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3일 금요일 오후, ‘글래스톤베리’에 도착해 프로그램 책자에 나온 출연진 면면과 공연 시간표를 훑으면서 나는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쟁쟁한 뮤지션/밴드로 가득한 피라미드 스테이지와 아더 스테이지의 시간표만으로 눈 돌릴 틈이 없었다. 그러던 중 허걱, 엘리엇 스미스의 이름 발견. ‘글래스톤베리’에서 엘리엇 스미스를? 그때의 느낌은, 뭐랄까, 어떤 자리에 갔는데 예상치 않게 평소 마음에 둔 사람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암튼 그랬다. 그를 아주 오래 전부터, 또 열렬히 좋아했던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그가 나올 줄이야.

그런데 엘리엇 스미스의 공연은 그날(6/23) 밤 9시 50분, 뉴 텐트에 잡혀 있었다. 왠 뉴 텐트? 1994년 솔로 데뷔한 이후 꾸준한 활동을 벌였지만 그의 주요 기반이 인디 씬이었다는 점을 걸고 넘어간다면, 1997년 영화 [Good Will Hunting] 사운드트랙에 실려 이듬해 ‘아카데미’ 주제가상 노미네이트까지 된 “Miss Misery”의 인기와 그로 인한 대중적 인지도는 뭐란 말이며, 정규 앨범 5장 발매에 2장의 OST 음반 참여는 뭐란 말이지? 물론 엘리엇 스미스가 글래스톤베리의 그 넓은 피라미드 스테이지나 아더 스테이지에 서서 혈기방장한 청년들을 빠글빠글 모아 놓고 노래하는 모습이 어울릴까(혹은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인정하지만, 어쿠스틱 스테이지(Acoustic Stage)도 따로 있는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영국에서 엘리엇 스미스는 어떤 존재인가’하는 궁금증은 같은 시간대에 아더 스테이지에 서는 모비(Moby)도 뿌리치고 달려가게 만들었다. 물론 잠시 망설이기도 했고, 모비의 공연이 20분 일찍 시작하므로 그거 좀 보다가 달려가려는 잔머리를 굴리게 되었는데… 하지만, 아뿔싸, 모비가 눈치 깠는지, 나는 모비의 무대 앞에 얼쩡거리다 끊임없이 불어나는 엄청난 인파로 인해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10분 늦게 뉴 텐트에 도착했는데 이미 공연은 시작된 상태였다. 시간 칼 같이 지키는 공연 진행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을 줄이야.

주변에 주저앉거나 누워서 맥주와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을 지나 커피 한 잔을 사들고 텐트 안으로(실은 아래로) 들어갔다. 공연장이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청중들로 가득해서 앞으로 뚫고 들어가는 데 무리가 있었다. 전진이 절대 불가능할 만큼 밀착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공연장의 진지한 분위기가 그런 의지를 체념케 했다. 그래서 애매한 거리에서, 때론 까치발 들며 어정쩡하게 공연을 보게 되었다.

검정으로 색을 통일한 반팔 상의와 하의 차림의 엘리엇 스미스는 풀 밴드 세션과 함께 연주했다. 그는 기타를 들거나 맨몸으로 섬세하고 열정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때로는 피아노 솔로와 기타의 결이 공연장의 푸른 공기를 둥둥 떠다녔고, 때로는 그의 감정을 다한 보컬이 제법 강한 사운드와 겨루며 몸을 들썩이게 했다. 흥겨운 비트와 서정적인 슬로 템포를 오가기도 하고 간결한 연주와 다양한 소리층을 적절히 섞기도 한 무대였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는 ‘생각보다’ 풍성하고 록킹한 사운드가 인상에 많이 남았다. 그게 엘리엇 스미스에 대한 평소 나의 치우친 인상 때문인지, 록 밴드 편성의 세션의 연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풍성한 사운드는 어쩌면 올해 나온 5집 [Figure 8]의 수록곡이 셋 리스트의 주를 이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3집 [Either/Or](1997)에서 2곡, 4집 [Xo](1998)에서 4곡, 5집 [Figure 8]에서 8곡이 선곡된 공연은 단순히 악기 수의 문제가 아니라 사운드의 질감 자체가 (이전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두터웠고 하이파이적이었다. 하긴 5집 투어가 진행 중이었는데(마침 그는 영국 투어 중이었다), 5집의 경향 또한 다양한 악기와 소리의 시도가 아니었던가. 3집과 4집에서 고른 곡들도 다소 업템포이거나 그리 조용하지만은 않은 곡들 위주였던 듯하다. 어쩌면 엘리엇 스미스는 아직도 “Miss Misery”의 유령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 곡을 포함해 [Good Will Hunting] 사운드트랙의 수록곡을 한 곡도 부르지 않았다. 시간 때문인지 앵콜도 받지 않았고.

공연장의 풍경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규모가 큰 무대의 청중이(그리고 페스티벌의 주 청중이) 주로 ‘청년’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20대 전반의 세대인데 반해, 엘리엇 스미스 무대에 모인 사람들은 비교적 다양한 세대였다. 주류는 물론 20대였지만, 30대와 40대도 적지 않았다. 또 주관적 ‘억측’이지만, 청중들의 전체적인 인상은 뭐랄까, 약간 내성적이고 진지해 보이는 대학생 같다고 할까, 암튼 그렇게 보였다. 청중 중에서 기억에 남는 사람은 내 옆에 있던, 머리숱이 좀 적은 40대 아저씨. 그는 내내 다소 냉정해 보일 정도로 계속 팔짱만 끼고 있었는데, 공연이 막바지에 이르자 곡이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참, 그날 공연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 하나 더. 한 여성이 소개받고 커튼 뒤에서 나와 두 곡 정도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던 것.

수척하지만 질긴, 쓸쓸해 보이지만 따뜻함을 품고 있는 엘리엇 스미스의 노래는 ‘글래스톤베리’에서의 남다른 기억을 안겨 주었다. 앵콜 없이 공연이 끝나버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청중들의 얼굴엔 만족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교외 농장이란 비일상적인 환경 요인(게다가 주류 록 페스티벌 속에서 비주류적인 포크 록의 위상)이 빚어낸 낭만적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그런 면이 있긴 한데 그렇게만 돌리기엔 뭔가 개운치 않은 듯하다. 그럼? 글쎄, 잘 모르겠다. 1990년대 중후반 때아닌 포크 바람이 어떻게 불었는지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다면 또 모를까. 20000928 | 이용우 djpink@hanmail.net

ELLIOTT SMITH ‘GLASTONBURY’ SET LIST
1. Son of Sam
2. Bled White
3. Cupid’s Trick
4. Everything Means Nothing To Me
5. Amity
6. LA
7. Pretty Ugly Before
8. Color Bars
9. Sweet Adeline
10. Stupidity Tries
11. In the Lost And Found (Honky Bach) the Roost
12. Independence Day
13. Ballad of Big Nothing
14. Junk Bond Trader
15. Can’t Make A S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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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앤 세바스찬 vs 엘리엇 스미스 – vol.1/no.6 [19991101]

관련 사이트
엘리엇 스미스 공식 사이트
http://www.elliottsmith.net
엘리엇 스미스의 음악, 사진, 비디오, 팬 포럼, 뉴스, 투어 정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