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쯤부턴가, 홍대 앞 인디 씬과 일부 음악 매니아들을 중심으로 서정적이고 섬세한 감성으로 빚어진 음악들이 잔잔한 인기를 모아왔다. 그 무렵부터 벨 앤 세바스찬(Belle & Sebastian), 엘리엇 스미스(Elliott Smith), 레드 하우스 페인터스(Red House Painters), 마그네틱 필즈(Magnetic Fields) 등의 음악이 주목을 끌었고, 챔버 팝, 포크, 슬로코어, 새드코어, 이모코어 등의 낱말들이 떠다녔다. 어쿠스틱 기타가 주도하는, 때에 따라서 신서사이저를 소박하게 활용하는, 앰프 볼륨을 낮춘 음악들이 한국 인디 씬 한 켠을 장식하는 일이 뒤따랐다. 그 과정에서 2000년 9월 마크 코즐렉(Mark Kozelek)의 공연은 인상적이었지만, 한국 뮤지션의 공연이 인상적이었던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1999년 포크 리바이벌 붐? ‘한국 포크 30주년’ 같은 어마어마한 타이틀을 내세우지 않고 동시대 흐름과 접속했더라면 중년의 노스탤지어에 소구하는 미디어 이벤트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2001년 3월, 인상적인 공연을 만났다. 토마스 쿡과 루시드 폴의 합동 공연이 그것이다. 공연 당일(3/3) 내내 내리던 비는 오후부터 눈보라로 바뀌었다. 공연장에 지각 입장하여 둘러보니,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리 크지 않은 공연장에 100여명이 넘는 관객들이 가득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분위기는 따뜻했다. 막 데뷔 음반을 발매한 토마스 쿡(정순용)과 루시드 폴(조윤석)의 조인트 공연은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비슷한 성향의 새 음악들을 내놓은 인디 밴드 출신의 솔로 프로젝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저녁 7시 경에 시작해서 9시 40분 경에 끝난 이 날 공연은 토마스 쿡이 1부를, 루시드 폴이 2부를 각각 꾸미고, 이들 두 명과 게스트가 합세하여 3부로 마무리짓는 구성이었다. 공연의 분위기를 요약하자면, 어쿠스틱 기타와 보컬이 주도하는 서정적이고 차분한 음악, 소박한 무대와 사운드 편성, 간간이 나온 유머와 웃음이었다. 홍대 앞 클럽에서 그런 분위기의 공연을 본다는 게 그리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생소하고 새로운 공연은 아니었다. 이 날 공연은 한편으론 같은 장소에서 지난 해 9월 열렸던 마크 코즐렉 공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구석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론 (이제는 좀 쇠락한 감이 있는) 대학로 소극장 공연들과 유사한 정서도 있었다. 비유하자면, ‘마크 코즐렉 공연과 대학로 소극장 공연의 결합’이랄까. 1부를 꾸민 토마스 쿡(정순용)은 마이 앤트 메리 시절과는 퍽 다른 분위기를 선보였다. 어떤 날을 연상시키는 “다시 비가 내리네”로 시작해 트래비스(Travis)의 “Turn”으로 끝맺은 그는 “내려오는 길”만을 제외한, 신보 [Timetable]에 담긴 모든 곡을 연주했다. 마이 앤트 메리도 사실 아주 쎈 음악을 들려주던 밴드는 아니었지만, 어쿠스틱 기타 연주와 서정적인 노래 중심의 토마스 쿡 음반은 예상 밖이었다. 음반과 마찬가지로, 토마스 쿡은 안정된 노래와 연주를 들려주었다. 특이한 것은 그의 입심이 거의 개그맨 수준이었다는 것, 그래서 거의 노래 반, 멘트 반이었다는 것. 언플러그드 형식의 공연이라서, 한 명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고 어떤 면에서 지루할 수도 있는 형식이었는데, 그는 노래 사이사이 재담으로 분위기를 풀어가면서 진행했다. 그래서 그가 클럽이 아니라 소극장에서 일반 관객들을 대상으로 공연을 가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위저(Weezer)의 “Butterfly” 리메이크가 그와 잘 어울렸던 반면, 스위트피가 게스트로 나와 일렉트릭 기타 연주를 해준 “Turn” 리메이크는 아쉬음이 남았다. 차라리 루시드 폴이 리메이크했더라면 어울렸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토마스 쿡은 다소 어색해했지만 마이 앤트 메리 시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무난하게 연출했다. 다만, ‘졸라’ 같은 거리낌없는 표현이 섞인 유머를 서정적인 노래의 분위기와 어떻게 조화시켜나갈지는 문제로 남았다. 루시드 폴(조윤석)의 2부 무대는 토마스 쿡보다 더 여리고 고운 음악으로 꾸며졌다. 문학을 좋아하는 착한 대학생 이미지의 루시드 폴은 어쿠스틱 기타와 클래식 기타를 바꿔가며 노래했다. 그는 “새”로 시작해 “나의 하류를 지나”까지 셀프 타이틀 음반에 담긴 6곡과 리메이크 곡 3곡을 포함, 총 9곡을 노래했다. 고기모, 이한철, 이소림 등이 게스트로 나와 세션을 해주었다. 이소림의 오보에 세션이 곁들여진 에브리싱 벗 더 걸(Everything But The Girl)의 “Fascination”은 원곡의 라이브 버전과 흡사한 리메이크였고, 이한철의 일렉트릭 기타를 곁들인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의 “Goodbye To Romance” 리메이크는 의외의 선곡이었다. 이미 음반 발매 쇼케이스 공연에서 보여준 바 있듯, 루시드 폴의 무대는 미선이 시절의 연장선상에서 좀더 차분하고 포크적인 색채를 강화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무대가 어떤 사람에게는 지루할 수도 있다는 점은 당장은 아니라도 생각해볼만한 꺼리일 듯싶다. 이 날의 주요 게스트와 주인공이 무대를 가득 채운 3부는 정적이던 공연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먼저 토마스 쿡과 루시드 폴이 등장해 각자 밴드 시절의 히트곡 “Sunday 그리고 Seoul”과 “Sam”을 들려주었다. 즉석에서 서로 상대방의 노래 중에 하나를 청하고 노래한다는 설정은 상투적 각본이라서 보기 민망했지만, 그들의 노래만은, 짧지만 벌써 다섯 살의 나이를 먹은 홍대 앞 인디 씬에 대한 기억 혹은 단상들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하이라이트는 각자의 노래를 바꿔서 부른 그 다음부터였다. 스위트피, 루시드 폴, 이한철, 토마스 쿡이 무대 앞쪽에 나란히 의자에 앉아 노래와 연주를 했는데, 스위트피는 “진달래”(미선이), 루시드 폴은 “챠우챠우”(델리 스파이스), 이한철은 “강릉에서”(마이 앤트 메리), 토마스 쿡은 “Fever”(불독맨션)를 노래했다. 준비가 부족했던 이한철이 다소 버벅거렸다면, 토마스 쿡은 이 날 공연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었다. “Fever” 자체가 워낙 훵키한 흥겨움을 가진 곡이기도 하지만, 토마스 쿡은 물만난 물고기처럼 생기있게(이한철 흉내도 내면서) 노래했고 4명 모두 열정적으로 기타를 합주하면서 무대와 객석 모두 들썩이게 했다. 이글스(The Eagles)의 재결합 공연([Hell Freezes Over])에서의 “Hotel California”나 테슬라(Tesla)의 [Five Man Acoustical Jam] 같이, 비디오나 DVD에 담긴 언플러그드 공연 장면을 떠올린 관객들도 많았을 것이다. 가창력과 기타 연주력 모두 안정적인 토마스 쿡, 여린 음색의 보컬과 섬세한 기타 연주가 돋보이는 루시드 폴의 합동 공연은 많은 가능성을 남겼다. 가죽 점퍼 차림에 열정적인 연주를 한 토마스 쿡은 남성적인 이미지, 니트와 재킷 차림에 꼼꼼한 연주를 한 루시드 폴은 여성적인 이미지로 대조적이었지만, 이들의 다른 듯 닮은 정서의 음악은 하나의 시공간에서 잘 어울렸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들은 경쟁 관계에 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인디 레이블을 통해, 어쿠스틱 기타에 기반한 포크 음반을 발표했고, 비평적으로 또 판매량에 있어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이날 함께 공연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음반 발매 기념 쇼케이스 공연도 함께 벌여나가고 있다. 오는 3월 24일(토요일) 1시에 교보문고 핫트랙스 매장에서 쇼케이스 공연이 예정되어 있기도 하다. 다른 레이블 소속의 뮤지션이 이렇게 함께 공연을 하고 홍보에 보조를 맞추는 것은 고무적이다. 비슷한 성향과 정서를 보이는 음악이기에 아귀가 맞는 측면도 있지만, 어쨌든 그 때문에 일부에서나마 화제가 되고 주목을 받게 된 점은 홍보 역량에서 절대 열세에 있는 인디 레이블/뮤지션 입장에게 좋은 참고 사례가 될만하다. 실제로 루시드 폴과 토마스 쿡은 인디 음반으로서는 오랜만에 판매 호조를 보이고 있고, 공연 이후 신촌 및 홍대 앞의 음반점에는 이날 출연진의(밴드 시절도 포함해서) 음반을 찾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합동 공연과 공동 홍보라는 게 생각해보면 별로 특이하달 것 없는 기획이지만, 평범함 속에서 연 돌파구로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Fever”가 가장 인상적인 노래였다면, 이날의 멘트 중에서는 게스트로 나온 스위트피(김민규)가 한 말이 기억에 남았다. “토마스 쿡과 루시드 폴이 취향이나 이런 게 비슷한 게 많아서 같이 자리를 하면 참 좋을 것 같다고 서로 앨범 내기 전에 얘기했는데, 결국엔 이렇게 이루어지게 되어서 좋은 것 같아요. 늘 힙합만 모여서 같이 뭐 하고, 하드코어만 모여서 뭐 하고, 펑크만 모여서 뭐 하고… 우리도 있다구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특유의 멋쩍은 웃음을 지었고, 작은 공연장은 한 순간 관객들의 웃음소리로 넘실거렸다. 가벼운 농담조였지만, 그날 공연의 의미를 상징하는 대목이었다. 20010316 | 이용우 djpink@hanmail.net 사진 제공: 한유선(Radio Music), 문라이즈 일시: 2001년 3월 3-4일 장소: 서울 홍대 앞 쌈지 스페이스 ‘바람’ 게스트: 스위트피, 이한철 Set List (3/3) 1부: 토마스 쿡 1. 다시 비가 내리네 2. 동물원 3. Butterfly (Weezer) 4. 홍대로 가는 택시 5. 파도타기 6. 내 모습 7. 목동의 노래 8. 새로운 아침 9. Turn (Travis) 2부: 루시드 폴 1. 새 2. 은행나무 숲 3. London, Can You Wait (Gene) 4. Goodbye To Romance (Ozzy Osbourne) 5. 해바라기 6. Fascination (Everything But The Girl) 7. 풍경은 언제나 8. 너는 내 마음 속에 남아 9. 나의 하류를 지나 3부: 토마스 쿡, 루시드 폴, 스위트피, 이한철 1. Sunday 그리고 Seoul – 토마스 쿡 2. Sam – 루시드 폴 3. 진달래 (타이머) – 스위트피 4. 챠우챠우 – 루시드 폴 5. 강릉에서 – 이한철 6. Fever – 토마스 쿡 관련 글 토마스 쿡 [Timetable] 리뷰 – vol.3/no.5 [20010301] 컬티즌 News & Preview – 토마스 쿡 [Timetable] 리뷰 마이 앤트 메리 [My Aunt Mary] 리뷰 – vol.2/no.2 [20000116] 아마추어 밴드에서 프로페셔널 밴드로: 마이 앤트 메리 인터뷰 – vol.2/no.4 [20000216] 루시드 폴 [Lucid Fall] 리뷰 – vol.3/no.5 [20010301] 미선이 [Drifting] 리뷰 – vol.2/no.22 [20001116] 인디의 변방의 목소리, 서정주의를 찾아서 – vol.2/no.22 [20001116] 관련 사이트 쌈넷에서 찍은 토마스 쿡 & 루시드 폴 합동 공연 동영상 마이 앤트 메리 팬 사이트 http://www.myauntmary.wo.to 문라이즈 레이블 사이트 http://www.moonrise.co.kr 루시드 폴 공식 사이트 http://lucid-fall.ssamnet.com 라디오 뮤직 사이트 http://www.radio-musi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