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015103130-0320punkcrassCrass – Penis Envy – Crass, 1981

 

 

전위적 페미니즘 록의 효시

영국의 아나키스트 펑크 밴드(또는 아방가르드 펑크로 분류되기도 한다) 크래스(Crass)는 시종일관 철두철미하게 ‘메시지’를 강조했던 밴드다. 물론 펑크에 있어 거의 모든 밴드가 ‘의식화’된 자세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클래쉬(The Clash)나 갱 오브 포(Gang Of Four)처럼 확고한 자기 주장을 갖추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운드’의 다양성과 실험에 노력을 기울였던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크래스의 경우는, 음악적 실험보다는 자신들이 지닌 ‘무정부주의’의 신념을 설파하는 데 전념했다는 점에서 구분이 된다. 크래스의 드러머였던 페니 림버드(Penny Rimbaud)는 “우리는 음악적인 이유로 밴드 활동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밴드에 있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사운드보다는 메시지에 치중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동시대 뉴 웨이브로 넘어가려는 영국 뮤직 씬보다는 LA나 워싱턴을 중심으로 형성된 미국의 하드코어 무브먼트에 훨씬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크래스의 음악을 하드코어 펑크의 일종으로 보기도 어려운데, 이들의 음악 스타일은 하드코어의 몰아 부치는 스피드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당대의 펑크 사조 어느 쪽에도 포함시키기 어려운 크래스의 애매모호한 독창성은, 오히려 포스트록(post-rock)이라는 거대하고 광범위한 장르가 기반을 다진 오늘날에 와서야 제대로 진가를 발휘하는 듯싶다(특히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Godspeed You Black Emperor!)가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Penis Envy](1981)는 위에서 말한 크래스의 특성이 극도로 표출된 앨범이다. 제목(‘남근 선망’)에서 알 수 있듯, 이 앨범에서 크래스가 강조하는 주제 의식은 성차별주의(sexism)다. 매춘과 강간을 다룬 “Bata Motel”과 “Poision In A Pretty Pill”, 남녀 역할의 관성을 신랄하게 파헤친 “Systematic Death”,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절망감이 마조히즘적 분노로 타오르는 “What The Fuck?”, 진실해 보이는 듯한 남녀간의 사랑이 사실은 자본주의 매체의 고도로 조작된 상업 전략의 일환일 뿐이라는 “Smother Love” 등은 크래스의 메시지를 뚜렷하게 표출시켜 주고 있다.

물론 이들의 관심은 페미니즘의 영역에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Where Next Columbus”는 위대한 사상가나 지도자들의 영향력이라는 게 세상을 얼마나 혼란스럽게 만들었는지 통탄하는 노래이며, “Health Surface”는 공립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극빈자의 상념을 그린 곡이다.

비록 메시지 전달에 총력을 기울였다고는 하지만, 크래스가 구사하는 연주를 오늘날 다시 들어보면 범상치 않다. 예리하며 바늘 끝으로 콕콕 찌르는 듯한 필 프리(Phil Free)와 B.A. 나나(B.A. Nana)의 기타는 허스커 두(Husker Du)의 밥 물드(Bob Mould)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지 않았나 추측되며, 펑크 록으로서는 상당히 변칙적인 연주를 펼치는 페니 림버드의 드럼도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앨범의 압권은 보컬리스트 이브 리버틴(Eve Libertine)의 역량이다. 본래 크래스에는 세 명의 보컬리스트가 있는데, 이브 리버틴 말고도 스티브 이그노런트(Steve Ignorant)와 조이 드 비브레(Joy De Vivre)가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Penis Envy]에서는 스티브 이그노런트가 참여하지 않았으며, 조이 드 비브레도 주로 백 보컬만 맡았다(그녀가 리드 보컬을 한 노래는 “Health Surface”와 “Our Wedding”(CD에만 수록된 보너스 트랙) 두 곡 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 앨범은 온전히 이브 리버틴의 압도적인 보컬이 전체를 장악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화통하고 선이 굵으면서도, 노래의 성격에 따라 감정의 발산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이브 리버틴의 특출한 능력은 사실 남성들이 주도하는 펑크 밴드였던 크래스의 본질이, [Penis Envy]에서 만큼은 페미니즘 펑크의 선구자로 자리매김되는 (긍정적인 의미로서의) ‘오인’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오인은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만개되는 페미니즘 록이나 라이엇 걸 무브먼트(Riot Grrrl Movement)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Penis Envy]는 비록 여타 쟁쟁한 펑크 걸작들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편이지만, 시대를 앞지르는 남다른 선구성으로 인해 마땅히 재평가 받아야 할 중요한 작품이다. 20011009 | 오공훈 aura508@unitel.co.kr

7/10

수록곡
1. Bata Motel
2. Systematic Death
3. Poison In A Pretty Pill
4. What The Fuck
5. Where Next Columbus
6. Berkertex Bribe
7. Smother Love
8. Health Surface
9. Dry Weather
10. Our Wedding (Bonus Tr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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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Crass 공식 사이트
http://www.southern.com/southern/label/CRC
Crass 팬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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