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1130092633-ferryBryan Ferry – As Time Goes By – Virgin 1999 (국내발매는 EMI Korea, 2000)

 

 

글램 록의 정서로 빚어낸 재즈의 여운

전설처럼 전해지는 글램 록,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절. 그 시대를 풍미했던 제네시스(Genesis)와 록시 뮤직(Roxy Music)이라는 두 그룹은 참 비슷한 면을 갖고 있다. 같은 장르로 동시대를 풍미했다는 가장 큰 공통분모 외에도 많은 멤버들을 교체하면서 뛰어난 뮤지션을 길러낸 양성소였다는 점, 초기의 실험적인 프로그레시브 성향에서 후기에는 고급스런 대중 음악으로 변화했다는 음악여정까지… 하지만, 이들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대목은 밴드의 역사를 이끌던 두 명의 멤버이다. 제네시스의 필 콜린스(Phil Collins)와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 록시 뮤직의 브라이언 페리와 브라이언 이노(Bryan Eno). 모두들 아직까지도 왕성한 음악 활동을 펼치며 음악계에 일정 수준 이상의 영향력을 갖고 있는 아티스트들이다. 변함없이 실험적이며 진보적인 음악 성향을 유지하고 있는 피터 가브리엘을 브라이언 이노와 비교한다면, 브라이언 페리는 필 콜린스와 비교하는 것이 좀 더 적절하겠다. 물론, 필 콜린스가 보여준 팝 가수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영역을 보여주지만 말이다.

브라이언 페리의 이전 솔로앨범들인 [Boys And Girls]나 [Manouna]에서도 특유의 로맨틱한 정서를 유감없이 보여주어 놀랄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번 앨범은 많이 나간 경우이긴 하다. 오늘 소개할 앨범 [As Time Goes By]는 말 그대로 재즈앨범이기 때문이다. 재즈의 명곡들을 팝 가수들이 해석한 예는 발에 치일 정도로 넘치지만, 이 앨범이 빛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은은한 현악 반주를 배경으로 처연히 깔리는 관악기는 쳇 베이커(Chet Baker)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며, 몇몇 곡에서 느껴지는 스윙감은 빅밴드 이상의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큰 매력은 글램 록의 폐쇄적인 아름다움에 여전히 도취되어 있는 그의 보컬이다. 한없이 단조롭고 느슨한 그의 보컬은 역설적으로 강한 긴장감과 카타르시스를 주는 효과를 낸다.

물론, 깊숙이 묻혀있던 이 음반이 빛을 보게된 것은 역시나 음악외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영화 [화양연화]의 예고편에 흘러나왔던 “I’m In The Mood For Love”가 바로 문제의 곡이었던 것. 하지만 아쉽게도 “Happy Together”([해피 투게더])나 “Dreams”([중경삼림]) 같은 극적인 상황은 기대하기 힘들 것 같다. [화양연화]의 부진에도 한몫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재즈는 케니 지(Kenny G)라는, 여전한 대중의 오해와 시장의 왜곡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앨범의 또 하나의 장점은 바로 선곡에 있다. 재즈 명곡을 수록했지만, 그 명곡들도 이미 너무 많이 알려져 질리기 쉬운 스탠다드 넘버들이 아니라 ‘발굴된’ 명곡들이라는 점이다. 영화 [카사블랑카]에 삽입되었던 “As Time Goes By”나, 영화 [여수]의 주제곡인 “September Song”, 뮤지컬 [Every Night At Eight]의 삽입곡 “I’m In The Mood For Love”, 유명한 재즈 작곡가 콜 포터(Cole Porter)의 “You Do Something To Me”까지 클래식한 재즈 명곡들은 아니지만 그에 비할 만한 숨은 명곡들로 가득하다. 독특한 그의 보컬말고도 “I’m In The Mood For Love”에서 드러나는 퍼커션과 옛 음악파트너 필 만자네라(Phil Manzanera) 특유의 공간감 있는 기타, 그리고 반도네온(Bandoneon), 옹드 마르트노(ondes martenot) 같은 낯선 악기의 음색들은 그가 표현하려고 했던 폐쇄적인 아름다움을 적절히 끌어내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매력적인 음악인들 어떠한가.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보다 센티멘탈하고 스팅(Sting)보다 고급스러운 음악이지만, 재즈 팬이든 모던 매니아든 간에 쉽게 손이 가기 힘든 이런 음악이 시장에서는 묻힐 운명이라는 사실을… 20001128 | 박정용 jypark@email.lycos.co.kr

7/10

수록곡
1. As Time Goes By
2. The Way You Look Tonight
3. Easy Living
4. I’m In The Mood For Love
5. Where Or When
6. When Somebody Thinks You’re Wonderful
7. Sweet And Lonely
8. Miss Otis Regrets
9. Time On My Hands
10. Lover Come Back To Me
11. Falling In Love Again
12. Love Me Or Leave Me
13. You Do Something To Me
14. Just One Of Those Things
15. September S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