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순위 프로그램’에 대한 이런 저런 문제를 지적하면서 ‘폐지하라’는 ‘운동’에 가담한 상태지만 ‘왜 그렇게 보기 싫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니 묘연했다. 음악이 취향에 안 맞아서? 립씽크가 싫어서? 젊은 애들을 질투해서? 이런 것들도 이유가 되겠지만 최근 결정적 단서를 하나 더 찾았다. 다름 아니라 ‘자막’이다. 눈치챘겠지만 아저씨가 오늘 투덜거리면서 시비 걸 대상은 가요 프로그램에서의 자막 방송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TV에서 음악이 연주될 때 자막이 등장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처럼 ‘빈도’가 심한 나라는 없을 듯하다. 혹시 국어교육이 개판 5분전인 상황이라 대중음악을 들을 때라도 국어 교육을 시키겠다는 의도일까. 하긴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상황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요즘 대중음악의 가사도 문법과 거리가 먼 것은 매한가지다. 내용이 유치찬란하다고 말하면 ‘잘났어’라는 말밖에 못 듣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언젠가는 ‘나의 사랑’을 ‘나에 사랑’이라고 적은 자막이 나와서 “저거 타이핑한 언니도 197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났겠군”이라고 단정한 일이 있다. 소유격 조사 ‘의’를 소격 조사 ‘에’로 흡수통합해 버리는 국민적 대사에 ‘공영'(무늬만?) 방송국까지 앞장 설 필요는 없을 텐데… 게다가 한국 대중가요 가사는 ‘국영문 혼용’이 된 지 오래이니 국어교육과도 거리가 멀다. 물론 노래 가사에 사용되는 영어야 초급회화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때로 잉글리시라기보다는 콩글리시므로 영어교육과도 거리가 한참 멀다. 한번은 ‘장수그룹’ R의 노래를 들을 때 나온 “lie lie lie야”라는 자막이 “거짓말이야”라는 뜻인지 그냥 “랄랄라”같은 뜻없는 여흥구인지 헷갈린 일도 있다. 앞의 경우라면 ‘영어가 여기 와서 고생 많이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국어교육 어쩌구는 나의 상상이므로 여기서 그쳐야겠다. 이유는 더 근본적이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자막이 나오면 ‘음악’이 들리지 않는다. 그거 읽다 보면 음악이 끝나 있을 때가 많다. 음악이라는 게 악기 연주의 미묘한 뉘앙스를 감상하고 똑같은 가사와 곡이라도 목소리를 어떻게 구사하는가를 느낄 때가 제 맛인데, ‘가수가 가사에 제대로 입을 맞추나’만을 보다가 끝나버린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혹시 자막이란 게 립씽크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나온 건 아닌가라는 혐의도 갖게 된다. 사족이지만 멋대가리 없이 적힌 명조체 폰트는 스크린을 많이 차지해서 춤을 연구하려는 우리 학생들에게도 별로 좋지 않을 듯. 뭐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자막이라는 게 ‘노래방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여기서 노래방 반주가 천박한 기계음이라는 주장에는 논란이 있겠지만, ‘음악이 가지는 풍부한 의미를 협애화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소신은 굽힐 수가 없다. 이렇게 얘기했더니 어떤 사람은 이렇게 나를 나무랐다. 가사 자막을 넣는 것은 ‘우리 가요’를 국민들이 애창하라는 충정에서 나온 것이지 다른 뜻은 없다고. 충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웃긴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음악 어법이나 스타일은 ‘우리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면서 가사만 한글로 되어 있으면 ‘우리 가요’이고, 그걸 애창하면 ‘애국’하는 것이라는 논리 말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 가요’를 지키는 게 무슨 가치가 있을까. 지키고 있는 가운데 내부는 푹푹 썩어 들어가고 있는데… 20년전 쯤 이른바 ‘냉전 시대’에 서방 세계는 소련(지금의 러시아)과 중공(지금의 중국)을 각각 ‘철의 장막’, ‘죽의 장막’이라고 표현했다. ‘장막(curtain)’을 쳐서 국민들의 눈이 멀게 해서 체제를 보호하고 있다고 비아냥거리는 것이었고, ‘개방적’인 서방세계와 달리 그 나라들이 ‘폐쇄적’이라는 뜻도 함축하고 있었다. 내 눈에는 TV에 나오는 자막이 그런 장막처럼 보인다. 한대수라는 아저씨가 1970년대 초에 “장막을 거둬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라고 노래부른 적이 있다(그렇다고 ‘반공가요’는 아니었다). 여기서 ‘장막’이란 단어를 ‘자막’으로 바꿨으면 좋겠다. 생산적인 제안이 아니라고? TV 보고 노래 연습하기 위해 자막을 보고 싶은 사람을 위하신다면, 캡션 기능을 이용하여 선택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제안합니다. 외국 영화 방영할 때 ‘음성다중방송’도 하는 기술이라면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일텐데요. 아니면 아예 일관성을 보여서 [수요예술무대]든 [이소라의 프로포즈]든 몽땅 가사 자막 내보내세요. 곧 한국에 온다고 하던데, 파바로티, 도밍고, 카레라스 공연할 때도 뒤에 멀티비전 만들어서 자막 내보내 주세요. 라디오 방송에서도 중간에 DJ가 가사 읊어 주세요. 똑같은 음악인데 왜 차별합니까. 200100614 | 신현준 homey@orgi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