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배들리 드론 보이의 공연 장면 첼로의 힘찬 보잉과 프렌치 혼의 호기심 많은 응답, 그리고 어느 틈엔가 옆에서 거들고 있는 기타. 그렇게 노래는 시작된다. 얼마 전(9월 12일) 있었던 2000년 머큐리 음악상의 수상자 배들리 드론 보이(Badly Drawn Boy)는 첫 앨범 [The Hour of Bewilderbeast]를 그처럼 평화롭게 시작한다. 어설픈 비유를 해보자면 이 앨범은 시야가 탁 트인 푸른 들판에 누워 포근한 바람을 맞는 기분이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출발을 알리는 희망적인 목가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까. 수상자 명단에 함께 노미네이트되었던 또 다른 ‘무서운 신인들’ 도브스(The Doves)와 콜드플레이(Coldplay) 역시 비슷한 범주에 속한다. 머큐리 음악상이 대중적인 인기보다 음악성을 중시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처럼 조심스럽게 낙관적인 감성파 음악들이 대거 평가를 받았다는 점은 현재 영국의 음악적 조류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점이 있다. 혹은 영국 음악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콜드플레이는 대중적으로도 커다란 성공을 거두면서 작년 트래비스(Travis)의 영광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지난 5년 간 영국 록계의 모습을 일별해 보기로 하겠다. 오아시스와 블러가 온통 영국의 음악 잡지를 도배하고 있던 1990년대 중반, 화두는 브릿팝이었고 덕목은 자신감이었다. 그 자신감이 어디서 연유했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다만 모두들 낙관적이고 활달한 사운드를 즐기며 축배의 잔을 들었고, 그 가운데 세심하고 우울한 감성은 쉽게 묻혀버렸다. 그런 면에서는 댄서블한 팝 사운드 속에 동시대 영국에 대한 비판과 감성을 슬쩍 끼워 넣었던 펄프의 존재가 유별나게 보인다. (그리고 펄프는 앨범 [Different Class]로 오아시스와 블러를 제치고 1995년 머큐리 음악상의 수상자가 되었다.) 사진설명: 버브의 다섯 명의 멤버들 모습 이러한 낙관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감성을 소개한 두 장의 앨범이 1997년 발표되었다. 버브(The Verve)의 앨범 [Urban Hymns]는 현악기와 기타의 웅장한 연주와 매력적인 훅을 대담한 스케일에 담아 영국 전역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특히 앨범 전체에 걸쳐 흐르는 리차드 애시크로프트(Richard Ashcroft)의 애절한 목소리는 브릿팝의 슬픈 초상화였고, “Bitter Sweet Symphony”는 브릿팝의 ‘위풍당당 행진곡’이었다. 물론 ‘it’s a bittersweet symphony this life’라는 가사가 말해주듯 브릿팝의 자신감과는 다른 깊은 여운을 남기는 노래였다. 버브의 앨범보다 몇 달 전에 소개된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는 보다 더 급진적이다. 보다 더 병적인 우울함을 담고 있으며 보다 더 비판적인 신념을 표하고 있는 이 앨범에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한 것은 테크놀로지를 등에 업고 우주로 날아오르려는 듯한 사운드였다. 이미 [The Bends](1995)에서 특유의 몽환적이고 애절한 사운드를 선보였던 라디오헤드는 이 앨범으로 세기말의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성공적으로 포착했으며, 나아가 록 음악의 미래를 제시했다는 평을 받았다. 라디오헤드와 버브는 1997년 영국의 각종 잡지의 연말 차트와 음악상을 양분하며 마침내 브릿팝의 시대에 거대한 마침표를 찍었다. 이는 영국 음악이 이제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징후는 1998년 가을에 발표된 화제의 앨범 UNKLE의 [Psyence Fiction]에 나타났다(이는 아마도 브릿팝의 활기차고 낙관적인 사운드의 정반대에 놓이는 앨범이 아닐까 싶다). 모왝스(Mo’Wax) 레이블의 사장이자 엔지니어인 제임스 라벨(James Lavelle)과 DJ 섀도우(DJ Shadow)의 프로젝트 앨범인 이 앨범에서 리차드 애시크로프트와 톰 요크(Thom Yorke)는 각각 “Lonely Soul”과 “Rabbit In Your Headlights”에 참여하여 우울한 카리스마를 마음껏 뽐냈다. 그리고 1998년 영국 최고의 신인 밴드 중 하나인 고메즈(Gomez)는 [Bring It On]으로 트립합의 어둡고 퇴페적인 미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감성을 선보였다. 하지만 세기말 영국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사운드는 누가 뭐래도 ‘새로운 포크’의 도래였다(그와 더불어 ‘체임버 팝’의 부각도). 그 중에서도 스코틀랜드의 벨 앤 세바스찬(Belle & Sebastian)과 미국 포클랜드 출신의 엘리엇 스미스(Elliott Smith)가 가장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는데, 이에 대해서는 [weiv]에서도 자주 언급한 적이 있으므로 생략하기로 하자. 한편, 인디 음악에 우호적인 영국의 잡지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New Musical Express)’는 98년과 99년 최고의 앨범으로 각각 미국 출신 록 밴드인 머큐리 레브(Mercury Rev)의 [Deserter’s Songs]와 플레이밍 립스(The Flaming Lips)의 [Soft Bulletin]을 선정했다. 이 두 밴드의 과거의 사운드를 생각한다면 당시 영국이 선호했던 사운드가 어떤 것이었는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세기말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브릿팝 이후 영국은 이렇듯 비관적이고 우울한 감성이 지배적이었다. 오아시스와 스웨이드의 앨범은 잇달아 실패를 면치 못했고 블러는 [Blur] 이후 자신들의 이미지로부터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는 가운데 트래비스는 적절한 센티멘탈과 친근한 이미지를 앞세워 1999년을 자신들의 해로 만들었다. 물론 슈퍼 퍼리 애니멀스(Super Furry Animals)는 여전히 특유의 장난기로 뛰어다녔지만 이들은 애초부터 미디어의 관심과 거리가 멀었고, 팻보이 슬림(Fatboy Slim), 케미컬 브라더스(The Chemical Brothers), 베이스먼트 잭스(Basement Jaxx) 등의 댄서블한 테크노 음악은 항상 그래왔던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세기말이 문제였을까. 우연인지 아닌지 금년에 발표한 앨범들을 들어보면 서서히 웃음을 찾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엘리엇 스미스는 [Figure 8]에서 전에 없던 화려하고 말쑥해진 모습으로 돌아왔고, 버브의 충격적인 해산 이후 리차드 애시크로프트는 솔로 앨범 [Alone With Everybody]로 긍정적인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영국 출신은 아니지만 일스(Eels) 역시 [Daisies of the Galaxy]에서 희망적인 메시지를 노래하고 있으며, 캘리포니아에서 온 그랜대디(Grandaddy)의 [The Sophtware Slump]와 파리에서 온 타이티 80(Tahiti 80)의 [Puzzle]도 매혹적이고 예쁜 세계를 그려나간다. 서두에서 말한 영국의 신예 밴드들 역시 우울한 안개보다는 따뜻한 햇살에 가깝다. 변함없는 것은 벨 앤 세바스찬과 라디오헤드다. 하지만 벨 앤 세바스찬은 언제나 감성적이되 감성을 절제하는 것이 밴드의 미덕이었으므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며, 라디오헤드는 이제 인간의 희노애락을 초월한 세계에 안착했다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소름끼치는 절망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는 걸까. 바야흐로 새로운 긍정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걸까. 20001029 | 장호연 ravel52@nownuri.net 관련 글 벨 앤 세바스찬 vs 엘리엇 스미쓰 – vol.1/no.6 [1999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