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 펑크의 여러 얼굴들, 여러 유래들 펑크=단순 무식 과격? 펑크는 단순무식한 음악이다? 쓰리 코드와 연주 못하기(anti-playing)가 펑크의 전부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고정관념으로 펑크를 신비화하고 록의 한 장르, 즉 잘 팔리는 상품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담고있는 불유쾌한 선전문구다.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와 레이먼즈(Ramones)에게서 극도로 단순화된 쓰리 코드 로큰롤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연주를 ‘못하지’ 않는다. 단순성과 원초성이 지나치게 꾸며지고 부각된 것은 또 다른 주류문화가 된 1970년대 ‘클래식 록’에 대한 조롱과 반항의 의도적 전략이었다. 펑크의 이 ‘한가지’ 얼굴 ― 아무렇게나 걸친 옷에 관중들을 향해 욕을 해대며 반복적인 비트와 단순한 코드를 기초로 어설프게 연주하는 모습 ― 의 ‘원형’은 1970년대 후반 런던(의 클럽)의 이미지로부터 온 것이다. 섹스 피스톨스, 클래쉬(The Clash), 잼(The Jam), 버즈콕스(The Buzzcocks), 댐드(The Damned), 와이어(The Wire) 등등… 그리고 이 ‘원형’은 종종 ‘분노에 찬 청년 반항의 목소리’의 전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펑크의 모습은 훨씬 다면적이다. 1960년대 말부터 뉴욕의 언더그라운드에서 대안적인 록 음악을 만들려 했던 지식인들의 ‘프로토 펑크’로부터 1980년대 초 미국 각지에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건설하려 했던 하드코어 펑크를 거쳐, 1990년대 중반 난데없이 팝 차트를 장식했던 뉴 펑크에 이르는 다양한 모습들이 펑크라는 이름 아래 모일 수 있다. 펑크의 ‘원형’으로 간주되는 런던 펑크 또한 선행의 여러 음악 장르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서는 그 복잡한 유래를 먼저 살펴보자. 펑크는 1970년대 후반, 정확히 말하면 1976년 11월 섹스 피스톨스에 의해 촉발된 영국 프롤레타리아 청년들의 반란의 이름이다. 물론 펑크의 기원은 영국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펑크가 ‘폭발’한 곳이 영국이라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미국에서 펑크는 언더그라운드에 머물러 있었지만, 영국에서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평등주의적 DIY(Do It Yourself) 에토스를 내세우면서 대중 음악의 판도를 급격하게 재편하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프로토 펑크 런던 펑크와 가장 유사한 스타일은 1960년대 중반 미국 각지의 도시에서 태동했던 이른바 ‘거라지(garage) 밴드들’에서 찾을 수 있다. 10대 중심의 아마추어들의 거칠고 조잡하지만 활기 넘친 사운드였다. 또한 1960년대 후반 등장한 이기 팝(Iggy Pop)이나 MC 파이브(MC 5) 등의 거칠고 시끄러운 록 사운드도 펑크의 한 성분이 되었다. 이들은 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후 섹스 피스톨스에 의해 ‘언급’되면서 재조명되었다. 뉴욕 펑크 비슷한 시기에 좀더 의식적으로 대안적 예술형식을 모색하던 뉴욕의 언더그라운드에서 펑크의 흐름은 1960년대 후반 벨벳 언더그라운드, 1970년대 초 뉴욕 펑크의 아버지라 불리는 뉴욕 돌스(New York Dolls)로 흐름이 계승되었고, 1970년대 중반 ‘뉴욕 펑크’라고 불릴 수 있는 흐름을 만들어 내었다(그러나 뉴욕 펑크는 영국과는 다르게 전개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펑크보다는 주로 ‘뉴 웨이브’로 분류된다). 맬컴 매클래런(Malcolm McLaren)이 섹스 피스톨스 이전에 한때 뉴욕 돌스의 매니저로 일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뉴욕 펑크는 머서 아트 센터와 클럽 CBGB’s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레이먼즈는 앞서 언급한 뉴욕 돌스와 더불어 런던 펑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존재로 기록된다. 한편 패티 스미쓰(Patti Smith), 텔레비전(Television) 등 보다 시적이고 예술적인 펑크도 있었다. 펍 록 물론 런던 펑크가 전적으로 미국 밴드들의 영향하에 탄생한 것은 아니다. 1970년대 초반 이래 영국에는 블루스, 컨트리, 로커빌리 등을 연주하던 밴드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음악을 펍 록(pub rock)이라 부른다. 이들은 점차 화려한 연예가 되어 가는 주류의 ‘스타디엄 록(stadium rock)’을 거부하고 록의 본연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의 일환이었다. 이들 특유의 순회 공연, DIY 에토스, 소박한 사운드는 뉴욕 펑크와 더불어 런던 펑크의 한 성분이 되었다. 뉴욕 펑크와 펍 록은 음악 스타일 면에서는 구분되지만, 록 음악의 관습을 넘어선다는 태도 면에서는 공통 분모를 가진다. 다양한 흐름으로 산개한 펑크 이런 복잡한 흐름은 1976년 런던에서 합류하여 독특한 사운드를 낳았고 사회체제에도 커다란 파장을 미쳤다. 그 뒤 2, 3년 남짓한 폭발기를 끝내고 펑크는 뉴 웨이브, 포스트펑크, 하드코어 등의 다양한 이름을 달고 산개하였다. 이런 흐름들이 1980년대 내내 언더그라운드 씬에 머물다가 ‘그런지/얼터너티브 록’이라는 이름을 달고 미디어에 노출된 과정은 이제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뉴 펑크는 이런 흐름 중 가장 마지막에 도착한 흐름이다. 그렇다면 펑크는 따분한 일상을 넘어서는 여가의 수단일 수도, 새로운 사운드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수단일 수도, 상업적 성공을 위한 수단일 수도 있(었)다. 물론 이처럼 다양한 모습 역시 상황적 산물일 뿐이기에 ‘지금 여기’서도 동일한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한 극단에는 사회체제를 급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가의 상이 있고, 다른 한 극단에는 플래티넘 레코드를 기록하면서 떼돈을 버는 연예인의 상이 있다. 그 사이에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이 떠돈다. 그래서 펑크의 이미지 모두를 ‘따라잡을’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따라잡기’가 유행이므로 우리도 일단 펑크가 가장 집약적으로 ‘폭발’한 1976년 런던을 찾아가 보자. 2. 대영제국의 무정부상태(anarchy)로부터 초정부상태(hyper-archy)까지 “”맙소사. 어젯밤 TV에서 섹스 피스톨스 봤어?”하고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나는 일하러 가기 위해 플랫폼에 서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섹스 피스톨스가 머릿기사를 장식한 신문을 보고 있었습니다. 신문에는 ‘TV에서 퍽(fuck)이라고 하다!’라고 쓰여 있었죠. 마치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라도 일어난 듯이 말입니다. 대단한 아침이었어요. 그것 때문에 사람들 혈압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 1976년 12월 2일 엘비스 코스텔로의 회상(나중에는 펑크 뮤지션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컴퓨터 엔지니어였다) 저항의 미학? 전적인 허무주의? 펑크 미학의 핵심은 록 평론가 그레일 마커스에 따르면 “모든 사회적 사실의 부정”이다. 런던 펑크에는 ‘무정부적’, ‘급진적’, ‘강렬한’, ‘전복적’ 등의 형용사가 곧잘 따라붙는 것도 펑크의 ‘거부의 미학’ 때문이다. 런던 펑크가 자신의 태도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했던 가장 중요한 무기는 당연하게도 사운드였다. 기존 체제에 반대하는 독자적 실재를 구성하고자 했던 열망은 당대의 주류 록 음악에 대항하여 대안적인 사운드를 창조하고자 했던 음악적 시도로 나타났다. 미래 없는 노동계급 청년의 분노, 좌절, 폭력 등의 감정은 단조롭고 반복적이고 육체적인 사운드의 효과를 통해 드러났다. 둥둥거리는 베이스 기타와 반복적인 비트를 두들겨대는 드럼, 기교 없이 어설프게 긁어대는 기타, 아무렇게나 내지르는 보컬은 절박한 상황을 표현하기 위한 최상의 혹은 유일한 음악적 수단이었다. 런던 펑크가 수면 위로 부상할 수 있었던 계기는 1975년 11월 6일 세인트 마틴 예술학교(St. Martin School of Art)에서 가진 섹스 피스톨스의 첫 공연이었다. 물론 펑크 최초의 레코드, 최초의 미국 순회 공연이라는 영예는 댐드의 것이었다. 이후 1975년과 1976년 사이 런던에만도 자그마치 200여개의 펑크 밴드가 결성되면서 런던 펑크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 절정은 1976년 9월 20일과 21일 런던 옥스퍼드가에 있는 100 클럽에서 열린 ‘브리티시 펑크 록 페스티발’이었다. 펑크 전성기의 극단적 예는 섹스 피스톨스의 “God Save The Queen”이 순위 차트 1위에 오른 것이다. 이때 영국 의회는 “영국식 생활방식을 위협한다”며 섹스 피스톨스를 비난했다. 우파는 사회주의자라고, 공산주의자들은 파시스트라고 그들을 몰아세웠다. 결국 차트 1위 자리는 ‘빈 칸’으로 제시되었다.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밴드가 불법 해적 밴드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차트는 이들이 불법 밴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이데올로기적인 코드에 공동이 생겼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거부는 곧 허무로 바뀌기 시작한다. 사실은 처음부터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Anarcky In The U.K.”가 발표되었을 때 섹스 피스톨스는 모든 청년운동으로부터 미래의 기대주라는 칭호를 얻었지만 이들은 ‘미래’라는 용어 자체를 거부했다. 여왕을 경멸하는 노래인 “God Save The Queen”에 의해 과거가 부정되었고 “Anarchy In The U.K.”에 의해 현재가 부정되었다. 따라서 더 이상 미래는 없다. 그 유명한 “옳은 것은 없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구호는 그렇게 해서 도출된 것이었다. 펑크의 여러 흐름 런던 펑크에게 있어서 이른바 ‘음악성’은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아트 록의 음악적 실험이나 전자 테크놀로지의 사용 등은 너무도 먼 것이었다. 그렇지만 런던 펑크를 ‘섹스 피스톨스가 확립한 사운드’로 환원시킬 수 없다. 숙련된 뮤지션들로 구성되어 정치적 메시지를 강하게 표현한 클래쉬, 스몰 페이시스, 후 등 1960년대의 모드 그룹이나 모타운 소울 등을 펑크 사운드로 끌어들인 잼, 팝적 멜로디와 신랄한 가사를 연결시킨 맨체스터 출신의 ‘펑크 팝’ 밴드인 버즈콕스, 음울한 고딕 사운드를 들려주었던 수지 앤 더 밴쉬스(Siouxsie & The Banshees), 미니멀리즘적 접근법을 도입하는 등 ‘프로그레시브’한 성향을 보여준 와이어, 또 그 외의 많은 펑크 밴드들은 DIY 에토스를 견지하면서도 독자적 세계를 추구하려는 주목할 만한 시도들을 보여주었다. 펑크의 에너지를 레게나 스카와 결합시키려 했던 ‘투 톤 무브먼트(two-tone movement)’도 빼놓을 수 없다. 투톤 레이블 소속의 스페셜스(The Specials), 실렉터(The Selector), 매드니스(Madness) 등은 “흑인과 백인은 하나의 피부색, 두가지 다른 톤”이라는 기치 아래 펑크와 루디라는 상이한 두 문화 사이의 음악적·문화적 크로스오버를 이루었다. 이런 흑백 교류의 모습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록(Rock Against Racism)’이란 페스티벌의 정기적 개최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났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여성 펑크 밴드들의 등장이다. 엑스 레이 스펙스(X-Ray Spex), 슬리츠(Slits), 레인코츠(The Raincoats) 등이 그들이다. 펑크는 록 음악의 복잡한 장비와 화려한 기교 등을 ‘거세’해 버렸고 그로 인해 여성이 대중음악의 ‘주체’로 진입하는 것을 허용했다. 여성의 ‘집단적 목소리’가 들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1990년대 초반 미국에서 하드코어의 남성중심성에 반대한 소녀 펑크 집단 ‘라이어트 걸(riot grrrls)’ 또한 이러한 흐름을 이어나갔다. 이제 1970년대 후반이 되면 펑크에서 일관된 음악된 스타일을 찾기는 힘들게 되었다. 이는 섹스 피스톨스 등이 주도했던 탈신비화 전략이 시도했던 카오스 혹은 무정부상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어 가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펑크 2세대들은 ‘막가는’ 무정부주의보다는 다소 일관된 정치적 입장을 요구받게 되었다. 이는 펑크 진영의 내분으로 나타났고, 이 내분은 1978-9년 경에는 가시화되었다. 한 진영은 펑크의 자발성을 존중하면서 펑크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했고, 다른 한 진영은 음악적 실험과 정치적 메시지를 결합하는 고립주의적 실험에 몰두했다. 평론가들은 이들 펑크 2세대의 양 진영에 각각 ‘펑크 인민주의’와 ‘펑크 전위주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묘한 것은 펑크가 ‘록 음악을 부정하고 탈신비화하려는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록 음악을 포함한 대중음악 전체에 강력한 에너지와 활기를 공급했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누구나 할 수 있다(Anyone Can Do It)”라는 펑크의 에토스를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다(Anyone Can Be a Star)”로 전환시킨 이들이 있었다. 이른바 뉴 팝 혹은 뉴 로맨틱스. 이들에 의해 탈신비화는 재신비화되었고, 전복의 전복이 이루어졌고, 무정부상태는 최종적으로 정상화되었다. 때마침 ‘철의 여인’ 대처가 권좌를 차지했다. 화려하고 번드르르한 ‘1980년대’가 개막되었다. 3. 펑크의 사상 : 상황주의와 그 딜레마 ‘아무 생각없(어 보이)는’ 펑크에 안 어울릴지도 모르지만 ‘운동’과 ‘사상’이 있었다. 펑크는 반지성적 운동으로 비쳤음에도 불구하고, 펑크가 지식인들에게 각별한 대우를 받고 평가에 평가가 거듭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펑크가 노동계급 청년들의 ‘원초적’, ‘자연발생적’ 반란이라는 측면 외에 지식인들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펑크의 사상은 상황주의(Situationism)라고 불린다. 정확히 말하면 섹스 피스톨스의 매니저를 맡았던 ‘위대한 사기꾼(The great swindler)’ 맬컴 매클래런의 머리 속에 있던 사상이다. 상황주의 운동은 1950년대 초반의 문자주의(Lettrism) 운동에서 유래하였으며, 1968년의 ‘5월 혁명’ 때 급진적 주장을 내세우고 참여했다가, 1972년 내부의 격론 끝에 해체되었다. 그럼 매클래런은? 그는 상황주의자들의 런던 지부 격이었던 킹 몹(King Mob)이라는 단체의 일원이었다(고 스스로 주장한다). 그런데 이 상황주의자들은 맑스주의적 ‘구좌파(Old Left)’와도, 1960년대의 유토피아적 청년문화(이른바 히피 반문화)와 애증관계에 있었던 ‘신좌파(New Left)’와도 달랐다. 상황주의는 ‘말만 많고 실천은 없다’는 평을 듣는 예술가들의 조직이었고, 항상 주변적이었다. 이들은 외친다. “상황주의자들은 현대의 여가가 스스로에게 내린 판결을 집행하고자 한다!”라고. 이들은 스스로를 혁명가라고 불렀으며 진정한 자유에만 관심을 둔다고 했다. 이들이 1968년 5월 파리 봉기에서 제창한 슬로건은 “일하지 말라… 보도 밑에는 해변이 있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였다. 이들은 이른바 ‘풍요의 시대’인 소비자본주의에서 겉보기에는 아무 목적도, 동기도 없어 보이는 대중의 반항을 “일상생활의 궁핍화와 소외에 대항하는 저항”으로 파악한 것이다. 프랑스의 상황주의 사상가 기 드보르(Guy Debord)는 이를 ‘스펙터클의 사회’라고 요약했다. 진정한 욕구를 대체하는 상품, 그리고 상품을 대체하는 스펙터클이 우리를 ‘유혹’하여 지배한다. 즉, 사람들은 ‘노동자’로서 억압받고 착취당할 뿐만 아니라 ‘소비자’로서 우대받으면서 지배당한다. 또한 스펙터클의 힘은 전복적으로 보이는 힘들을 포섭하여 ‘화해적 연예’로 전화시킨다. 이들이 ‘상황’주의자인 이유는 스펙터클 속에서 일련의 ‘상황들’을 만들어서 “부드럽게 운영되고 평온하게 만드는” 매스 미디어의 번드르르함을 붕괴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장난(prank) 같은 해프닝들을 통해 ‘일련의 상황들을 건설’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아주 자연발생적이고 즉흥적인 카니발(혹은 아나키 혹은 카오스 혹은 디스토피아) 뒤에 모든 권력이 종말되고 자율에 기초한 상태가 도래한다는 것이다(일종의 ‘믿습니까’ 류의 사상이다). 그렇다면 매클래런의 전략은? 그가 한때 상황주의에 경도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펑크 밴드들이 ‘현대의 여가가 스스로에게 내린 판결’을 집행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들은 그 집행도구로 로큰롤을 선택했다. 그들은 로큰롤을 무기로 모든 이데올로기 코드를 부술 뿐 아니라 현대의 여가 자체가 되어버린 로큰롤 자체를 파괴한다. 그는 ‘록 음악’이야말로 겉으로는 전복적인 척하면서 실제로는 청년 반항과 계급적 저항을 ‘유혹’하는 화해적 연예의 상징이라고 간주했다. 그래서 록 음악을 공격하면 자본주의의 일련의 스텍터클을 ‘한 칼에 우루루’ 파괴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때문에 “혼란을 틈타 현금을 번다”는 그의 유명한 전략은 좋게 해석하면 로큰롤의 진정성 어쩌구 하는 ‘가짜’ 자유에 대한 반격이었다. 한마디로 ‘탈신비화 전략’인데 섹스 피스톨스의 ‘의도적으로 팔아먹기(selling-out)’는 이런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매클래런은 섹스 피스톨스의 일련의 기행들을 이런 ‘상황들의 건설’로 생각했다. BBC에 나가서 ‘fuck’을 외치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광란의 공연(이른바 ‘주빌리 공연’)을 강행하고… 매일매일 카니발 같은 상황이 정말 계속될 것 같았다. 그러나 단지 10개월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상황주의자들의 전략은 ‘불가능한 꿈’이 아니었을까. 특히 문제는 스펙터클의 전복마저도 전복될 수 있다는 점이다. ‘upside down’은 ‘inside out’으로 반전된다. 섹스 피스톨스의 전복마저도 ‘화해적 연예’로 전화될 수 있다. 매클래런은 역시나 영민했고 펑크는 사전에 짜여진 각본이었다고, “위대한 로큰롤 사기”였다고 주장하면서 입장을 180도 선회했다. 매클래런의 전략적 도구는 섹스 피스톨스에서 ‘뉴 팝’ 그룹 스팬도 발레(Spandau Ballet)로 대체되었다! “스펙터클의 부조리성은 부조리의 스펙터클이 된다”는 드보르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평론가 존 새비지(Jon Savage)는 이들 런던 펑크를 “천년왕국주의의 현대의 재현”이라고 말했다. 즉, 파리 코뮌, 다다이즘 운동, 중세 원탁의 기사 등의 역사적 사건들과 더불어 이는 짧은 시기의 무정부상태와 카니발적 방종 뒤에 ‘역사의 종말’이 도래한다는 묵시록적 전망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늘 그랬듯 종말에는 끝이 없고, 종말 뒤에도 역사는 계속 된다는 점이다. Endless End… 여기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을까? 매스 미디어의 테러리즘이 지배하는 ‘스펙터클의 사회’를 벗어날 방도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필요한 질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1980년대 이후 포스트펑크 씬(≒인디 씬)의 ‘브레인’들의 생각을 훑어 볼 수밖에… 물론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4. 펑크의 역설, 반(反)스타일의 스타일화 펑크는 사운드이고 스타일이다. 음악 스타일이고, 패션 스타일이고 나아가 라이프 스타일이다. 이를 총칭해서 ‘하위문화(subculture)’라고 부를 수 있을 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간에. 펑크는 섹스 피스톨스와 함께 어느날 갑자기 돌출적으로 튀어나온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영국 노동계급 청년들(참고: 다시 말해 노동계급 가정의 자식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나온 것이다. 여기서는 영국으로 시야를 고정하여 더 넓은 문화적 맥락을 살펴보도록 하자. 하위문화의 스타일들: 의식(儀式)을 통한 저항 괴상망측한 스타일을 통해 삶과 놀이를 장식한 것은 펑크가 대표적이지만 펑크만은 아니다. 한국 말로(아니 한자어로) ‘비행 청소년’의 첫 세대라고 말할 수 있는 테디 보이(teddy boys)가 전후의 풍요 속에서 등장하여 어른들을 경악에 몰아넣은 후, 여러 청년 하위문화 집단이 등장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비트(beats), 힙스터(hipsters), 로커(rockers), 스킨헤드(skinheads), 루디(rudies), 모드(mods), 글램(glams) 등등. 이들 하위문화 청년 집단들은 각기 독특한 스타일과 음악과 거리 혹은 클럽 문화를 향유했다. 예컨대 1960년대 초반, 스킨헤드는 박박 밀어버린 머리에 가죽 재킷 혹은 군복 스타일의 복장을 하고 군화 비슷한 닥터 마틴 부츠를 신고 레게와 스카를 들으며 거리를 누볐다. 반면 비슷한 시기 이들과 대립했던 모드는 짧고 깔끔한 머리에 단정한 정장 스타일을 하고 스쿠터를 타고 다니며 런던의 웨스트엔드(Westend)의 클럽에서 주로 리듬 앤 블루스나 소울을 들으며 암페타민의 힘을 빌어 밤새도록 몸을 흔들었다. 영국의 학자들은 청년 하위문화 집단의 생활 조건과 이들의 스타일(및 음악) 간의 상호관계를 밝히고자 했다. 이 연구에 의하면 하위문화 집단은 스타일과 음악을 통해 여가와 문화를 장식함으로써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뿐만 아니라 부모들의 문화, 즉 노동계급의 문화와도 거리를 둔다. 즉 이들은 스타일의 반란을 통해 사회적 문화적 관계를 상상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의식(儀式)을 통한 저항(resistance through rituals)’이라는 것인데, 1960년대 모드의 경우 후나 롤링 스톤스의 콘서트를 관람하는 것도 그런 의식들 중의 하나였다. 펑크와 청년 하위문화: 스타일의 반란, 반란 속의 스타일 이러한 하위문화가 가장 폭발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펑크이다. 펑크는 청년 하위문화 스타일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위치를 점한다. 1960년대와는 달리 1970년대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함께 고실업으로 인해 파시즘의 유령이 다시 등장했다. ‘풍요의 자식들’이었던 1960년대의 히피가 자본주의의 일상을 ‘낭만적’으로 거부하면서 삶의 변혁을 추구했다면, ‘불황의 자식들’인 1970년대의 펑크는 낭만적이라는 형용사마저 던져 버렸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낭만적 유토피아가 아니라 허무적 디스토피아였다. 펑크는 지배적 문화뿐만 아니라 ‘기성의’ 청년 하위문화 스타일에 대해서도 반란을 감행했다. 스타일의 장식은 닭벼슬 머리, 빡박 민 머리, 폐고무, 폐비닐, 쇠사슬, 잭나이프 등 쓰레기 장식물들이나 도착적 용품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스타일은 “길거리 펑크의 멍한 눈동자”처럼 어떤 고정된 의미도 결여되어 있었지만, 일단 모순적이고 부조리하게 병치되자마자 순간적이고 우발적으로 ‘폭발’했다. 여기에는 이들이 향유했던 음악이 보다 단순하고 직선적인 아마추어리즘을 표방한 것도 한몫 했다. ‘DIY’ 펑크 에토스는 “오늘은 맥주를 퍼마시다가 그 다음날은 쓰리 코드를 익혀 무대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클럽의 순간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거나, 인디 레이블이나 팬진을 통해 지속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에서 드러났다. 이런 ‘반(反)스타일’의 반란은, 그러나 결과적으로 가장 반항적이고 과격한 하위문화가 되었다. 한 평론가의 말처럼 그것은 “반란 속의 스타일이었고 스타일 속의 반란”이었다. 그런데 이상의 논의가 노동계급 청년 하위문화를 ‘낭만화’하고 저항의 의미를 과장한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다. 물론 이런 논의는 하위문화를 ‘민중의 악마(folk devil)’라고 눈을 홉뜨는 주류 언론에 대한 해독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펑크 이후 하위문화는 한 시기를 대표하는 지배적인 형식이기를 그치고 산발적이고 국지적으로(만) 번성하고 있다는 점은 이런 비판은 설득력을 가진다. 전통적인 하위문화 ‘개념’은 펑크를 통해서 폭발했다가 죽었다! 듀란 듀란, 컬쳐 클럽, 스판도 발레 등 뉴 로맨틱스(new romantics) 스타들은 펑크의 요소를 상업적으로 이용하여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1980년대 영국의 상황은 평론가 데이브 리머의 책 제목 [Like Punk Never Happened]처럼 ‘언제 펑크가 일어났냐는 듯이’ 정상화되었다. 펑크 이후의 하위문화 : 여가 공간의 점유를 둘러싼 투쟁 하위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실재’들은 지금도 여기저기 존재한다. 펑크 이후에도 뉴 로맨틱스를 비롯하여, 고스(goths), 크러스티(crusties: 지저분한 복장을 하고 도시 거리를 돌아 다니는 생태주의적 배회자), 스쿼터(squatters: 빈집을 점유하고 생활하는 떠돌이), 뉴 에이지 트래블러(new age travellers : 유럽형 집시와 아메리카형 히피의 혼합형), 레이버(ravers: 테크노 음악을 매개로 한 레이브 파티의 쾌락을 만끽한 댄스+클럽 문화), 지피(zippies: 히피+레이버) 등은 1980년대의 지배적 삶인 ‘쾌적한 여피 문화’와는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선택한 각종 하위문화들이었다. 청년 하위문화(와 그에 대한 논의)가 영국에 고유한 현상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수반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지배적인 문화에 의문을 던지고 새로운 스타일과 정체성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어디 영국 청년들뿐이랴. 어떤 학자는 이를 “여가 공간의 점유를 둘러싼 투쟁”이라고 거창하게 말했다. 그렇게 거창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왠지 그 ‘싸움’은 우리 주변의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닌가? 20010930 | [weiv] * 이 글은 1996년에 쓰여진 글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관련 글 펑크 25년: 1976 – 2001 (2) – vol.3/no.20 [20011016] 왜 지금 펑크인가 – vol.3/no.19 [20011001] Punk Diary – vol.3/no.19 [20011001] Ramones [Ramones] 리뷰 – vol.3/no.19 [20011001] Television [Marquee Moon] 리뷰 – vol.3/no.19 [20011001] Sex Pistols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 리뷰 – vol.3/no.19 [20011001] Wire [Pink Flag] 리뷰 – vol.3/no.19 [20011001] The Clash [The Clash] 리뷰 – vol.3/no.19 [20011001] Gang Of Four [Entertainment!] 리뷰 – vol.3/no.19 [20011001] Buzzcocks [Singles Going Steady] 리뷰 – vol.3/no.19 [20011001] Slits [Cut] 리뷰 – vol.3/no.19 [20011001] 관련 사이트 From Dada to Wave http://www.mital-u.ch/Dada 쮜리히의 카바레 볼테르와 다다 운동에 관한 사이트. 20세기 아방가르드 운동과 펑크/웨이브 음악과의 관련성에 관해 나와 있다. “We Created It; Let’s Take It Over!”: The Emergence of Punk in America http://www.inch.com/~jessamin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뉴욕 씬에 초점을 맞춘 사이트. Punk Chronology http://www.emplive.com/explore/punk_chron 1960년대 뿌리부터 1980년대 초까지 펑크의 연대기. Ray Stevenson – Punk Photos 1976-1979 http://www.photos.fsbusiness.co.uk 사진작가의 펑크 사진들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