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016094203-0320DDTD.D.T. – Ya Polichil Etu Rol(Now That’s My Role) – Melodiya, 1988

 

 

러시아 록 뮤지션의 ‘진실된 역할’에 관한 다큐멘트

밀레니엄을 앞두고 영국의 BBC에서 제작·방영한 25부작 다큐멘터리 [People’s Century] 중 “People Power” 편은 소련과 동구의 개혁과 붕괴를 다루었다. 여기서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찌가 착수되면서 야외에서 대형 록 콘서트가 개최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온 노래가 D.D.T.(발음은 ‘데 데 떼’)의 “Revolyutsia”다. 살충제라는 뜻의 이 밴드는 러시안 록(및 소비에트 록)이 가장 뜨거웠던 시절을 풍미하면서 지금도 ‘슬픈 성공의 역사’를 계속하고 있다. 밴드의 리더인 유리 셰브추끄(Yuri Shevchuk)는 통상 ‘러시아의 브루스 스프링스틴’이라고 불린다. 이는 그의 이미지가 ‘서민적’이며 목소리도 흔히 들을 수 있는 톤이기 때문이다. 물론 러시아의 서민들 모두가 셰브추끄 같이 화통을 구워삶아 먹은 듯한 포효자(roarer)는 아니다. 그르렁거리면서 포효하지만 거만하거나 과시적이지 않은 보컬 스타일이 그를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비교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소로 보인다.

D.D.T.는 1980년부터 비공식 앨범을 발매했지만 첫 공식 앨범은 1988년에 나온 이 음반이다. ‘신보’라고는 하지만 ‘컬렉션’의 성격이 강하다. 즉, 새롭게 레코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만든 곡이 적잖게 섞여 있고, 악곡 형식과 악기 편성도 트랙별로 상이해서 다소 산만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까지 밴드의 역사를 총괄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밴드의 이름을 소비에트 전역에 알리고 국제적 주목을 받은 작품이라는 가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브루스 스프링스틴 같은’ 곡은 앞서 언급한 “Revolyutsia”, “Mal’chiki-Major” 그리고 “Khippany” 같은 곡에서 들을 수 있다. 기타 리프가 이끌어 가기는 해도 멜로디의 윤곽이나 코드 진행이 선명하고 때로 키보드와 피아노도 들어가는 ‘포크 록’ 스타일이라는 뜻이다. 똑 떨어지는 기타 리프가 선명한 “Konveyer”나 “Poet”는 하드 록에 가깝지만, 하드 록이 쾌락적이면서도 ‘민중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흥겹게 몸을 흔들면서도 그런 자신을 천박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음악이라는 뜻이다.

반면 “쏘지 마”라는 반전 메시지를 담은 “Ne Streliai!(Don’t Shoot!)”나 “물러서지 말자”는 다짐을 노래하는 “Ni Shagu Nazad(No Retreat)”는 어쿠스틱 기타와 전기 기타가 함께 운용된 ‘발라드(?)’다. 앞의 곡은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판한 것으로 유명한데 분위기는 뜻밖에 따뜻하다. 따뜻한 위로를 담은 이런 스타일의 곡은 D.D.T.의 이후의 음반에서도 단골 메뉴처럼 들어가는 스타일이고, 고음의 열창은 ‘러시아 풍 허장성세(bravado)’와도 어울려서 대중적 인기도 끌만한 곡이다. 공연장에서 몸을 흔드는 것을 멈추고 두 팔을 양쪽으로 흔들면서 따라 부르면 제격인 곡들이다.

앨범에서 가장 이색적인 곡은 타이틀곡인 “Ya Poluchil Etu Rol”이다. 초기의 아끄바리움이나 알리사가 그랬듯 이 곡은 어쿠스틱 기타 두 대와 플루트만으로 반주되는 소품이다. 소품이라고는 하지만 지칠 줄 모르고 외치는 셰브추끄의 노래는 전혀 심심하지 않다. ‘언젠가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라는 생각은 그가 블라디미르 비소츠끼(Vladimir Vysotsky)의 열렬한 숭배자라는 사실을 접한다면 ‘아하’라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러시아어가 록 음악의 가사로는 부적절하지 않은가’라는 평소의 생각도 ‘비장미를 표현하는 데는 제격’이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 다른 한편 “Khippany”에 나오는 존 레논(John Lennon)에 대한 언급은 ‘진실을 전달하는 싱어송라이터’라는 그의 ‘역할’에 대해 암시하는 대목이다.

브루스 스프링스틴과의 비교에 너무 골몰하는지 모르지만, 유리 셰브추끄와 D.D.T.의 음악성도 특별히 혁신적이거나 실험적이지는 않다. 밴드의 연주는 ‘반주’ 이상은 아니고 ‘사운드’에 특별한 것도 없다. 순수하게 음악적 관점에서 본다면, 뮤지션들의 위계에서 아티스트라기보다는 저니멘(journeymen)에 해당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음악은 ‘또하나의 하드 록 밴드’ 이상으로 다가온다(갑자기 펄 잼이 떠오른다). 이런 ‘느낌’을 가사 말고 음악을 통해서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건 이상하게 힘든 일이다. 20011015 | 신현준 homey@orgio.net

9/10

수록곡
1. Poet(A Poet)
2. Mal’chiki-Major(Major-Boys)
3. Konveyer(Conveyor)
4. Ne Streliai!(Don’t Shoot!)
5. Tserkov(Cerkov)
6. Terrorist(Terrorist)
7. Revolyutsia(Revolution)
8. Ya Poluchil Etu Rol(I’ve Got This Role)
9. Khippany(Hippie-Guys)
10. Ni Shagu Nazad(No Retreat)

<OP관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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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도 ‘록의 시대’가 있었네(2): 구 소비에트 사회에서 예술음악, 민속음악, 대중음악 – vol.3/no.17 [2001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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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evizor [Otchuzhdenie(Alienation)] – vol.3/no.20 [20011016]

관련 사이트
D.D.T. 공식 사이트(러시아어)
http://www.ddt.ru
떼아뜨르 D.D.T. 공식 사이트(러시아어)
http://ddt.freelines.ru
D.D.T.에 관한 바이오그래피, 디스코그래피, 음원(영어)
http://russia-in-us.com/Music/Rock/DD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