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한국에 있는 아는 이들이 뉴욕은 언제 놀러 가면 가장 좋으냐고 묻곤 한다. 어떤 기준으로 묻느냐에 따라 대답은 천양지차겠지만, 만약 음악에 관심 있고 가을에 한국을 떠날 정도의 여유가 있다면 무조건 9월이나 10월에 오라고 얘기해 주고 싶다. 해마다 이맘때의 뉴욕은 온갖 종류의 음악 공연들로 하루하루가 채워지는데, 특히 올해는 유달리 풍성하다. (어떤 공연이 있는지 일일이 열거하기엔 너무도 많고 누구만 얘기하기도 그래서 아예 생략하고…)

어쨌든 많은 고민 끝에 이번 달에도 역시 두어 차례, 힙합과 ‘월드뮤직'(따른 마땅한 표현은 정말 없는 건가?) 공연을 가기로 하고, 일단 10월 16일(월요일)에 Jurassic 5의 공연을 보러 가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공연의 큰 제목이 ‘Jurassic 5 콘서트’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출연진과 공연의 구성을 살펴보면 이는 마치 지난번 [weiv]의 ‘캘리포니아 힙합 커버스토리’의 연장선상에서 그 내용을 압축하고 있는 것 같다. Beat Junkies, Cut Chemist vs. Shortkut, Supernatural, Dilated Peoples, Jurassic 5까지, Supernatural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공연은 보름 전에 매진이 되었었는데(필자는 이를 예상하고 한달 전에 예매했다), 공연장인 미드타운의 Irving Plaza 앞은 공연이 시작되기 한시간 전부터 후드 티와 배기진 차림의 백인 젊은이들로 들끓었다. 실제 8시에 입장해서 공연장 안을 훑어보니 거의 관객의 90%는 (대학생 정도의) 백인 젊은이들이었다. 같이 보러간 Ray라는 친구(지난번에 몇 번 언급했던, 런던에서 힙합 문화를 조사하고 왔던 그 흑인친군데, 지난달에 드디어 논문을 끝내고 요즘 열나게 공연장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De La Soul을 가든, (LA 인디 힙합 씬을 주제로 한 영화)을 가든 관객은 백인 젊은애들뿐이다. 하지만 놀라울 건 없다. 이미 런던에서는 몇 년 전부터 있어온 일이다”라고 얘기했는데, 실제 이날 공연의 두 호스트인 Dilated Peoples나 Jurassic 5는 영국의 백인 청년들에게서 먼저 인기를 끈 이후 최근 미국에서 부상하고 있는 케이스들이다. (사실 영국 백인 청년들의 미국 언더 힙합 뮤지션들에 대한 관심은 실로 대단하다. Quanuum이나 Hieroglyphics의 뮤지션들의 인기야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의 Ninja Tune과 Quanuum의 결합 또한 흥미로운 일인데 이는 다음 기회에 얘기하기로 하자.)

Beat Junkies / Cut Chemist vs. Shortkut

Beat Junkies – Untitled Experimental Beats & Cults

8시 30분이 되자, 그 ‘세계적으로 유명한(World Famous)’ Beat Junkies가 Supernatural의 소개를 받고 무대에 먼저 올라왔다(지난번에 ‘베이 에리어 턴테이블리즘 앨범 10’을 정하면서 고민 끝에 탈락시켰던 앨범이 그들의 [World Famous Beat Junkies] 2집이다). 턴테이블리즘 씬은 올해 초까지만 해도 패거리들 중심으로 본다면, Beat Junkies, ISP(Invisibl Skratch Piklz) 그리고 X-ecutioners로 삼분되어 왔다. 하지만 Shortkut이 탈퇴하고 나머지 멤버들이 솔로활동에 집중하면서 ISP가 사실상 해체된 지금, 턴테이블리즘 씬은 베이 에리어의 Beat Junkies와 뉴욕의 X-ecutioners가 헤게모니를 양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물론 The Allies와 같은 다음 세대 테크니션들이 뜨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좀 이르다). ISP처럼 Beat Junkies도 베이 에리어 지역의 발군의 턴테이블리스트들의 패거리이다. 또한 ISP처럼 90년대 초반에 만들어졌으며, 수시로 멤버가 바뀐다는 것도 비슷하다. 재밌는 것은 Shortkut처럼 ISP와 Beat Junkies에 양다리 걸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Dilated Peoples의 DJ Babu도 Beat Junkies의 성원이다. (Jurassic 5의 Cut Chemist가 Ozomatli 등에 여러 다리 걸치는 것이나, Talib Kweli가 Black Star를 비롯한 여러 프로젝트와 개인활동을 병행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언더 힙합 씬의 뮤지션들이 여러 팀에서 동시에 활동하고 또한 솔로활동까지 병행하는 것은 지금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하여튼 ISP와 Beat Junkies를 굳이 구분하자면, 전자가 앱스트랙트한 사운드와 턴테이블 테크닉 자체에 집중하는데 비해, 후자는 보다 올드스쿨 힙합이라는 넓은 정의 하에 턴테이블리즘의 실험을 시도해왔다는 것이 미묘한 차이라고나 할까? (표현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똑같은 말 같기도 하고…)

20001105063156-chemistkut01사진설명 : Cut Chemist(왼쪽)와 Shortkut의 숨막히는 턴테이블 대결.
Cut Chemist Vs. Shortkut – Lessons

실제 Beat Junkies의 멤버는 10여명이 넘지만 이날 공연장에는 4명의 엄선된 DJ가 무대에 올라왔다. Beat Junkies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J-Rocc과 이들 멤버 중에서 최고의 테크니션들인 Rhettmatic, Babu, Shortkut이 나와서 늘 그러하듯이 신기의 묘기를 펼쳤다. 첫 번째 곡의 중간쯤에 하나의 턴테이블에 네 명이 몰려가서 번갈아 가면서 그 턴테이블을 연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두 번째 곡에서 J-Rocc의 진행 하에(사실 그는 패거리의 리더이긴 하지만 테크닉적으로는 이날 출연한 멤버 중에서는 가장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나머지 세 명이 돌아가면서 일종의 솔로 배틀(Battle)을 약 15분간 벌이는 장면도 재미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Shortkut에 높은 점수를 줬지만, 이날 관객들은 Babu의 기량에 더 열광하였다. (이는 역시 MC들과 결합한 힙합 그룹인 Dilated Peoples의 DJ인 Babu가 턴테이블리스트들만의 그룹인 ISP보다 대중적 인지도가 훨씬 높다는 것에서 그 원인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Beat Junkies의 30여분의 공연이 끝나고, 멤버 중 Shortkut만 남은 가운데, 역시 Supernatural의 소개로 Jurassic 5의 Cut Chemist가 무대에 올라와 데크를 Shortkut과 양분하면서, 드디어 뉴욕 한복판에서 ‘Futurepremitive’ 라이브 공연이 재현되었다([Live at the Futureprimitive Soundsession] 앨범에 대해서는 지난 번 us line 참조). 비록 20여분이긴 했지만, 그 유명한 ‘Lecture'(혹은 ‘Lesson’) 시리즈의 일부분을 현장에서 듣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경지에 오른 스크래칭 테크닉과 비트와 커트를 재조합해내는 그들의 능력은 경이로울 뿐이었다.

Supernatural / Dilated Peoples

1시간 여의 턴테이블리스트들만의 공연이 끝나고 이제부터는 이들 디제이들이 주조해내는 사운드 하에 능력 있는 MC들이 무대에 올라 마음껏 실력을 과시하는 차례가 되었다. 첫 번째는 Supernatural. 이날 출연진 중에 유일하게 캘리포니아 출신 뮤지션이 아닌 그는, Indiana 출신으로 현재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뉴욕 언더 힙합 씬의 대표적인 MC이다. 특히 그는 이 곳의 힙합 팬들이나 힙합 씬의 뮤지션들로부터 ‘프리스타일(freestyle)의 제왕’으로 꼽힌다. 그의 싱글 앨범을 듣고 실망했었다는 내 얘기를, Ray는 ‘Supernatural은 모든 걸 라이브에서 보여줄 뿐’이라고 가볍게 일축했는데, 실제 그의 40여분의 공연은 왜 그의 프리스타일 MCing 능력이 당대 최고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Rhettmatic이 데크에서 만들어주는 박력있는 비트의 사운드 하에, 그는 자유자재로 즉흥적(물론 이 말이 지닌 이중적 의미는 독자들도 짐작할 것이다)인 가사와 라임을 조합하여 랩을 뿜어내었다. 프리스타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습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기 위해 청중들과의 강렬한 ‘call-and-response’를 시종 이끄는 가운데, 특히 다섯 번째 곡에서 자신의 오리지널 스타일의 래핑과 톱클래스 MC들의 모창(?)을 번갈아 가면서 구사하는 랩이 매우 흥미로웠다. Wu Tang이나 Busta Rhymes 등의 모창도 그럴 듯 했지만, 1인 2역으로 진행하는 Biggie(Notorious B.I.G.)와 자신의 문답형 대화의 래핑이나 DMX의 허풍스러움을 내용적으로 비꼬면서 흉내내는 래핑은 많은 이들의 폭소를 자아내었다.

Supernatural – Untitled Freestyle Imitations

Supernatural과 Rhettmatic이 퇴장하고 Dilated Peoples의 다음 공연에 앞서 Shortkut의 솔로 디제이 세트(DJ Set)가 15분간 진행되었는데, 그는 예의 강렬한 턴테이블 묘기와 현란한 믹싱으로 분위기를 돋구었다. 드디어 어둠 속에서 Dilated Peoples가 등장하였고, Babu가 뒤쪽의 데크에 자리잡고 만들어내는 비트 하에 Evidence와 Iriscience가 특유의 현실과 추상을 오가는 힘있는 MCing을 뽐내기 시작하였다. 중간에 잠시 Babu의 솔로 턴테이블 묘기를 보여주는 한 곡을 제외하면(이곳 젊은이들은 Ba-‘Boo’라고 야유(?)하면서 그에게 열광하였다), 나머지 10여 곡은 그들의 정규 1집 [Platform]에 수록된 특유의 팝적이고 친근한 훅(hook)이 느껴지는 MCing과 DJing이 조화된 곡들이다(사실 Dilated Peoples는 Babu의 팀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Evidence와 Iriscience의 MC로서의 기술과 작사 능력은 이들의 전체적인 음악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Platform” 같은 대표 곡을 들려줄 때는 굉장히 열광적인 청중들의 반응이 있었고, 마지막은 그들의 이름을 처음으로 힙합 씬에 알렸던 최고의 히트곡 “Work the Angles”로 장식하였다.

Dilated Peoples – Platform
Dilated Peoples – Work the Angles

Jurassic 5

50여분간의 Dilated Peoples의 공연이 끝나고 이번에는 J-Rocc이 무대에 나왔다. 그가 15분 정도 별 볼일 없고 재미없는 DJ Set을 진행하면서 공연장 안의 분위기가 약간 어수선해졌지만, 드디어 Supernatural의 (힙합의 미래라는 거창한) 소개 아래 Jurassic 5가 등장하면서 다시 공연장은 열광의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Cut Chemist와 Nu-Mark가 무대 뒤쪽 데크 좌우에 배치되고, Chali 2na, Zaakir, Marc 7even, Akil이 무대 전면을 꽉 채운 가운데 1시간 여의 폭발적인 공연이 진행되었다. 앞선 Dilated Peoples나 Supernatural이 말 몇 마디하고 노래 하나 부르고 하는 식의 전형적인 무대진행을 보여주었는데 반해, Jurassic 5는 거의 3~4곡을 메들리 식으로 10여분 이상 연주하고 간단한 멘트를 하는 식의 철저한 음악 위주의 진행으로 청중을 압도하였다. 가령 “The Influence-Great Expectation-Jayou”로 이어지는 메들리처럼 [EP]와 정규 1집의 곡들이 자유자재로 조합되었다. 중간에 MC들이 들어가고 Cut Chemist와 Nu-Mark의 턴테이블리즘 대결이 펼쳐질 때는 Nu-Mark가 준비되어 있던 다양한 타악기 실력을 뽐내기도 했는데, 그는 일반적인 평과는 달리 Cut Chemist 못지 않은 턴테이블 기량과 재주를 과시하여 청중들의 감탄을 자아내었다.

20001105063156-jurassic02사진설명: Jurassic 5의 공연모습.
Jurassic 5 – the Influence-Great Expectations-Jayou (medley)

하지만 역시 Jurassic 5 음악의 정수는 재즈-훵크한 두 디제이의 사운드 위에 실리는 네 MC의 폭발적인 래핑에 있다. 이들 MC들은 개개인의 솔로 능력을 과시하기보다는, 때론 화음을 넣고 때론 제창을 하면서 10여분씩 숨돌릴 틈 없이 떼거지로 무대 전면에서 랩을 퍼부으면서 청중들을 청각적, 시각적으로 압도하는데 치중하였다. 사실 그들의 MCing은 단순한 올드스쿨 스타일의 재생이라기보다는 가사의 내용이나 라임과 버스, 모두 측면에서 그것의 새로운 단계로의 발전적인 진화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턴테이블리즘이 단순히 70년대 후반 클럽 DJ의 그것의 단순 재생이 아니듯, 최근 언더 힙합 씬의 MC들이 선호하는 스타일 또한 결코 지난 시절의 래핑의 단순 모방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올드스쿨 스타일이 새롭게 진화된 MCing과 DJing의 절묘한 결합을 대표하는 사운드가 바로 Jurassic 5의 그것이다. “Quality Control”이나 “World of Entertainment” 같은 곡들의 메들리가 끝나가면서 마지막에는 두 명의 백인 B-Boy가 나와서 두 디제이의 사운드에 맞춰 격렬한 춤판을 벌이면서 드디어 Jurassic 5의 공연은 끝이 났고, 완전히 달아오른 청중들의 광적인 환호 속에 잠시 후 다시 Jurassic 5가 등장했다.

Jurassic 5 – Quality Control

“오늘의 공연은 우리들 Jurassic 5만의 것이 아니라, 오늘 출연한 모든 이들과 여러분들의 것이다”라는 Akil의 멘트와 함께 출연진 모두가 무대에 올라오면서 마지막 앵콜곡이 진행되었다. 6명의 DJ(Shortkut, Babu, J-Rocc, Rhettmatic, Cut Chemist, Nu-Mark)가 번갈아 가면서 여러 조합으로 비트를 만들어내는 가운데 7명의 MC(Jurassic 5, Dilated Peoples 그리고 Supernatural)가 돌아가면서 프리스타일을 20여분간 쏟아 붓고, 드디어 공연은 막을 내렸다.

Jurassic 5 일당의 이날 공연모습은 어떤 면에서 미국 힙합 씬의 현재 지형을 상징한다. 사실 힙합 뮤지션들의 최근 미국 내에서의 또 다른 형태의 약진은 놀라울 정도이다. 물론 Ja Rule, Nelly, Mystical이 이번 주 빌보드 앨범차트 1, 2, 3위를 휩쓸고 있는 주류 힙합 씬의 상황도 대단하지만, 언더, 혹은 언더 출신 뮤지션들의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활동들은 특히 돋보인다. 베이 에리어, 뉴욕, LA의 다양한 힙합 뮤지션들이 실험적인 사운드와 사회적, 정치적 모토 하에 다양하게 결합되어 음반활동과 공연활동을 벌이는 모습이 급증하고 있다. 동시에 다른 장르의 뮤지션들(재즈, 소울, 훵크, 월드뮤직 등의)과의 결합 또한 눈에 뜨이게 늘었다. 가령 이 달 내에만 뉴욕에서, Afrika Bambaataa, DJ Kool Herc, DJ Funk의 조인트 공연(올드스쿨의 영광스러운 재현은 이들 노구의 힙합 원조들을 다시 무대에 올려놓았다), Kid Koala, Del the Funkee Homosapien, Dan the Automator, People Under the Stairs의 조인트 공연, Common과 Jill Scott의 듀엣 공연 등이 쉬지 않고 이어질 예정이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더 이상 힙합은 흑인들만이 만들고 흑인들만이 듣는 음악이 아니며, 더 이상의 장르적 집착 또한 무의미함을 이들 뮤지션들과 그들의 청중들은 최근 들어 더욱 노골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결코 제 3자적 입장을 벗어날 수 없는 필자와 같은 존재들은, 이러한 공연들이 주는 즐거움과 비례하여 역설적으로 머리만 점점 더 복잡해 질 뿐이다. 20001019 | 양재영 cocto@hotmail.com

관련 글
베이 에리어(Bay Area) 힙합 씬의 현재와 미래 – vol.2/no.18 [20000916]
베이 에리어 힙합 추천 앨범 20선 (1) MC 힙합을 중심으로 – vol.2/no.18 [20000916]
베이 에리어 힙합 추천 앨범 20선 (2) 턴테이블리즘을 중심으로 – vol.2/no.19 [20001001]
Jurassic 5 [EP] 리뷰 – vol.2/no.19 [20001001]
Jurassic 5 [Quality Control] 리뷰 – vol.2/no.19 [2000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