한 일이 있는데, 그 가시적 성과가 바로 레닌그라드 록 클럽인 것이다. 1년이 지나자 클럽은 500명이 멤버쉽을 보유하게 되었고, 연주하는 밴드가 60개 그룹에 달했고 1980년대 내내 꾸준히 성장했다. 1983년부터는 연례 페스티벌을 개최하여 우수한 밴드에게 시상을 하는 제도로 정착되었다. 끼노가 처음으로 그랑프리를 수상한 것도 1984년 제 2회 레닌그라드 록 페스티벌에서였다.

록 클럽은 형식적으로는 ‘시립 공공기관’기관이었으므로 밴드들이 연주하는 레퍼토리들에 대한 당국의 검열은 계속 존재했다. 그렇지만 안드로포프 집권기처럼 록을 반대하는 캠페인이 공공연하게 전개되는 시기에도 클럽이 완전히 폐쇄되거나 연주가 금지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앞의 시리즈에서 보았듯 록 클럽의 개장은 브레즈네프 말기 정책 변화의 산물이었고, 그 목적은 아마추어 그룹의 ‘양성화’였다. ‘언더그라운드의 양성화’는 언제나 양면적 효과를 갖는다. 다른 곳에서 마땅히 연주할 공간이 없는 상황에서 록 클럽은 아마추어 음악인들에게는 소중한 공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곳에 모이는 록 팬들(뚜소브까)은 록 클럽이 ‘국가에 대한 문화전투의 승전고’로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그렇지만 이는 이전까지 존재했던 아마추어 음악인들의 ‘인디펜던트’한 태도의 수정을 요구했다. 클럽은 공식 기관이었으므로 소련 사회의 여타 기관처럼 조직되었고, 정점은 후드소베뜨(khudsovet)라고 불리는 ‘예술위원회(artistic council)’였다. 음악인, 평론가, 저널리스트들이 참여한 예술위원회는 클럽의 전반적 운영과 더불어 당국과의 대화도 전담했다. 이들의 입장은 대체로 ‘당국도 어느 정도 양보를 했으므로 우리도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록 커뮤니티의 정서는 소비에트 사회의 시스템이 변화될 전망은 없다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이들은 당국과의 ‘불안한 평화(precarious peace)’가 계속 유지되기를 바랬고, 따라서 명시적으로 과격한 메시지를 전달하여 당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 당국의 재정 지원 없이 클럽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입장료만으로는 클럽을 운영하기 힘들었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말하자면 후드소베뜨는 아마추어 음악인들의 보호막임과 동시에 또 하나의 ‘당국’이었다.

쿠쉬먼은 이를 ‘외적 검열로부터 내적 검열로의 이행’이라고 설명하면서, 록 클럽은 “높은 지위를 확보한 록 음악인이 자기들이 보기에 일탈적 음악인을 자제시키는 장소”라고 말하고 있다. 뒤에 글라스노스찌를 상징하는 곡 “Vyiti Iz Pod Kontrolya”로 국제적 주목까지 받았던 뗄레비조르(Televizor)는 “Tvoi Papa – Fashist(우리 아버지들은 모두 파시스트)”라는 노래를 불렀다가 클럽 연주를 금지당하기도 했다. KGB 등 당국에서 금지한 것은 물론이지만 클럽 위원회에서도 금지했다는 것이다. 미샤(Misha)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뗄레비조르의 미하일 보르지낀(Mikhal Borziykin)은 쿠쉬먼과의 인터뷰에서 보리스 그레벤쉬꼬프나 마이끄 나우멘꼬 등을 “nachal’nik(영어로 ‘boss’라는 뜻)”이라고 부르면서 당시의 조처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Televizor – Revolution(Beatles cover) : 원래 가사에서 “Chairman Mao”가 “Chairman Stalin”으로 바뀌어 있다)

20011016102201-0320series04-yuri사진설명: D.D.T.의 유리 세브추끄. ‘러시아의 브루스 스프링스틴’
D.D.T.처럼 지금까지도 알리사(Alisa)와 더불어 ‘뻬쩨르부르그에서 가장 유명한 베테랑 밴드’로 불리는 경우도 사정이 비슷했다. D.D.T.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판하는 정치적 노래를 연주한 뒤 클럽 관계자들로부터 “당신들의 정치적 음악은 원초적이고, 우리는 그런 음악은 불필요하다”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이때 ‘원초적’이라는 표현은 ‘시적(poetic)’이고 ‘신성한(sacred)’ 러시아 록의 규범과는 모순된다는 표현이었다. D.D.T.는 당시의 경험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던지 뒤에 “록 클럽의 백만장자(Millitsioner v Rok Klube”)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정확한 진상은 알 수 없지만 유리 셰브추끄(D.D.T.의 리더)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뻬쩨르부르그 출신이 아니라는 점도 이런 반발을 불러일으킨 한 요인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D.D.T. – Rozhdenniy v SSSR(Born in the U.S.S.R.)

소비에트 록의 ‘진실(istina)’

여기서 ‘누가 옳은가’라는 것을 토론하는 것은 더 이상의 정보와 자료가 없는 사람으로서는 요령부득이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소비에트의 록 씬은 아마추어 음악인들이 비타협적으로 똘똘 뭉쳤던 1970년대와는 상이한 상황으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이는 언더그라운드의 ‘뚜소브까’에도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록 음악과 음악인 내부에도 미학적 위계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제까지 독자들은 소비에트 록이 ‘극심한 탄압에 맞서 정치적으로 저항했다’라고 생각했을 지 모른다. 그렇지만 사실은 이와 다르다. 사브리나 라메트는 이에 대해 “소비에트 밴드들이 만든 록 음악의 대부분은 정치적으로 순진했다(politically innocent). 록을 정치적 이슈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소비에트 당국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녀의 견해 역시 ‘정치’를 협소하게 정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소비에트 록 커뮤니티에서 존중받는 음악인일수록 ‘정치 참여적’이라기보다는 ‘정치로부터 초월한’ 양상을 보이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록 음악은 ‘진부하고 미학적으로 가치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진실의 전달자’라는 소비에트 록 음악인의 자기정체성은 공식 사회에서 통용되는 일상적 진리(pravda)가 아니라 한 차원 높은 진실(istina)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진리’라는 뜻의 ‘프라브다’는 소련 공산당 기관지의 이름이자 소비에트의 ‘공식적’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마르고 닳도록 나오는 단어다. 반면 ‘이스찌나’는 성스러운(sacred), 비의적인(esoteric), 천상의(ethereal) 진실을 의미하고 영어로는 ‘higher truth’, ‘truer truth’로 쓸 수밖에 없는 단어다. 몇 달 전 냅스터에서 만난 한 러시아계 미국인이 보리스 그레벤쉬꼬프나 빅또르 쪼이의 가사가 “아무도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 점에서 마이클 스타이프(Michael Stipe)와 비슷하다”고 말한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그렇지만 성스러운(sacred) 것은 반드시 정치를 초월하는 것일까. 여기서 ‘록 음악은 저항적인가’, ‘록 음악은 신성한가’라는 일반적 질문들을 던지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필요한 것은 1980년대 소비에트 사회의 일반적 조건에서 록 음악의 생존방식에 대한 고찰이다. 한 마디로 1980년대의 ‘신냉전’ 하에서는 소비에트에서 반체제로 활동했던 사람들도 지금의 체제가 쉽게 변할 것이라는 점에는 회의적이었다. 뻬쩨르부르그의 록 뚜소브까도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부터 록 커뮤니티를 일구어 왔던 뚜소브까 1세대, 보리스 그레벤쉬꼬프의 표현으로 ‘문지기 세대(Pokolenie Dvonikov)’는 험악한 정치정세에서 그 동안 이룩해 놓은 문화투쟁의 성과가 무화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 셈이다. 반면 1980년대 이후 등장한 보다 젊은 세대 일부는 러시안 록의 ‘암호 같은(cryptic)’ 성격에 점차 싫증을 느끼고 보다 직접적으로 욕구를 분출시키고 싶어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런 욕구는 체제의 변화의 조짐이 없던 1980년대 중반까지는 록 뚜소브까 자체에 의해 ‘자제’되어야 했다. 그렇지만 1985년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으로 집권하면서 드디어 변화의 용틀임을 시작했다. 철옹성 같기만 했던 소비에트 체제가 ‘위로부터’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록 뚜소브까도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5-6년이라는 짧은 시기이긴 했지만 이 시기야말로 ‘소비에트 록’ 음악이 국내적 존중과 국제적 관심을 맞은 시기였다. 20011015 | 신현준 homey@orgi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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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도 ‘록의 시대’가 있었네(2): 구 소비에트 사회에서 예술음악, 민속음악, 대중음악 – vol.3/no.17 [20010901]
그 곳에도 록의 시대’가 있었네(3): 소비에트 체제의 기생충들의 역사 – vol.3/no.18 [20010916]
D.D.T. [Ya Polichil Etu Rol(Now That’s My Role)] 리뷰 – vol.3/no.20 [2001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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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러시안 록 서치 사이트
http://www.slavweb.com/eng/Russia/music/rock-e.html
러시아 바르드 및 록 음악에 관한 정보
http://russia-in-us.com/Music
D.D.T. 공식 사이트
http://www.ddt.ru
Alisa 공식 사이트
http://www.inse.kiae.ru/~stivv/alisa
Televizor 공식 사이트
http://www.televizor.spb.r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