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 소매상은 무엇으로 사는가

‘판 가게’라는 말을 요즘 젊은 사람들도 쓰는 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판 가게와 CD 숍의 차이는?’이라는 질문을 던져 보자. 우선 판 가게는 ‘동네’에 있고, CD 숍은 ‘도심’에 있다. 판 가게를 가려면 걸어가면 되고, CD 숍에 가려면 전철을 타고 가야 된다(물론 거주지에 따라 다르다. 시비 걸지 말 것!). 판 가게는 ‘가요 테이프’를 주로 팔고 CD 숍은 팝(이나 클래식)의 CD를 주로 판다. 최근 현상 하나 추가. 판 가게는 화장품 가게와 액세서리 가게를 겸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반면 CD 숍은 티셔츠, 잡지, 서적을 파는 코너가 있다. 아차, 까먹었다. 제일 중요한 차이가 있다. 판 가게에서는 ‘얼마예요’라고 물어본 뒤 돈을 내면 ‘아저씨’가 음반을 손으로 건네주는데, CD 숍에서는 바코드를 ‘삑’하고 누르고 현금계산기가 츠르르륵한 다음에야 음반이 내 손에 들어온다. 똑같은 이야기지만 판 가게에서는 영수증을 발행하지 않지만, CD 숍은 타이핑된 영수증을 발행한다. 한마디로 판 가게가 동네 ‘슈퍼’ 같다면, CD 숍은 백화점 같다.

판 가게라는 말이 그분들의 가업을 비하하는 느낌도 있으므로(맹세코 그럴 의도는 없었다), 지금부터는 ‘소매상’이라고 부르자. 이제까지 주절거린 이유는 요즘 소매상의 사정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IMF 한파’ 이후 소매상의 숫자가 절반으로 격감해서 현재 전국적으로 2000여 개 밖에 남지 않았다. 이들도 ‘못해 먹겠다’는 말을 한다.

5월 4일 국회에서 열렸던 포럼에서 대표로 참석한 소매상연합회 ‘회장님'(이자 판 가게 아저씨)이 실제로 한 말이다. 그의 말은 그날 발언 중 가장 ‘절박하고 감동적’이었다. 요지는 ‘음반 물류 현대화’니 뭐니 하는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현재 소매상의 마진은 10% 수준밖에 되지 않고 도매상에서는 반품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조성모랑 H.O.T 음반 아무리 팔아봤자 10개 들여놓아서 하나만 안 팔려도 장사 아무 것도 안한 것과 똑같다는 이야기다. 그중 한 소비자가 CD가 튀어서 바꿔 달라고 가져 왔는데 자기가 들어봐도 불량이 분명했지만 못 바꿔줬다는 가슴아픈 이야기도 했다.

그날 참석한 사람들의 면면을 유심히 보면 소매상 아저씨들의 인상이 제일 좋았다. 다른 게 아니라 젊었을 때 음악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는 게 얼굴에 쓰여 있었다.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른 아저씨나, 꽁지머리를 묶은 아저씨도 있었다. 그 시절 음악에 웬만큼 환장하지 않으면 그러고 다니기 힘들었다. “스모키랑 그랜드 훵크 레일로드 팔던 때가 좋았지”라고 말할 때는 좌중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고, 나중의 방청석에 앉아있던 아저씨는 “음반유통 현대화를 하려는 사업체(주: 한국음반유통센터 네트워크(KRCnet)을 말함)가 있다는 이야기를 오늘 여기 와서 처음 들었다”고 말하면서 소매상을 무시하고 추진되는 현 사업 및 사업주체들에 대해 분노를 표하기도 했다.

이들이 ‘판 장사’를 시작한 때, 그러니까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레코드 장사’는 장사 중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종목 중의 하나였다. 그때까지 ‘레코드판(LP 판)’이란 젊은 사람들이 자기를 드러내는 특권적 방식 중의 하나였다. 그러니까 요즘 머리를 길게 기르던가 이상한 색으로 염색하면서 ‘이건 우리의 특권이야’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게 레코드판을 들고 길거리를 걸어 다녔다. 왕년에 잘나가던 오빠, 언니들 중에서 남들한테 보여주려고 음반을 들고 다녔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시절에 소매상은 일종의 ‘문화 센터’였다. 음반을 사러 거기 들르는 사람은 주인 아저씨와 음악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새로 나오는 음반에 대한 정보도 듣고, 게다가 음악 좋아하는 다른 친구들과도 만날 수 있었다. 반드시 음반을 사지 않더라도 소매상에 들러 이야기만 나누다 가도 괜찮았고 가끔은 그곳에서 하루종일 ‘죽 때리는’ 일도 많았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과 음반을 서로 빌려 듣기도 했고, 어떤 곳은 자기가 좋아하는 곡목을 적어 가면 테이프 하나에 담아주는 곳도 있었다. 요즘 같으면 ‘불법 복제’로 찍히겠지만 음악 구하기가 힘든 시절 그건 일종의 ‘서비스’였다. CD도 아닌 LP를 열장 쯤 꺼내서 한 곡 한 곡 정성스럽게 녹음하는 일은 안해 본 사람은 수고를 모를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앞에서 판 가게와 CD 숍을 비교한 것은 마치 대자본이 운영하는 메가스토어(megastore)가 소규모 업체들을 제압했다는 말로 들릴 것이다. 그렇지만 메가스토어도 요즘 장사 안되기는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얼까. 사람들이 꼽는 또 하나의 요인은 ‘인터넷’이다. 온라인으로 CD도 팔고(이거 요즘 경쟁이 치열해서 ‘밑지고 파는’ 수준이다), 리얼 오디오로 스트리밍하든가 mp3로 다운로드 받고, 음반에 관한 정보도 여기저기 널려 있으니 ‘판 가게 아저씨’의 필요성이 줄어든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잔인하고 비정할 때가 많다.

이것도 원인의 전부가 아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일텐데 왜 유독 한국만 이런 것일까. 인터넷 산업이 유난히 발전해서? 그것만도 아니다. ‘온라인 사업이 수익모델의 확보가 힘들다’는 말은 여러 번 들었을 것이다. 온라인 음악 사이트도 아직은 ‘투자 단계(돈 꼰아박는 단계)’다. 결정적인 이유는 음반 유통(이른바 ‘물류’)이 엉망진창이 되었고, 여기에는 음반 팔아서 떼돈 번 사람들, 이른바 대형 음반제작사나 대형도매상들이 물류의 현대화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음반물류 현대화를 추진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이것마저도 기득권 세력들간의 이해갈등으로 지지부진하다. 대한민국 사회는 맨날 엄청 꼬이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해결하려고 하고, 이는 음반산업에 계신 분들도 마찬가지다.

이럴 때마다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 얘들아 아저씨도 노력할게. 후줄근해 보이는 소매상도 ‘신장개업’처럼 디스플레이 번듯하게 하고 컴퓨터로 장부 정리하고 POS 시스템 구비해서 사람들이 들락날락하게 되도록. 별 말이 아니라, 소매상이 동네슈퍼가 아니라 적어도 편의점 수준은 되도록. 20010530 | 신현준 homey@orgio.net

* 이 글은 하이틴 잡지 [Povteen]에 게재된 글의 확대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