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1201064311-fayeFaye Wong – 寓言(Fable) – EMI, 2000

 

 

왕비의 조심스럽고 아쉬운 실험

매번 왕비(王菲)의 음반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녀는 독특한 매력을 풍기는 가수다. 물론 이것은 그녀 혼자 만들어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등려군(鄧麗君) 같은 청아한 미성(美聲)에 시니어드 오코너(Sinead O’Connor)의 신비로움과 돌로레스 오리던(Dolores O’Riordan)의 되바라짐을 섞어놓은 듯한 그녀의 보이스는 물론 그녀 몫이겠지만, 록이나 테크노 혹은 유럽풍의 포크 같은 서구적인 스타일을 이른바 ‘중국식 발라드’ 혹은 ‘칸토 팝(Canto Pop)’에 대한 집착이 강한 중국어권 음악시장에서 먹혀들 수 있게 만드는 데는 장아동(張亞東), Adrian Chan, C Y Kong으로 이어지는 유능한 작곡가, 프로듀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즉, 왕비의 곡들마다 그녀 자신의 음색에서 풍기는 아우라가 이러한 여러 스타일이 갖는 나름의 특색을 무색하게 할 만큼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다. 어떤 스타일의 곡도 잘 소화하여 거기에 충실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스타일의 곡도 왕비가 부르면 그녀만의 새로운 스타일이 되는 듯해 보인다는 말이다.

1997년 소속사를 Cinepoly에서 EMI로 옮긴 후 네 번째 앨범인 [寓言]에서 이러한 그녀의 아우라는 여전하다. 더욱이 앨범 커버에서부터 수줍게 얼굴을 가리며 청순한 이미지를 강조하던 전과는 달리 섹시한 의상에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매혹적인 자태가 당당해 보이며, 수록곡의 절반인 첫 다섯 곡을 직접 작곡을 하여 1997년 이후 발매된 앨범 중 제일 많은 자작곡을 담고 있다(이젠 분명히 자기 목소리를 내려는 것일까). 이번 앨범은 이제껏 왕비의 음악작업을 함께 해온 장아동과는 북경에서, Adrian Chan, C Y Kong과는 홍콩에서 작업을 했으며 총 10곡을 담고 있다(두 곡은 같은 곡의 광동어 버전이다).

녹음 작업을 북경과 홍콩 두 곳에서 나눠 했다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앨범의 수록곡들도 전체적으로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눠진다. 예의 익숙한 중국식 발라드 넘버와 그녀의 주종목인 이른바 글로벌 스탠다드 팝 넘버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다양한 스타일과 사운드가 매끄럽게 연결됐던 전작들과는 달리, 이번 앨범에서 그녀의 음악적 색깔은 확연히 두 부분으로 구별된다. 베이징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장중한 현악 연주를 시작으로 마치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던 애니 애슬럼(Annie Haslam)을 연상시키는 클래시컬한 왕비의 창법이 돋보이는 첫 트랙 “寒武記(한무기)”에서 신서사이저 연주가 우주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新房客(신방객)”, 테크노 풍의 “香奈兒(향내아)”까지 하나의 곡처럼 이어진다. 다음의 두 곡 “阿修羅(아수라)”, “彼岸花(피안화)”는 영화를 보는 듯한 음악을 해보겠다던 왕비의 의도대로 베이징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바탕으로 오래된 고전 영화의 스코어를 듣는 듯한 드라마틱한 구성을 갖춘 곡이다. 더 한층 신비로운 스타일을 강조하는 왕비의 보컬은 여기에 우울하고 어두운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혹은 기쁘게도) 모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 25분간의 왕비의 실험은 여기서 끝난다. 이후부터는 록 스타일의 “再見螢火蟲(재견형화충)”를 제외하고는 친숙한 칸토 팝으로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왕비의 앨범은 전작들과 비교해 볼 때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음악적으로 클래시컬한 색깔이 좀 더 강해진 것뿐 이전 앨범들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시도해왔던 스타일들이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앞서 잠시 언급했다시피 전작들에서 보여주던 다양한 스타일과 사운드의 절충이 이전 앨범들에선 매우 조심스럽게(혹은 은근슬쩍) 진행되었던 반면 이번 앨범에서는 상당히 분명하게, 앨범의 색깔을 확연히 구분지을 정도로 거칠게까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전히 조심스럽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다. 그것이 전략적인 이유인지 그녀 자신의 한계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녀가 다양한 팝 스타일의 실험에 경도되든, 대중적인 칸토 팝을 하든 그녀만의 아우라는 잃지 않을 것이며, 왕비의 이런 면에 매력을 느끼는 이라면 이번 앨범 역시 충분히 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20001127 | 김승익 holy3j@hotmail.com

6/10

수록곡
1. 寒武記(한무기)
2. 新房客(신방객)
3. 香奈兒(향내아)
4. 阿修羅(아수라)
5. 彼岸花(피안화)
6. 如果니是假的(여과니시가적)
7. 不愛我的我不愛(부애아적아부애)
8. 니喜歡不如我喜歡(니희환부여아희환)
9. 再見螢火蟲(재견형화충)
10. 笑忘書(소망서)
11. 螢火蟲(형화충) (광동어)
12. 給自己的情書(급자기적정서) (광동어)
13. Eyes On Me (한국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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