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귀에 도청장치 – Wiretap in My Ear – 이드 기획, 2001 음악적인 가능성보다 대중성 확보의 전략이 더 잘 보이는 데뷔작 한 달 전쯤에 케이블 TV를 보던 중 어떤 국내 밴드의 뮤직 비디오가 눈에 띄었다. 밴드가 연주하는 모습이 나올 때 배경이 되는 세트와 촬영 기법이 어느 외국 가수의 뮤직 비디오에서 본 것과 비슷해서 낯익은 느낌을 받았는데, 동시에 눈길을 끌었던 것은 자주 클로즈업되던 보컬의 모습이었다. 그의 독특한 화장과 의상, 헤어스타일 등을 보면서 이제 한국에도 본격적으로 일본식의 비쥬얼(visual) 밴드가 활약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밴드가 바로 ‘내 귀에 도청장치’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 귀에 도청장치는 1997년 초부터 홍대 앞 클럽 재머스(Jammers)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그들과 함께 활동하는 밴드들이었던 고스락, 청년단체와 함께 재머스 컴필레이션 앨범 [Rock 닭의 울음소리]에도 참여한 바 있는 밴드이다. 이들은 특이한 밴드명만큼이나 개성 있는 무대 매너로 알려졌는데, 언제부터인가 활동이 좀 뜸해지는 듯 싶더니 이런 ‘뜻밖의’ 뮤직 비디오를 들고 나온 것이다. 하지만 더욱 뜻밖인 것은 앨범이 발매되기 전부터 미리 뮤직 비디오를 공개해서 스스로를 홍보하는 방식이다. 인디 씬에서 활동하던 밴드의 메이저 데뷔작이라 할지라도 이 정도의 공격적인 홍보 전략을 사용하는 것은 의외의 모습이다. 이렇게 밴드를 대중적으로 알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음반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사운드는 전반적으로 세심하게 다듬어져 있어서 거칠게 느껴지는 부분이 거의 없다. 여기에 김경호의 “와인”의 작곡자로 알려져 있는 송재우의 참여는 결정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음반의 ‘뮤직 디렉터’로 소개되어 있는 그가 작곡한 곡들은 여타의 곡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드러날 정도의 대중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만든 “그대”나 “Y(아)”는 잘 만들어진 록 발라드 풍의 가요라 해도 무방하고, “추파(追播)”는 인기 있는 여가수가 부르면 더 잘 어울릴 만한 ‘깜찍한’ 곡이라 할 수 있으며, 앞서 언급했던 뮤직 비디오로 이미 발표된 “E-mail” 또한 대중적인 감각의 멜로디가 돋보인다. 반면 밴드의 자작곡들은 모두 기대 이하의 결과물들이다. 단적인 예로 “Hacker”에서는 “다 가둬 버릴 거야 뻔질나게 말만 하는 것들”이라면서 분노를 표현하고자 하는데 그런 감정을 제대로 전달해 줄만한 음악적인 무게나 위압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앨범의 마지막 곡인 “0(空)”은 비장한 분위기로 멋지게 피날레를 장식하고자 한 노래지만, 의도했던 만큼의 깊이 있는 사운드를 만들지 못하여 ‘오버’ 하는 듯한 인상을 줄뿐이다. 또한 이들의 자작곡들에서는 음악적으로 일정한 흐름이나 스타일을 찾을 수 없다. 아울러 음반에 동영상으로도 실린 “E-mail”의 뮤직 비디오는 결코 다시 보고 싶지는 않은 것이란 사실을 밝혀두어야겠다. 외국의 뮤직 비디오에서 그대로 옮겨온 듯한 영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누가 봐도 강한 개성의 소유자인 보컬의 이미지가 좀 지나칠 정도로 강조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의 이미지가 개인적인 취향에 가까운 사람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 뮤직 비디오가 밴드의 존재를 부각시키는데는 나름대로 성공적이었을지라도 대중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얻는데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가능성도 높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보았을 때 내 귀에 도청장치의 데뷔 앨범은 무엇보다 기획사의 적극적인 투자와 전략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덕분에 밴드는 일단 메이저에 진출하는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앞으로 진정한 의미의 ‘인기’를 얻게될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분명한 것은 외부의 영향력을 배제한 음악적인 능력 자체를 인정받기에는 아직 부족한 면이 많다는 점이다. 20010427 | 정훈직 seattle1@chollian.net 4/10 수록곡 1. Hacker 2. Give Me Shake 3. 그대 4. Love Is 5. E-mail 6. Y(아) 7. 추파(追播) 8. Why Can Not 9. Mother 10. Victory Netizen 11. 0(空) 12. E-mail (뮤직 비디오) 관련 사이트 ‘The Wiretap Scandal’이란 이름의 팬클럽. 단, 비회원은 글을 읽을 수 없음. http://cafe.daum.net/naegui ‘지하세계’에 소개된 내 귀에 도청장치 페이지. http://www.cyberunder.com/naegui.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