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cebo – Black Market Music – Hut/EMI Korea, 2000 결코 변화하기 싫은 나르시스트의 자기도취 플라시보(Placebo): 임상적인 효과는 없지만 환자의 긍정적인 심리를 자극하여 효과를 얻으려는 가짜약. 딱 맞는 예시는 아니지만 역사상 최고의 플라시보는 오 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가짜 낙엽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플라시보의 이번 앨범 [Black Market Music]은 가짜란 것을 무릅쓰고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효과를 주었는지… 플라시보는 1999년 상반기에 국내에서 가장 인기를 얻은 영국 록 밴드 중 하나였다. 영화 [텔미 섬딩]에서는 앨범 [Without You I’m Nothing]이 레코드 광고처럼 수시로 등장했다. 한편 이 앨범에서는 “Pure Morning”, “You Don’t Care About Us”, “Every Me And Every You”, “Without You I’m Nothing”, “Crawl”이 줄줄이 히트 행진을 벌였으며, 플라시보는 데이빗 보위의 (검증 받지 못한) 전기영화 [Velvet Goldmine]에도 특별 출연하고 영화의 타이틀곡인 “20th Century Boy”를 불렀다. 따라서 그들의 세 번째 음반이 기다려지는 당연한 일이고, 이번 음반만 전작처럼 성공한다면 플라시보는 라디오헤드를 잇는, 국내 록 매니아들의 투 다이 포(To die for) 밴드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영국의 모든 밴드들이 라디오헤드가 될 필요는 없겠지만… 하지만, 이번 앨범 [Black Market Music]은 과거의 플라시보 경력에 비추어 볼 때도 실망스러운 결과물이 되어버렸다. 영국의 한 인터넷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플라시보는 이번 앨범에서 큰 변화를 꾀했으며 자신들도 크게 만족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곡의 분위기나 브라이언 몰코(Brian Molko)의 창법은 큰 변화를 못 느끼게 하고 있다. 결국 자신들의 스타일의 답습과 새로운 시도를 적당히 얼버무린 앨범에 불과하다는 인상이다. 지글거리는 기타소리와 글램 록적이고 자신만만한 목소리를 공통분모로 모든 수록곡은 ‘빠르고 신나는 곡’, ‘빠르고 어두운 곡’, ‘느리고 우울한 곡’, ‘느리고 덜 우울한 곡’의 범주에 각각 속한다. 이는 곧 ‘2집의 “Brick Shit House”와 비슷한 곡’, ‘”Crawl”과 비슷한 곡’의 구분도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몇몇 새로운 시도를 들라면 첫 번째 싱글 “Taste in Men”이 케미컬 브라더스(The Chemical Brothers)의 곡처럼 들린다는 것이고, “Spite & Malice”에서 게스트 보컬 저스틴 워필드(Justin Warfield)가 랩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노랫말의 세계 역시 더욱 다양해졌다. “Spite & Malice”는 갱스터 랩다운 내용을 담고 있으며, “Haemoglobin”은 미국의 흑인 노예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모든 것을 제쳐두고 이 앨범이 그 나름대로 미덕을 갖고 있다면, 이는 듣는 이를 불안하게 만드는 “Taste in Men”과 플라시보 특유의 느낌이 잘 살아있는 “Blue American”, “Black-Eyed” 같은 곡이다. 이 곡 외에도 다른 모든 곡들이 수려한 멜로디와 리듬을 자랑한다. 따라서 끊임없이 고개를 드는 잡념(“이 기타 리프와 리듬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네”)만 단속한다면, 출근시간 지하철 속에서 이 앨범을 지루하지 않게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이 앨범의 가장 빼어난 곡은 바로 “Peeping Tom”이다. 관용어 사전을 찾아보면 ‘호색한’이라고 나와있는데, ‘훔쳐보는 탐’은 같은 제목의 영화에도 등장하는, 관음증을 가진 남자들의 대 선배격이다. 플라시보는 이 곡에서 탐의 인격체를 입고, 우울하고 절망 가득한 사나이의 심정을 노래한다. 전체적인 인상을 정리하자면 수록곡들이 전반적으로 고만고만하게 하향 평준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시보보다 앞서 컴백에 실패한 맨선(Mansun)과 더불어 플라시보의 다음 앨범 역시 어떤 모습일지 상당히 기대가 된다. 이 말은 이들의 성공적인 재기를 보고 싶다는 바램이다. 깔끔하고 명료한 멜로디의 락은 한물 간 걸까? 아니면 라디오헤드처럼 고독한 작가정신의 세계로의 동참만이 유일한 길인가? 20001014 | 이정남 rock4free@lycos.co.kr 6/10 수록곡 1. Taste in Men 2. Days Before You Came 3. Special K 4. Spite & Malice 5. Passive Aggressive 6. Black-Eyed 7. Blue American 8. Slave to the wage 9. Commercial for Levi 10. Haemoglobin 11. Narcoleptic 12. Peeping Tom 관련 사이트 플라시보 공식 홈페이지 http://www.placebo.co.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