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ishead – Dummy – Go Beat/Universal, 1994 한없이 우울에 가까운 블루 느와르 영화의 칙칙함과 프랑스 영화의 서정적인 멜랑콜리가 합치면 어떤 영화가 나올지 모르지만, 그 사운드트랙만큼은 어떤 음악일지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포티스헤드(Portishead)의 데뷔 앨범 [Dummy]가 있기 때문이다. 포티스헤드 음악의 형식적 요소는 느린 힙합 리듬, 신경질적인 스크래칭, 복고적인 키보드 소리, 둔탁한 이탈리안 스트링 등 이전에 존재하던 것들이었지만, 그것들의 이상적인 배합에 의한 전체적인 결과물은 이전의 음악 연금술사들이 발명하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다. 여기에 베스 기븐스(Beth Gibbons)의 흐느끼는 블루스 창법이 더해지면서 마지막의 결정체는 팝/록 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일관된 우울한 빛깔의 덩어리가 되었다. 이 결정체는 다른 감성이나 새로운 해석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높은 밀도를 지닌 것이었다. [Dummy]에서 포티스헤드는 첫 곡 “Mysterons”부터 서서히 우울한 감정을 고조시키고 “Strangers”나 “Pedestal” 같은 곡에서는 강한 비트를 주며, “It’s A Fire”와 “Roads”에서는 부드럽게 달래고, 결국엔 끝 곡 “Glory Box”까지 자신의 황량한 감정을 몽땅 다 드러낸다. 이 앨범의 미덕인, 일관되고 어두운 색채 속에서 존재하는 긴장과 이완, 속도의 조절은 곡과 곡 사이를 이어 붙인 흔적 없이 자연스레 연결되고 이 앨범은 전체가 한 곡으로 채워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결국 사이렌의 노래를 끝까지 들은 선원들이 물에 빠져 죽고, 메두사의 얼굴을 본 사람들이 돌로 되었듯이 앨범 [Dummy]를 끝까지 듣고 나면 청자들은 베스 기븐스의 우울함에 흠뻑 젖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이 서서히 마비된다. 공간의 여백이나 빈틈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Dummy]는 빈틈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답답한 앨범, 듣는 이의 자의적인 해석의 여지는 눈꼽만큼도 없는 일방적인 앨범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어쩌면 그런 사람에조차) 이 앨범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선과 우아한 색채는 중독적이고 탐미적이다. 형식적으로는 힙합, 블루스 등의 다양한 장르가 섞여 있지만, 앨범에 담긴 음악은 매우 긴 ‘단조 중심의 발라드’를 듣는 듯한 경험을 준다. 포티스헤드의 [Dummy] 앨범이 나온 지 7년이 지났다. 많은 일렉트로니카의 여성 보컬들이 베스 기븐스를 본뜬 듯한 어둡고 우울한 정서의 보컬을 들려주었지만, 그들의 감성이 자신의 내면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는지, 아니면 그 감성을 표현하는 방법이 잘못 되었는지, 아직까지 베스 기븐스를 뛰어넘는 포스트 포티스헤드는 등장하지 않고 있다. 20010701 | 이정남 yaaah@dreamwiz.com 9/10 수록곡 1. Mysterons 2. Sour Times 3. Strangers 4. It Could Be Sweet 5. Wandering Star 6. It’s A Fire 7. Numb 8. Roads 9. Pedestal 10. Biscuit 11. Glory Box 관련 글 주마간산으로 트립합 훑어보기 – vol.3/no.13 [20010701] 트립합 뮤지션/밴드 다이제스트 – vol.3/no.13 [20010701] Tricky, [Blowback] 리뷰 – vol.3/no.13 [20010701] 관련 사이트 Portishead 공식 사이트 http://www.portishead.co.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