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틀: Igla(Needle)
상영시간: 81분
제작국: 카자흐스탄
제작사: 까자흐필름 스튜디오(Kazakhfilm Studios)
감독: 라쉬드 누그마노프 (Rashid Nugmanov)
배우: 빅또르 쪼이(Viktor Tsoi) – 모로(Moro) 역
마리아 스미노바(Maria Smirnova) – 지나(Dina) 역
알렉산드르 바쉬노프(Aleksandr Bshinov) – 스파르딱(Spartak) 역
음악: 빅또르 쪼이

20010816012824-kino-film-igla빅또르 쪼이는 [록(Rok)], [아싸(Assa)]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하였는데, [이글라(Igla)]는 영화학교를 갓 졸업한 감독 라쉬드 누그마노프가 졸업 작품으로 찍은 최초의 장편영화이다. 쪼이는 이미 누그마노프의 단편에 모습을 드러낸 바 있는데, 이 영화는 기획 단계부터 빅또르 쪼이를 염두에 둔 영화로 제작되었다. 제목 이글라(Igla)는 ‘바늘’이라는 뜻으로 영화의 중심 소재인 약물복용을 상징한다. 1988년 러시아 개봉 당시 평단의 호평과 대중의 인기 모두를 획득하며 1,500만 명이라는 기록적 관객 동원을 기록했으며, 빅또르 쪼이 역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영화배우로서도 인정받았다. 한창 인기의 상승곡선을 그리던 당시에 제작된 때문인지 빅또르 쪼이는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비디오로 출시되었지만 이미 ‘희귀본’이 된 작품인만큼 먼저 스토리부터 요약해 보자.

당시에는 미발표곡이었던 “Zvezda Po Imeni Sontse”의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빛을 받아 땅은 따스하게 된다”라는 가사가 흐르면서 흑백 화면 멀리에서 빅또르 쪼이가 걸어와 라이터를 켜는 순간 화면이 컬러로 바뀌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빅또르 쪼이는 고향에 돌아온 자유분방한 청년 모로로 분하고 있는데, 아무도 그를 반겨주지 않는다(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옛 친구 스빠르딱은 과거의 빚으로 인해 그를 피하려 하고, 여자친구인 간호사 지나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를 외면하려 한다. 억지 끝에 지나의 집에 하루 묵게 된 뒤 모로는 지나가 마약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지나를 떠나려는 마음을 거두고 그녀와 해변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금단증상으로 괴로워하는 지나와 바다를 보기 위해 찾아간 곳은 물 한 방울 없이 말라버린 황량한 사막으로 변해 있었다. 이후 쪼이는 지나가 마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 외과의사 아르뚜르의 소행 때문임을 알게 된다.

도시로 돌아와 보니 친구 스빠르딱 역시 마피아로부터 쫓기는 신세다. 모로 역시 그들로부터 습격을 받게 되지만 뛰어난 쿵후 실력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분노한 모로와 친구들은 수영장으로 아르뚜르를 찾아가지만 약간의 위협을 주는 것만으로 일단락 짓고 모로는 다시 홀로 길을 떠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눈발을 헤치며 갑작스레 나타난 마피아 일당이 흉기로 모로의 배를 찌른다. 그렇지만 모로는 벌떡 일어나 의연하게 길을 걸어가고, 그의 모습 뒤로 “Gruppa Krovi(Blood Type)”가 흐르면서 영화는 끝난다.

영화는 부패한 기성 체제에 대한 회의와 뻬레쓰뜨로이까에 대한 불안이 공존하던 1980년대 후반 구(舊) 소련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 주사바늘, 즉 마약은 기본적으로 ‘의사와 마피아를 결탁시켜서’ 이미 몰락의 징후를 보이는 구 소련을 더욱 병들게 하는 사회악의 상징이다. 그렇지만 마약은 중의적 상징을 갖기도 한다. 이는 지나의 집에서 묵는 장면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TV에서는 클래식 공연 장면이 흑백으로 방영되지만, 오디오 세트의 턴테이블에는 “Venus”가 걸려 있다. 여기서 보듯 마약은 ‘사회주의 노선 고수와 자본주의적 개방 사이에서 양자택일하라’고 강요하면서 또 다른 억압을 준비하는 위정자들의 행동을 함축하기도 한다.

마피아의 추적을 피해 동물원에 숨어 지내는 스빠르딱이 낙엽 쌓인 을씨년한 야외 써커스 공연장에 드러누우면서 부르짖는 “난 자유를 원해, 내 존재는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아, 완벽한 실존밖에 없는 거야”라는 대사는 영화의 중심적 메시지로 보인다. 이에 반해 빅또르 쪼이는 자신의 인지도와 이미지를 십분 가미하여 구원자적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설령, 다소 황당하게도 칼에 찔리고도 일어서는 불사신의 모습이라고는 해도.

[이글라]는 1999년 고전영화 전용관을 표방했던 [오즈]에서 개봉되었지만,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간판을 내렸다(이후 [오즈]는 고전영화 전용관의 원칙을 포기했다고 한다). 생소한 배경과 듣기 거북한 언어, 신인 감독과 비전문 배우의 주연, 이제는 철 지난 소재와 주제라는 점 등이 한국의 영화 팬들에게 호소하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만약 당신이 구하기 힘든 작품을 손에 넣어 비디오 플레이어에 넣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빅또르 쪼이의 숭배자일 것이다. 거기에 빅또르 쪼이의 모습을 원없이 볼 수 있다는 위안을 덧씌운다면 80분의 짧은 러닝타임이 아쉬운 작품이다.

P.S. 이 작품은 그 소재와 정서의 유사성으로 인해 ‘러시아판 트레인스포팅’이라고 불린다. ‘트레인스포팅’이라는 단어 역시 ‘기차가 어쩌고 저쩌고’하는 의미가 아니라, 마약 투여를 뜻하는 속어이다. [트레인스포팅]보다 [이글라]가 훨씬 먼저 제작되었고, [이글라]가 영국을 비롯하여 세계 20여개국으로 수출되었다고 하니, 차라리 [트레인스포팅]이 ‘영국판 이글라’라고 하면 ‘러시아적 관점’일 뿐일까. 어쨌든 [트레인스포팅]이 러시아에 개봉될 때 ‘주사바늘로’라는 뜻의 [Na Igle]로 번안되었다. 20010813 | 박일경 nikcuf@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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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빅또르 쪼이 국내 팬 사이트
http://my.netian.com/~megathon
빅토르 쪼이를 비롯한 러시아 뮤지션을 소개하고 mp3를 제공하고 있다.
빅또르 쪼이 가사번역 사이트
http://dom.xocah.org:1919
한국어로 번역된 빅또르 쪼이의 가사를 볼 수 있고 끼노의 전곡을 감상할 수 있다.
빅또르 쪼이 다큐멘터리
http://www.crezio.com/kbsplus/videolib/video2_su_special1.htm
1995년 KBS [일요스페셜]을 통해 방영된 빅또르 쪼이 다큐멘터리의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