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는 주술에서 벗어났어요. 보시다시피 여러분의 발 밑은 물기 하나 없이 마른 상태입니다. 그렇게 하는데 돈이 제법 들었다니까요.” – Fran Healy (Travis) 트래비스의 프론트맨 프랜 힐리가 공연 중 그렇게 농담을 곁들여가며 여유있게 말하게 된 건 다 이유가 있다. 또 그 말고도 많은 뮤지션들이 페스티벌 기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던 날씨를 찬양하게 된 데에도. 매년 여름이면 영국 전역에서 열리는 페스티벌들 중에서 ‘글래스톤베리’는 비와의 짖궂은 인연으로 유명하다. 오죽하면 ‘머드 페스티벌(mud-fest)’이란 닉네임을 갖게 되었을까. 1982년 1일 강우량 기록을 45년 만에 갈아치우는 폭우가 내린 것을 시작으로, 1985년 폭우로 마치 “지옥에서 이를 악물고 있는 얼굴들로 가득한”([The Guardian]) 풍경이 펼쳐졌으며, 결정적으로 최근에 해당하는 1997년과 1998년 연속으로 폭우가 강타하였다(1997년엔 세컨드 스테이지가 폐쇄될 정도였다). 물론 토요일의 헤드라이너였던 트래비스도 페스티벌에 비를 몰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 2년간의 머드 페스티벌 이후인 ‘글래스톤베리 1999’. 다행히도 나쁘지 않은 날씨여서 다들 좋아하고 있었는데, 트래비스가 아더 스테이지에 올라 연주하자 공교롭게도 비바람이 몰아치는 민망한 장면이 벌어졌다. 하필이면 그때 부른 노래 제목이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라던가. 무대 앞 청중들이 흠뻑 젖어서 ‘노래 제목이 씨가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 이후 트래비스는 ‘레인메이커(rainmaker)’란 달갑지 않은 말을 듣기 시작했다. 그러니 올해 ‘글래스톤베리 2000’의 ‘좋은 날씨'(물론 우리 기준이 아니다!)가 감격스러울 수밖에. 그랬다. 영국의 변덕스런 날씨가 ‘듣던 바 그대로’라는 걸 감 잡는 데에는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늘 비에 대비해야 하는 날씨. 이런 판단은 글래스톤베리로 가는 길에 일간지 보다가 날씨란에 지역별 일조량이 나오는 걸 보고 굳어졌다. 페스티벌의 공식 기간인 6월 23일 금요일부터 25일 일요일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일기예보는 비가 올 가능성이 크다고 타전했고, 공연 전날인 목요일만 해도 비가 꽤 와서 일찌감치 자리 잡은 사람들은 1997, 1998년의 악몽을 떠올리고 비장해 했다고 한다. 나도 작년 ‘트라이포트’ 꼴 나면 어쩌나, 게다가 이 먼 이국 땅에서 어쩌나 하고 좀 쫄긴 했다. 페스티벌 내내 하늘에는 한 점 정도가 아니라 수시로 검은 구름 떼가 둥둥 떠다녔지만 사이사이 비추는 햇살은 썬 크림을 발라야 할 정도로 따가웠다. 썬탠하는 사람들도 꽤 됐던 걸 보면, 하지만 늘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걸 보면 왜 그네들이 당시 날씨에 대해 ‘하늘의 축복이 어쩌구’를 연발했는지 이해가 갔다. 페스티벌 전과 페스티벌 기간의 날씨를 지옥과 천당으로 요약한 표현도 심심찮게 나오고. 6월 23일 금요일, 런던의 빅토리아 시외 버스 터미널(Victoria Coach Station)에서 글래스톤베리 행 내셔널 익스프레스 코치(National Express Coach)를 타고 강렬한 햇빛 내리쬐는 공연장에 도착했다. 페스티벌 기간 동안 특별히 마련되는 이 노선은 런던 시내에서 공연장 입구까지 직행한다. 진입로 곳곳에 떨어져 있는 동물의 배설물로 그 곳이 농장임을 새삼 느끼며 걸어 들어가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눈으로는 이미 야트막한 산(높은 언덕?)의 중턱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세워진 텐트와 수많은 사람들의 물결, 그리고 주차장을 가득 메운 차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고, 귀로는 큼지막한 음악 소리가, 몸으로는 둥둥거리는 베이스와 드럼의 파동이 전이되고 있었다. 올해도 ‘글래스톤베리’는 어김없이 6월 마지막 주말에 서머셋(Somerset) 글래스톤베리(정확한 지명은 필튼(Pilton))의 워시(Worthy) 농장에서 열렸다. 글래스톤베리는 런던에서 서쪽으로 약 3시간 30분 거리(버스 기준)인 영국 남서부에 위치해 있다. 공연장인 워시 농장은 600에이커(약 74만평)에 달하는 광활한 녹초지로, 올 해 소폭으로 구획 정리를 다시 했다. 낙농업 농부 마이클 이비스(Michael Eevis)에 의해 1970년 처음 열린 ‘글래스톤베리’는 그동안 여러 이유로 열리지 못해서 (하지만 공교롭게도) 21세기 첫 해인 올해가 21회째이다. 다른 페스티벌과 달리 1일 티켓(day ticket) 없이 캠핑비 포함 짤 없이 89파운드인 3일 티켓 10만 장은 공연 전날 완전 매진되었다. 올해는 (작년에 이어) 무난한 날씨 아래, (예년과 비슷하게) 월담하기, 두더지처럼 굴 파기, 진행요원 위협하기 등의 형식으로 들어온 2만 여명을 포함해 약 12만 명의 청중이 2박 3일간 자연 속에서 텐트 생활을 하며 230여 밴드/뮤지션들과 성공적인 ‘특별한 3일’을 만들어냈다. 매년 여름 페스티벌 시즌의 첫 테이프를 끊는 ‘글래스톤베리’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페스티벌이고 또 가장 유명한 페스티벌이다. 이 페스티벌은 ‘레딩 & 리즈(Reading & Leeds)’ 페스티벌과 함께 영국의 양대 페스티벌로 묶이기도 하고, 여기에 1990년대에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V’ 페스티벌을 더해 영국 3대 페스티벌 중 하나로 분류되기도 한다(‘3대 어쩌구’ 하는 게 좀 씁쓸한 표현이라 안쓰고 싶지만 알려진 게 그렇다보니). 이런 얘길 왜 꺼내는가 하면, 영국 내에서 ‘글래스톤베리’의 위치 때문이다. 의심할 바 없이 수식어로 붙는 ‘가장 오래된 그리고 유명한’이란 수식어는 달리 표현하면 ‘가장 전통적인 그리고 보편적인’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달리 보면 ‘글래스톤베리’는 한국의 ‘쿨’한 매니아들 잘 쓰는 말로 (한 번의 관찰로 표현하기엔 좀 조심스러운데) ‘좀 구린’ 페스티벌일 수도 있겠다는 말이다. ‘글래스톤베리’에는 1960년대 히피 공동체의 축제였던 ‘원조 록 페스티벌’의 잔영이 꽤 남아 있어 보였다. 앞서 언급했지만 본래 농장인 광활한 녹초지라는 페스티벌 장소, 1일권 없이 야영 생활을 권하는 3일권만 있는 티켓은 전통적인 록 페스티벌의 최적의 조건이다. 월담자처럼 티켓을 사지 않고 무단으로 입장해 공연을 즐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점도 전설적인 록 페스티벌 얘기에서 빠짐없이 들어온 전통이다. 물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각종 범죄, 부족하고 더러운 화장실 문제도 있다. 올해 1727건의 범죄가 일어나(텐트 관련 도둑질과 경미한 부상이 대부분) 작년에 비해 수가 줄어들었다는데,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시에 한 곳에’ 모이면 범죄나 열악한 화장실 문제가 전혀 없을 수는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긴 그 두 요소 모두 여타 페스티벌의 사정도 비슷하므로 특이하달 건 없겠지. 하지만 내가 글래스톤베리에서 1960년대 록 페스티벌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던 요인이 그게 다는 아니다. 상징적이라고 생각한 것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가십으로 떠오른 누드 시위이다(직접 보진 못했다^^). 빈센트 베델(Vincent Bethell)은 작년의 ‘Protest Naked’ 문구에 이어 올해는 ‘Self Aware’ 문구를 적은 피켓을 들고 ‘Human Rights’라고 적힌 팬티만 입은(흰 천을 두른 것에 가깝다) 동조자와 함께 ‘평화로운, 비성적인 공공의 벌거벗기(peaceful, non-sexual public nudity)’ 합법화 캠페인을 나체로 벌였고, 이 모습을 담은 사진은 [Select]에서 발행하는 ‘글래스톤베리’ 소식지 1면을 장식했을 뿐만 아니라 ‘글래스톤베리 2000’을 다룬 음악 잡지에도 어김없이 등장하였다. 누드 시위에 대한 반응이 각양각색이었다는 걸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이 소식을 듣고 모틀리 크루 출신의 드러머 타미 리(Tommy Lee, 전처인 파멜라 앤더슨과의 자가제작 섹스 비디오로 더 유명한)가 스테이지에 나체로 출현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오히려 가십에 가깝다. 썬탠 하거나, 주변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거리낌없는 매무새로 활보하는(개중에는 토플리스 차림의 여성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청중들의 모습이야말로 이미 누드 시위자의 취지가 공감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누드 시위가 가십 이상의 느낌을 던졌던 이유의 밑바닥에는 ‘글래스톤베리’의 환경친화 전략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실 이 부분이야말로 ‘글래스톤베리’의 아우라를 형성하는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글래스톤베리’에 처음 가게 되는 사람이 갖게 되는 느낌 중 하나는 ‘참 자연스럽고 자유로워 보인다’는 점이다. 하지만 동시에 동전의 양면처럼 ‘참 더럽(게도 논)다’는 느낌도 들게 된다. 일 주일은 옷도 안갈아 입고 씻지도 않은 듯한 애들이 시선을 옮길 때마다 눈에 밟히는데(얼굴들은 하얗더라. 술 마셔서 빨개진 애들 빼고), 아무데서나 널부러져 자고 있는 애들도 부지기수이고, 땅에 그냥 앉거나 누워서 흙이나 풀이 묻은 상태인 애들이 청중의 대다수였다. 지내다 보니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는데, 하긴 3일 넘게 지내다 보면 옷 깨끗하게 입는 게 의미가 없고, 안씻는 것처럼 보여도 오전에 보면 용케들 얼마 안되는 수도꼭지 앞에 줄을 서서 세수라도 하는 모습이었다. 또 히피로 보이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에는 먹다 남은 음식물 쓰레기와 맥주 캔, 컵 및 각종 잔해들로 쓰레기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뭐가 환경친화적이냐구? 그건 ‘자유로움과 自然스러움’의 아이러니 때문이 아닐까. 아니, 애초에 청중들은 그런 거에 관심이 없다구? 그럴지도 모르지. 어느 잡지에 의하면 일본의 ‘라이징 선 페스티벌(Rising Sun Festival)’은 자원봉사자들의 노력과 청중의 협조로 쓰레기를 철저히 처리해 깨끗한 사이트를 만들었다는데, 뭐 ‘글래스톤베리’는 그 수준에 턱없이 못 미치고 앞으로도 그럴 전망이다. 그래도 일요일 아침 수십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쓰레기 봉투를 들고 다니며 휴지를 줍는 모습을 보았던 게 고무적이었다. ‘글래스톤베리’에서 놀랐던 점은 메인 스테이지인 피라미드 스테이지 무대 앞에 가로로 길게 걸린 그린피스 현수막이었다(나중에 자세히 보니 삼등분되어 가운데는 그린피스, 양옆엔 옥스팜과 워터에이드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아니, 저기는 메인 스폰서의 현수막이 들어가는 자리 아닌가. 그럼 그린피스가 메인 스폰서? 아무리 잘 나가는 환경 단체라도 이런 거대 페스티벌에 메인 스폰서를? 돈이 엄청나게 들어갈 텐데… 게다가 페스티벌 사이트 내에 그린 필드(Green Fields)라는 구역까지 꾸민다면…’ 머릿속이 복잡해졌더랬다. 나중에 프로그램 책자를 읽어보니, 오해와는 반대로 ‘글래스톤베리’에서 대표적인 환경 단체 그린피스(Greenpeace),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한 옥스팜(Oxfam), 물 문제를 다루는 워터에이드(WaterAid)에 매년 수익금 중 70만 파운드를 기부하고 있었다. ‘그게 이 페스티벌의 값진 대의이고 글래스톤베리 티켓을 사면 자연스럽게 이들 단체에 기부하는 셈’이라는 설명이 강조되었다. 피라미드 스테이지 한쪽 진입로에 ‘앰네스티 인터내셔널(Amnesty International)’ ‘만델라’ 같은 제목을 단 천막들이 줄지어 있었던 의문도 풀리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글래스톤베리’는 이른바 ‘양심적 콘서트’의 전통도 잇고 있었던 것이다. ‘상업적인 페스티벌이지만 수익금 중 일부를 가치 있는 대의에 사용한다’는 기조는 이 페스티벌의 존재의 알리바이가 되고 있었다. 70만 파운드면 우리 돈으로 10억 원이 넘는데 그렇다면 페스티벌의 순이익이 도대체 얼마길래 그렇게 막대한 기부가 가능하단 말인가. 입장료만 89파운드 곱하기 10만 명이니까 890만 파운드, 우리 돈으로 어림잡아 140억? 거기다 100여 개가 넘는 상점과 음식점의 임대료도 있지… 더 이상 계산이 안됐다. 거대한 페스티벌 사이트는 단순히 음악 축제의 장만이 아니라, ‘Glastonbury Festival of Contemporary Performing Arts’란 공식 명칭에 걸맞게 일시적 문화 축제 공간이 되어 있었다. 근처의 아발론 계곡은 전설적인 고대 왕인 아더왕(King Arthur)이 묻혀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으로, 그린 필드 내에 아발론 스테이지는 여기서 이름을 따온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포크, 루츠, 트래디셔널, 셀틱 등의 음악이 연주되고, 같은 그린 필드에 있는 시 텐트(Poetry & Words Tent)에서는 하루 종일 시와 말들의 향연이 벌어졌다. 밤늦게 영화를 상영해주는 시네마 필드, 어린이와 중장년 층에 인기 높은 서커스 필드(Circus Big Top, Cabaret Marquee, Theatre Marquee), 아예 어린이들에게 할당된 키즈 필드(Kidz Field) 등에서는 수백 개의 공연과 프로그램이 페스티벌 기간 내내 진행되었다. 이처럼 ‘글래스톤베리’는 음악 공연 외에도 수많은 볼거리, 놀거리, 할거리로 가득했다. 어린아이부터 중년층까지 다양한 세대를 포괄하는 이유, 가족 단위 참가자가 적지 않은 이유, 그래서 보편주의적인 페스티벌로 비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20000909 | 이용우 djpink@hanmail.net 관련 글 Sunny Days at ‘Glastonbury 2000’ 유람기 (2) – vol.2/no.19 [2000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