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131045931-sigurrosSigur Ros – Agaetis Byrjun – Fat Cat, 2000

 

 

아이슬랜드에서 온 광활한 슈게이징의 파노라마

<하나>에서 나온 우리는 <둘>이다. A에서 나온 우리는 B안에 있다. 우리는 이원성의 세계에 살면서 통일성, 즉 모든 것의 출발점인 알레프를 그리워하고 나아가 그것을 추구한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개미] 제2권에서

탯줄을 부여잡고 기도를 드리는 태아(혹은 외계인)의 모습을 한 재킷의 앨범 [Agaetis Byrjun]은 작년 영미권에 소개되면서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아마 작년 늦가을부터 국내에서도 서서히 소문으로 떠돌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된다. 제목부터 읽기조차 만만치 않은데 ‘Good Start’라는 의미의 이 앨범은 바로 아이슬랜드에서 온 4인조 밴드 시규어 로스(Sigur Ros)의 두 번째 앨범이다. 아이슬랜드에서는 1999년에 발매되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들은 이듬해 초 아이슬랜딕 뮤직 어워드에서 5개 부문을 수상함으로써 일약 국민 밴드로 떠올랐다고 한다. 1999년 10월, 이들의 EP [Svefn-G-Englar]가 처음으로 해외에 소개되었고, 영국의 음악잡지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NME)’에서 호평을 받아 이들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문제의 이 앨범은 2000년 Fat Cat 레이블을 통해 해외에 발매되어 많은 인디 록 팬들을 매료시켰다(어떤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이들은 작년 여름 일본에서도 수차례 공연을 가진 것으로 되어있다). 한 인디 음악 전문 사이트는 2000년 한해를 결산하며 베스트 음반을 선정하는 자리에서 이 앨범을 2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사실 생소한 이름의 밴드를 처음 접할 때 우리는 어느 정도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시규어 로스의 경우 아마도 아이슬랜드 출신이라는 배경이 가장 먼저 작용할 텐데, 사실 우리는 아이슬랜드라는 나라에 대해 지구상 가장 추운 나라에 속한다는 것, 브욕(Bjork)이라는 독특한 개성을 가진 뮤지션의 고향이라는 것 외에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혹독한 추위에서 기인하는 투명함과, 잘 알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갖는 신비함은 이 앨범을 듣는 내내 따라다닌다. 현악기와 기타 노이즈, 키보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중층적인 음향은 천상의(ethereal) 보컬과 결합되어 기존의 모든 경계를 허물어 버릴 듯한 모호한 이미지를 안겨준다. 빙하기에서 깨어난 세상의 모습이 이러할까.

기본적으로 드림팝/슈게이징의 문법을 따르고 있는 이들의 음악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한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어떤 말로도 쉽게 포착하기가 어렵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이들 음악의 이미지만큼이나 이를 포착하려는 시도 역시 추상적인 어구의 나열로 그치기 쉽다. 다만 평온하고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낯선 공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는데, 이처럼 친숙함과 낯설음의 병존은 모든 것의 출발점이면서 돌아갈 수 없는 근원적인 무언가로 향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앞서 표현한 재킷으로 미루어보건대 아마 시규어 로스는 자궁을 표상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밴드의 리더인 욘시 비르기슨(Jonsi Birggisson)이 만들었다는 호프랜딕(Hopelandic)이라는 언어는 그가 복원하고 싶어하는 유아기의 언어일지도 모른다.

콕토 트윈스(Cocteau Twins)의 퇴행적 언어를 넘어 라깡의 상상계로까지 이어지는 이런 복잡한 생각을 버리고 음악에 몰두하면, 앨범은 전체적으로 한편의 교향곡 같은 완결된 구조를 보여준다. 짤막한 인트로에 이어 황량한 바람 소리로 시작하는 “Svefn-G-Englar”는 메아리처럼 되풀이되는 보컬과 키보드 소리로 몽환적인 사운드를 펼쳐놓는다. 이어지는 “Staralfur”는 현악기 반주로 보컬이 편안하게 노래되는데, 영롱한 천상의 분위기에 이따금 합창과 불길한 노이즈가 끼어든다. 이런 불길함은 이제 “Flugufrelsarinn”에서 좀더 발전되고 “Hjartao Hamast (Bamm Bamm Bamm)”에 오면 극대화된 모습을 보인다. 전환을 맞는 것은 “Vioar vel tl Loftarasa”에서이다. 마치 대격변 이후 황폐해진 땅위로 새로운 생명이 꿈틀거리듯 서서히 고조되어 가는 곡은 결국 화려한 오케스트라 연주로 절정을 맞는다. 이어 둥둥거리는 기타와 공간감 있게 울리는 천상의 보컬, 그리고 인상적인 선율을 가진 “Olsen Olsen”은 앨범에서 가장 쉽게 친숙해질 수 있는 곡이다. 마지막으로 71분에 달하는 앨범의 긴 여정을 마무리하는 “Avalon”은 오케스트라 연주곡으로 대작 영화의 피날레를 보는 듯한 장엄함과 비장함을 담고 있다.

앨범의 모든 곡이 쉼없이 이어지며 평균 7-8분을 간단히 넘기는 곡 길이에 사용된 악기 또한 만만치 않다. 하지만 미리 골치 아픈 난해한 음악이라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다. 소리에 몰입하다보면 어느 순간 거기에 익숙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이 앨범이 아이슬랜드에서 온 낯선 밴드의 앨범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아이슬랜드 국민들이 어떤 감수성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앨범은 자국 내에서 큰 히트를 기록했다지 않은가. 20010130 | 장호연 bubbler@naver.com

8/10

수록곡
1. Intro
2. Svefn-G-Englar
3. Staralfur
4. Flugufrelsarinn
5. Ny Batteri
6. Hjartao Hamast (Bamm Bamm Bamm)
7. Vioar vel tl Loftarasa
8. Olsen Olsen
9. Agaetis Byrjun
10. Avalon

관련 글
아발론 천족(天族)들이 들려주는 실락원 비가 – 문화웹진 [컬티즌] http://www.cultizen.co.kr/look/preview_main.htm?Preview_code=165

관련 사이트
시규어 로스 홈페이지
http://www.sigur-ros.com

Fat Cat 레이블 공식 사이트
http://www.fat-cat.co.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