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지금이 제3차 혹은 제4차 ‘브리티쉬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시기라고 주장한다면 ‘웬 호들갑에 주책’이냐고 핀잔을 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히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지난 1990년대 후반, 오아시스(Oasis)와 블러(Blur)의 비틀스적 미국 침투방식의 재현이 생각만큼 재미를 못 봤고, 프로디지(Prodigy)와 케미컬 브라더스(Chemical Brothers)의 테크노 공략도 미국 주류 시장의 전면적인 전복은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작년 하반기에 뜻밖에도 라디오헤드(Radiohead)의 [Kid A]가 이 곳에서 대박을 터트렸다는 사실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바이지만, 라디오헤드를 필두로 보다 내성적이고 보다 실험적인 일군의 영국 뮤지션들이 현재 미국 시장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모습은 아마도 예사로운 일은 아닐 듯싶다. 어쨌든 별다른 빅 뮤지션들의 공연이 없는 이맘 때, 본격적인 미국 시장 개척을 위한 진군의 나팔을 불면서 전미 순회 공연을 막 시작한 콜드플레이(Coldplay)와 도브스(Doves)가 일주일 간격으로 뉴욕을 찾아왔다. 배들리 드론 보이(Badly Drawn Boy)(이 친구의 뉴욕 공연도 5월초로 잡혀 있다)와 마찬가지로 작년 하반기에 앨범 한 장씩 들고 미국 시장에 성공적으로 착지한 이들은, 다소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평자들로부터 ‘Next Big Thing’으로 지목 받으며 점차 팬 층을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고민 끝에 (치사하지만) 가격이 약간 더 싼 도브스의 공연을 보러가기로 하고 표를 한 달 전에 예매했는데, 뒤늦게 이 친구들이 뉴욕 공연 다음 날에 NBC의 ‘Late Night with Conan O’Brien’ 쇼에 출연한다는 비보(?)를 들었다. ‘어차피 도브스가 TV에 나올 거라면 아예 콜드플레이를 보러 갈껄’ 하는 후회도 잠시 했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도브스에게 평소에 더 많은 점수를 주고 있었던지라 아쉬움을 떨치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9시가 넘어야 오프닝 밴드의 공연이 시작되겠지만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공연장인 바워리 볼룸(Bowery Ballroom)에 8시경에 일찌감치 도착하였다. 라운지에서 맥주 한 잔 하면서 공연을 기다릴 쯤에, 반갑게도 평소에 알고 지내는 제인 킴(Jane Kim)이라는 [CMJ]에서 일하는 코리언-아메리칸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작년에 [CMJ]가 맨해튼으로 이사할 때를 전후로 우연히 알게 된 이 친구는, 인사를 하자마자 최근에 몰려들어오는 영국 뮤지션들의 음악이 너무도 마음에 든다며 연신 호들갑을 떨었다(물론 “Oasis sucks!”도 빼놓지 않았다).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우리의 경우 굳이 음악을 따져서 듣는 편이 아니라면 영국과 미국의 대중음악은 보통 ‘영미권’ 팝 혹은 록 음악이라는 형태로 구분없이 포괄적으로 묶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영국 음악, 그리고 영국에서의 미국 음악은 엄연히 양자에게 본국의 음악과 엄격히 분리된 것으로 인식되어지며, 동시에 일종의 경쟁자이자 질시와 동경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그러기에, 미국과 영국의 평자들이나 음악 팬들이 상대 쪽의 떠오르는 스타 뮤지션들에 대해 보다 노골적으로 이국적인 동경과 열광적 지지를 보내는 것이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것이려니 하는 생각도 해본다. 9시 20분 쯤에 오프닝으로 익명의 5인 밴드가 먼저 무대에 나왔다(사실 익명이라기보다는, 필자의 귀가 그들의 소개 멘트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30여분간 펑크, 스카, 로커빌리가 가미된 직선적이고 시원스러운 록 음악을 선보였는데, 의외로 공연장을 꽉 채운 젊은 백인 관객들의 귀를 별로 사로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소 어수선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막판에 다행히도 (혹은 일부러 그랬는지 몰라도) 리드 보컬이 드럼 세트와 부딪혀 나뒹굴면서 공연장은 열광(?)의 분위기로 반전되었다. 이 친구들의 공연이 끝나고, 늘상 그렇듯이 다음 뮤지션을 위한 장시간에 걸친 새로운 사운드 세팅이 시작되었다. 같이 간 친구와 40여분간 시끌벅쩍한 분위기에서 다시 맥주 한 잔 하면서 기다리고 있으니, 드디어 10시 30분에 도브스가 무대에 나왔다. 3명의 멤버 외에, [Lost Souls]에 참여했었던 마틴 레벨스키(Martin Rebelski)가 건반 주자로 함께 무대에 올랐다. 무대의 세팅은 작년에 봤던 플레이밍 립스(Flaming Lips)나 루퍼(Looper)의 그것과 비슷하였는데, 즉 뒤쪽 벽에 마련된 대형 영상에서는 각각의 곡에 맞춰 의도된 내용의 (정신을 쏙 빼 놓는) 비디오가 상영되고, 무대에서는 밴드가 어두우면서도 변화무쌍한 조명 하에 퍼포먼스(연주)를 행하는 식이었다. 이는 다소 싸이키델릭한 록 음악을 연주하는 뮤지션들의 최근 공연에서 늘상 목격하는, 일종의 트렌드라 할 수 있다. 첫 곡인 “Firesuite”를 시작으로 그들은 50여분간 10곡의 연주를 쉬지 않고 들려주었다. “NY”를 제외하면 나머지 곡들은 모두 [Lost Souls]에 들어있는 곡들이었는데, 앨범으로 듣는 것보다 훨씬 헤비한 느낌의 연주들을 들려주었으며, 시종일관 별다른 실수를 발견하기 힘든 빈틈없는 사운드를 제공하였다. 앤디 윌리엄스(Andy Williams)의 정확하면서 힘있는 드러밍도 좋았고, 그의 쌍둥이 형제 제즈(Jez)의 싸이키델릭하면서 리듬감 넘치는 기타도 안정감이 있어 보였다. 물론 어쿠스틱과 일렉트릭을 오가던 프론트맨 지미 굿윈(Jimi Goodwin)의 기타가 때때로 약간 겉도는 느낌을 주었고 그의 보컬 역시 다소의 불안감을 간혹 주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한편으로 이들의 음악이 대체로 일렉트로닉한 사운드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는 편견 때문인지 몰라도 건반주자 레벨스키와 발코니의 사운드 엔지니어들의 부지런한 손놀림도 유독 눈에 들어왔다. 사실 “Catch The Sun”과 같은 흥겨운 넘버를 연주할 때를 제외하면, 아무래도 앨범에서처럼 전반적으로 내성적이고 사색적인 경향이 강한 사운드여서인지 몰라도, 공연장은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이는 이들의 연주가 지루해서라기보다는, 관객들이 음악에 진지하게 몰두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실 이 날의 연주는, 앨범에 있는 곡들의 기본적인 이미지는 유지하면서도 전형적인 록 밴드의 포맷으로 이들 곡을 다소 빠른 템포와 보다 로킹한 사운드로 표현함으로써, 훨씬 더 강한 호소력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어 보였다. 이들은 “Rise”, “Seasong”, “Break Me Gently”로 이어지는 전반부의 곡들을 보다 강력한 록 넘버로 전환시켜 청중들을 압도하고자 하였고, “The Man Who Told Everything”이나 “Lost Souls” 같은 곡들을 통해서는 때론 침잠하다가 때론 기타, 건반, 드럼, 보컬이 일시에 점강하는 방식의 연주로 관객들을 몰아의 경지로 이끌고자 하였다. “Cedar Room”을 끝으로 이들이 무대 뒤로 들어가자 역시 차분하지만 끈질긴 앙코르 요청이 이어졌고 잠시 후 예상했던 대로 멤버들이 다시 무대에 올라왔다(사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안면에 철판 깔고 사운드 엔지니어 한 명에게 찾아가서 오늘 공연 트랙 리스트를 말해 줄 수 있냐고 물어봤었는데, 이 친구는 그 바쁜 와중에 친절하게도 앵콜곡 둘까지 총 12곡의 리스트가 적혀있는 종이를 내게 보여주었다). 앵콜곡은 “Here It Comes”와 “Spaceface”였다. 건반이 인상적인 첫 번째 곡, “Here It Comes”에서는 쭉 드럼 세트에만 앉아 있던 앤디가 프론트에 나서 우수에 찬 매력적인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지미가 자리를 바꿔 드럼을 쳐주었다. 그리고 두 번째 앙코르 곡이자 마지막 곡, “Spaceface”는 앞서 연주된 다른 곡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강력한 인스트루멘틀 연주였는데, 트윈기타와 건반, 드럼이 처음부터 끝까지 빠른 스피드로 휘몰아치는, 이날의 곡 중에서 단연 가장 파괴력 있고 그루브감 넘치는 사운드였다. 사실 이 두 곡은 도브스 자신들에게는 의미가 깊은 노래들이다. 알다시피 도브스의 멤버들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를 애시드 재즈와 ‘댄서블(danceable)’한 록 음악과 함께 거쳐온 전형적인 맨체스터 키즈(Manchester kids)였다. 간혹 그들의 서브 서브(Sub Sub) 시절의 댄스 플로어용 히트 넘버들을 가지고 아직도 시비 거는 이들이 있지만, 당시 트리키(Tricky)와 공동작업으로 세상에 내놓은 “Smoking Beagles” 같은 곡은 무시할 수 없는 그들의 음악적 잠재력을 일부분이나마 보여주었고, 특히 “Spaceface” 같은 곡은 “Ain’t No Love (Ain’t No Use)” 같은 댄스 넘버만이 그들의 전부가 아님을 입증해 주고도 남는 빼어난 곡이었다. 그리고 전화위복이었는지 몰라도 불운한 사고로 서브 서브 시절을 끝내고 와신상담 도브스로의 새 출발을 하면서, 실력 있는 브릿팝, 록 밴드로서 그들의 이름을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릴 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곡이 바로 “Here It Comes”였다. 그러기에, 비록 관객들이 이 곡들에 담긴 의미를 알든 모르든 간에, 이제 모국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새롭게 미국의 음악시장에 진출하는 시점에서 이 곡들은 도브스 자신들에게는 남다른 감회를 부여해 주는 것 같았다. [Lost Souls]는 우수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앨범을 쭉 듣고 있노라면 간혹 전체적으로 정리가 안 된, 다소 산만한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즉, 다양성과 실험에 대한 집착이 이 앨범을 일관성과 집중력이 떨어지는 음반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이날 공연에서 도브스는 전체적으로 훨씬 더 정통적인 록 밴드의 포맷과 사운드로 일관하면서 다양한 사운드적 실험들을 효과적으로 흡수함으로써 보다 분명하게 자신들의 색깔을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다. 아마 이번 미국 순회공연은 공연장을 찾은 미국의 팬들에게 도브스라는 영국 밴드의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데 있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곳에서 늘상 붙어 다니는 ‘라디오헤드의 아류’라는 식의 딱지를 떼기 위해서는 단순히 공연장에서의 로킹한 사운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결국 그들의 차기 앨범 혹은 프로젝트들이 어떤 결과물들로 나오느냐에 따라 그들의 미래는 판명이 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비록 선봉에 서 있지는 못하더라도, 도브스가 배들리 드론 보이 혹은 콜드플레이 등과 함께 현재 미국 내에서 새로운 영국음악 열풍을 주도할 다크호스임에 틀림없다는 점이다. 20010310 | 양재영 cocto@hotmail.com Doves in New York (2/28, Bowery Ballroom) Set List 1. Firesuite 2. Rise 3. Seasong 4. Break Me Gently 5. Catch The Sun 6. The Man Who Told You Everything 7. Lost Souls 8. A House 9. NY 10. Cedar Room 앵콜곡 11. Here It Comes 12. Spaceface 관련 글 Doves [Lost Souls] 리뷰 – vol.2/no.21 [20001101] 관련 사이트 Doves 소속 레이블인 Astralwerks 공식 사이트 http://www.astralwerk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