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131050343-daytripper데이트리퍼 – 수집가 – 드림비트, 2001

 

 

거친 질감으로 그려진 소리의 사색, 호기심

레코드 가게에서 처음 이 앨범을 집어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내 머리 속에는 언니네이발관이 떠올랐다. 아마도 앨범 표지가 주는 느낌 때문이었을텐데, 사실 데이트리퍼의 유일한 멤버인 류한길이 언니네이발관의 창단 멤버였고, 그들의 2집 앨범 작업에 참여하면서 표지 디자인을 맡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처럼 그의 공개적인 음악적 경력은 1990년대 중반 홍대앞에 인디 씬이 형성될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는 1997년부터 전자악기를 통한 자신만의 새로운 소리 여행을 시작한다. 데이트리퍼라는 이름으로.

이후 클럽과 레이브 파티에서의 공연과 컴필레이션 앨범 참여를 통해 유망한 테크노 뮤지션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 앨범은 이런 데이트리퍼의 첫 번째 정규 앨범이다. 물론 앨범 [techno@kr](1999)와 [PLUR2 – Rendezvous](2000)에 이미 소개된 바 있는 “호밀밭”과 “낡은 타자기”도 여기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수록곡인 “수증기”와 “Submission”에서는 언니네이발관과 트랜지스터헤드가 함께 했다. 그밖에 최재혁, 이아립, 이승기, Niddle 등의 이름을 앨범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표지가 주는 허름한 느낌과 ‘수집가’라는 앨범 제목은 다른 테크노 앨범들의 말쑥하고 세련된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 이에 걸맞게 앨범은 낯선 곳을 찾아 떠나는 호기심과 흥분을 전해준다. 학창시절 방학 때 놀러갔던 어느 시골집에서 본 낡은 사물들, 그리고 거기서 깨닫게 되는 새로움 감정 등 누구나 겪어봤음직한 주변의 경험을 이 앨범은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느린 발자국”과 “냉정한 수집가”의 오래된 피아노 소리로도, “낡은 타자기”의 탁탁거리는 타자기 소리로도, 혹은 “호밀밭”의 지글거리는 노이즈로도 가능하다. 귀를 활짝 열어놓고 상상력을 맘껏 동원한다면 거칠고 투박한 사운드 속에서 많은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반복과 변주라는 테크노의 공식은 여기서도 유효하지만, 음원들이 많고 변화가 꽤 심하며 곡의 길이는 짧은 편이다. 그리 빠르지 않은 템포에 베이스 드럼을 비롯하여 저음의 묵직한 비트가 선호되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래서 테크노가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쉽게 익숙해질 수 있다. 가령 “호밀밭”은 심장박동 같은 소리로 시작해 몇 가지 비트가 포개지면서 점차 복잡한 리듬으로 발전해가며, 여기에 노이즈 가득한 선율이 얹혀지고 대선율과 세분된 비트에 호응한다. 역동적으로 전개되는 사운드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마치 꿈틀거리고 삐걱거리는 존재가 기어나올 것만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또한 “낡은 타자기”는 앰비언트에 브레이크비트가 결합된 곡으로 생동감있게 변하는 음원과 비트가 인상적이다. 중간중간에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도 들리는데, 어쩌면 영화 [Naked Lunch]나 [Barton Fink]에서 영감을 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공연장에서 데이트리퍼를 봐왔던 사람이라면 역동적이고 다양한 소리의 스펙트럼과 특유의 노이지한 거친 질감을 인상적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렇지만 인색하게 굴자면 앨범에는 이런 개성이 ‘전면적으로’ 구현되어 있는 것 같지 않다. 첫 앨범에 대한 조심스러움이었는지 아니면 나의 기대가 지나치게 컸던 탓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러 동료들의 도움이 오히려 앨범의 색깔을 다소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언니네이발관의 곡을 리믹스한 것 같은 “수증기”와 앨범에서 유일하게 댄서블한 트랙인 “Submission”, 빅비트의 흥겨움이 살아있는 “갑자기 바빠진 수집가(NDL Sunnyside Mix)”는 곡 자체의 좋고나쁨을 떠나 앨범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물론 데이트리퍼의 거칠고 투박한 사운드는 살아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국내에 처음으로 본격적인 테크노 라이브를 선보인 1세대 뮤지션으로서 그의 신고식은 보기 드문 성과인 것만은 분명하다. 특정한 스타일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소리 자체의 가능성에 몰두하는 그의 진지한 태도가 앞으로 더 많은 결실을 맺기를 기대한다. 20010130 | 장호연 bubbler@naver.com

7/10

수록곡
1. 느린 발자국
2. 낡은 타자기
3. 갑자기 바빠진 수집가
4. 수증기 – feat. 언니네이발관
5. 호밀밭
6. 굳어버린 수집가
7. Submission – feat. Transistorhead
8. 냉정한 수집가
9. 오후 4시
10. 말다툼
11. 갑자기 바빠진 수집가(NDL Sunnyside Mix)
12. 수증기 – feat. 언니네이발관 (Radio Mix)

관련 글
트랜지스터헤드 [Housology] 리뷰 – vol.2/no.8 [2000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