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36이병우 – 혼자 갖는 茶 시간을 위하여 – LG미디어, 1990 / Musikdorf, 2001

 

 

따뜻하게 자극하는 기타의 여백

‘텅빈 학교 운동장엔 태극기만 펄럭이고…’
이병우의 음악을 이보다 더 잘 나타내는 표현이 있을까. 그의 음악은 아주 오래되어 잊고 있던 따뜻하고 즐거운 기억에 대한 회상(回想)이자, 단조로와 지나치던 자잘한 일상(日常)에 대한 발견이다.

이병우의 앨범이 재발매 되었다는 사실(재발매’되었다기’보다는 재발매’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그가 직접 만든 레이블에서 발매했으니)이나, 1000석이 넘는 LG 아트센터에서의 이틀간 공연 티켓이 일주일전에 이미 매진되었다는 사실, 뒤늦은 언론의 뜨거운 관심까지 지금 뒤늦게 불고 있는 이병우 바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당황스럽지만 근 20년 동안 자신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꾸준히 지키고 있던 음악인에 대한 정당한 대우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4장밖에 안 되는 이병우의 정규 앨범 중 어느 하나를 꼽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주로 (굳이 분류하자면 초기작들인) 1집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 – 航海](1989)와 2집 [혼자 갖는 茶 시간을 위하여](1990)를 꼽게 된다. 그 이유는 1집과 2집에서 보여준 기타 중심의 단촐하고 목가적인 분위기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중 한 장만을 고르라면, 팻 메스니의 영향이 완연했던 1집보다는 잔잔함 속에서 울리는 작은 파장 같은 멜로디가 특징이었던 (조동익과의 듀오) 어떤 날의 음악과 가장 가까운 2집을 꼽게 된다. 그의 음악 대부분이 그렇지만 2집은 더욱 기승전결이 뚜렷하거나 튀는 곡이 없는, 앨범 제목 그대로 ‘혼자 갖는 茶 시간’ 을 위한 그런 음악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백그라운드 뮤직과 달리, 그의 음악은 어느새 귀를 기울이며 손을 놓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음반의 서두인 “집으로 가는 길”과 “혼자 갖는 茶 시간을 위하여”에는 클래식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클래식 기타의 고유한 피킹과 정교함을 엿볼 수 있으며, “잠들기 바로 전”과 “재회”에는 어쿠스틱 기타 특유의 가늘고 여린 음감들을 활용해 기타 하나만으로 풍부하면서도 여백이 느껴지는 공간감을 만들어 낸다(이 부분은 기타 신서사이저로 그 효과를 보여주었던 1집보다 더 성숙하고 깊어진 느낌을 준다). 이어지는 “텅빈 학교 운동장엔 태극기만 펄럭이고” 연작은 음반의 백미답게 기타와 오보에(oboe)의 섬세한 표현력을 펼치는데, 이는 청자로 하여금 어느새 귀를 기울이며 손을 놓게 만드는 마력을 발휘한다. 이병우 음악의 진수가 연주력이나 작곡능력이 아닌 청자의 감성을 따뜻하게 자극하는 표현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1집의 분위기와 흡사한 조금은 긴 시간의 곡들인 “비오는 날에 산보”와 “잔디에 누워”를 지나, 따뜻한 기타 신서사이저가 반갑게 느껴지는 “뭐가 그리 좋은지”까지, 이 음반은 그만의 정서가 가득한 음반이다. 이에 비하면, 3집은 가장 버라이어티한 구성이었지만 클래식과의 조화가 조금은 어색하고, 4집은 쉽게 귀에 들어오지 않는 편이다. 말하자면, 이 음반은 1집 때 짙었던 팻 메스니의 그림자도 줄어들고, 이병우를 아는 이라면 모두 그리워 할 어떤 날의 향기가 가장 많이 배어 있는, 포크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음반이다.

최근 이병우의 음악에 대한 뒤늦은 바람이 좋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에 그치지만은 않을 것 같다. 곧 그의 5집이 발매된다고 하는데, 5집은 (직접 부르지는 않겠지만) 보컬과 어우러진 음악이 될 것 같다는 소식이다. 그 주인공이 조동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날의 이병우를 잊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분히 기다릴만한 소식이 될 것 같다. 20010414 | 박정용 jypark@email.lycos.co.kr

8/10

수록곡
1. 집으로 가는 길
2. 혼자 갖는 茶 시간을 위하여
3. 잠들기 바로 전
4. 재회
5. 텅빈 학교 운동장엔 태극기만 펄럭이고 I
6. 텅빈 학교 운동장엔 태극기만 펄럭이고 II
7. 비오는 날에 산보
8. 잔디에 누워
9. 뭐가 그리 좋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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