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515105335-evescorpionEve – Scorpion – Ruff Ryders, 2001

 

 

‘thug nigga’와 여성성의 절묘한 결합

본인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대부분의 (몇 안 되는) 여성 래퍼들은 마초이즘과 원형적 섹슈얼리티의 환상에 여전히 강박증적으로 집착하는 주류 랩 게임의 지형 내에서 철저히 종속적인 위치에 처해 있다. 이들 여성 래퍼들은 래퍼로서의 뛰어난 구술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힙합 모굴(mogul)들의 막강한 후견 하에 비주얼한 성적, 육체적 환타지와 마이크로비트의 결합만이 그들의 유일한 생존전략이라고 때론 태연하게 때론 절박하게 고백한다. 힙합 모굴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패거리에 ‘기본으로’ 여성 래퍼 한 명 정도를(두 명은 다소 무리다) 더하는 것은 너무도 절묘한 구색맞춤으로 보인다. 따라서 최고의 여성 래퍼가 되기 위한 그녀들(만)의 치열한 경쟁은, 슬프게도, 이런 불평등적인 구조 하에서만 작동된다. 말하자면, 퍼프 대디(Puff Daddy)와 노토리어스 비아이지(Notorious BIG)의 전폭적 지지 하에 릴 킴(Lil Kim)이, 데프 잼(Def Jam)을 등에 업고 팍시 브라운(Foxy Brown)이, 매스터 피(Master P)를 후견인으로 마야 엑스(Mia X)가, 저메인 듀프리(Jermaine Dupri)의 열렬한 후원 아래 다 브랫(Da Brat)이, 1990년대 중반 이후 퀸 라티파(Queen Latifah)가 빠져나간 힙합 퀸의 자리를 놓고 다투어 온 것이다.

물론 이런 종속적 관계에서 완전히 예외적일 수는 없다 하더라도, 팀바랜드(Timbaland)의 여성 래퍼, 미씨 엘리엇(Missy (“Demeanor”) Elliott)과 러프 라이더스(Ruff Ryders)의 여성 래퍼, 이브 Eve (Of Destruction)는 음악을 컨트롤하는 자율적인 능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리고 섹슈얼리티 자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의도적으로 피한다는 점에서, 앞서의 여성 래퍼들과는 상대적으로 변별되는 정체성을 지녔다고 얘기할 수 있다. 특히 이브는 사운드나 래퍼로서의 스타일과 태도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DMX나 록스(Lox) 같은 러프 라이더스의 동료 남성 래퍼들에 못지 않은 ‘thug nigga’로서의 근성을 뽐내면서 동시에 ‘여성성(femininity)’ 또한 포기하지 않는 독특한 캐릭터를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여성 래퍼이다.

사실 2년 전의 데뷔 앨범 [Let There Be Eve… Ruff Ryder’s First Lady](1999)는, 러프 라이더스가 앨범 발매에 앞서 1년여 간 치밀하게 펼친 ‘이브 밀어주기 전략’이 무색할 정도로 그 자체로 빈틈없는 사운드로 무장된 우수한 앨범이었다. 모든 성공요소를 다 갖춘 이 데뷔 음반 덕분에 이 필라델피아 토박이 여성 엠씨는 단숨에 미씨 엘리엇의 라이벌로 치고 올라가게 되었고, 당시 가뜩이나 치열했던 팀바랜드와 러프 라이더스의 헤게모니 쟁탈전은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Eve는 다시 한번, 주류 힙합 혹은 흑인음악의 첨단 트렌드를 주도하는 프로듀서들, 게스트 뮤지션들과 함께 [Scorpion]이라는 당대의 교과서와도 같은 힙합 앨범을 만들어 내었다. 팀바랜드와 함께 랩 게임의 패러다임 변화를 주도해온 스위트 비츠(Sweet Beatz)가 전작에 이어 다시 메인 프로듀서로 나서고 그녀의 스승 닥터 드레(Dr. Dre)와 러프 라이더스의 테플런 디제이 샥(Teflon, DJ Shok)까지 가담했으니 일단 완벽하고 정교한 중독성 비트는 보장된다. 거기에 팀 동료인 DMX, 록, 드랙온(Drag-On)과 그웬 스테파니(Gwen Stefani), 다 브랫 등이 카메오로 나선다. 그렇다면 1집에서처럼 전체적으로 앨범을 균형있게 조율하는 그녀와 러프 라이더스 팀의 능력만 다시 한번 발휘된다면 이 앨범의 음악적, 상업적 성공은 명약관화하다.

첫 번째 싱글이기도 한 “Who’s That Girl”은 테플런 특유의 빠른 템포 위로 귀에 감기는 코러스와 그녀의 래핑이 조화를 이루는 라틴 팝 분위기의 매력적인 곡이다. 한편 닥터 드레와 스캇 스카치(Scott Storch) 콤비의 또 다른 수작, “Let Me Blow Ya Mind”는 그웬 스테파니의 달콤한 백업 보컬이 돋보이는 R&B 넘버인데, 아마도 확실한 후속 싱글이 될 것 같다. 하지만 [Scorpion]을 데뷔 앨범을 능가하는 음반으로 만드는 건 앨범 후반부에 숨어있는 트랙들이다. 특히 스티븐 말리(Stephen Marley)의 프로듀스 하에 대미언(Damian)의 코러스, 말리와 이브의 보컬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멜로딕한 댄스홀(dancehall) 넘버 “No No No”와, 백전노장 티나 마리(Teena Marie)의 호소력있는 소울픙의 보컬이 돋보이는 “Life Is So Hard”는 [Scorpion]에 다양성을 더하는 우수한 트랙들이다.

사실 이브의 래핑은 그녀와 경쟁적 위치에 있는 다른 스타급 래퍼들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깨끗하고 덜 자극적이라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앨범에서 이브의 직선적인 플로우(flow)는 그녀의 묘한 캐릭터 — ‘thug nigga’와 ‘여성성’이 혼재한 — 와 결합하여 새로운 매력으로 발산된다. 허풍적 태도는 적절한 수준에서 조절되고(“Thug In The Street”), 급기야 앨범의 마무리에 이르러서는 종교적 고해성사, 자아에 대한 성찰, 세상에 대한 감사까지 표현하기에 이른다(“Life Is So Hard”). 어차피 ‘thug nigga’만을 내뱉는 하드코어적 스타일과 태도가 이제는 진정한 흑인성과는 멀어진 하나의 상업적 코드일 뿐이라면, 더욱이 (DMX의 경우처럼) 점차 쇠락하는 상업적 코드라면, 이브의 절충적 스타일과 태도야말로 현재의 주류 힙합의 트렌드를 주도하기에 보다 적절한 대안이 아닐까 싶다.

비록 데뷔 앨범과 같은 충격적인 성공은 이루지 못했지만, [Scorpion]은 이변이 없는 한 당대 최고의 여성 엠씨이자 러프 라이더스의 간판스타로서 이브의 입지를 굳히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 같다. 물론 급격하게 변화하는 랩 게임의 트렌드 속에서 그녀와 러프 라이더스가 앞으로도 여전히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서 주체로서 살아남을지, 아니면 주도권을 상실하고 점진적으로 사라져갈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말이다. 20010417 | 양재영 cocto@hotmail.com

7/10

수록곡
1. Intro
2. Cowboy
3. Who’s That Girl?
4. Let Me Blow Ya Mind (featuring Gwen Stefani)
5. 3 Way (skit) (featuring Erex, Stevie J. & Eve)
6. You Had Me, You Lost Me
7. Got What You Need (featuring Drag-On)
8. Frontin’ (Skit)
9. Gangsta Bitches (featuring Da Brat & Trina)
10. That’s What It Is (featuring Styles Of The Lox)
11. Scream Double R (featuring DMX)
12. Thug In The Street (featuring The Lox & Drag-On)
13. No, No, No (featuring Damian & Stephen Marley)
14. You Ain’t Gettin’ None
15. Life Is So Hard (featuring Teena Marie)
16. Be Me (featuring Mashonda Tifr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