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채(Leetzsche) – Leetzsche – Toshiba/EMI, 2000 사람을 나그네로 만드는 노래 ‘대중 문화가 대중의 지성을 파괴한다'(발리바르)는 말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아니, ‘문화’나 ‘예술’이라는 영역이 갖는 창조적 예외를 인정하지 못하는 좌파의 강박관념 정도로 생각하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의 서태지 논쟁이나 그것과 상관없이 더 빈곤해져만 가는 한국의 음악시장을 보면서 조금씩 그 말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에게 공통의 정념을 형성케 하는 ‘노래’라는 것이 몇 개나 있을까. 아니 그렇게 어려운 말 말고 오랫동안 사랑할 수 있고, 들을 때마다 새로운 감정의 고양을 느끼게 하는 그런 노래가 있느냐는 말이다. 아무리 잘 나가는 노래라도 길어봤자 한 달인, 단순히 일정 시기에 단기적으로 소비되고 결국 처분되는 이런 시스템 안에서는, 창작자와 수용자의 개인적 취향을 긍정한다 하더라도, 인간 공통의 감정을 불러일으킴으로서 공통의 인식과 공통의 정념을 형성할 수 있는 노래라는 가능성 자체가 봉쇄당하는 것이 사실이다. 오랫동안 사랑할 수 있고, 들을 때마다 새로운 감정의 고양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노래는 단지 작품의 ‘질’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유행(trend)이라는 것이 문화적 풍요로움이 아니라 산업이나 자본에 대한 봉사로 귀결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말초적인 감각만을 선호하게 되고 그것은 결코 ‘행복’이 아니라 ‘강요된 여가’일 수 있다는 점을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 그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제, 이상은(Lee-tzsche)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그녀를 “담다디”의 가수로만 알고 있든, “언젠가는”이라는 곡을 흥얼거릴 수 있는 정도의 관심이든, 절판된 그의 앨범발매를 위해 서명운동을 벌이는 매니아든, 이상은(Lee-tzsche)은 좀 더 특별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녀는 그 누구도 거부하기 힘든 ‘인기’라는 멍에를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예정된 답안’을 거부하는 몇 안 되는 가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녀는 ‘인기’라는 멍에 대신 ‘아티스트’라는 훈장과 빈곤하지만 풍요로운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이 ‘새로운 답안’이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이’보다 ‘얼마나 깊이’가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녀에게 과도한 기대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이번에 국내에 발매된 8집 [Lee-tzsche]는 1997년 외국에서 발매되었던 것이 새롭게 국내로 들어와 발매된 것이다. 그 중 6곡은 7집 [외롭고 웃긴 가게]에 수록된 곡들이며, 이곡까지 포함해 다른 곡들 모두 영어가사에 새로운 편곡으로 수록되어 있다. 앨범의 전반적인 성격은 명료한 팝적 리듬의 첫 곡 “Actually, Finally”를 제외하고는 6집 [공무도하가]에서 이어지고 있는 이상은식 스타일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7집 [외롭고 웃긴 가게]에서 일인세션을 했던 다케다 하지무(Hajimu Takeda)가 여전히 많은 역할을 하고 있으며, 현악까지 포함해 보다 풍요로운 음들을 들려주고 있지만, 그녀의 ‘노래’ 말고 다른 부분은 철저히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관된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주목할 점은, “Broken Pearl”같은 곡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작곡 능력과 사운드 운용은 한 명의 ‘아티스트’를 넘어 훌륭한 ‘음악감독’의 위치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방랑인 리채의 노래가 듣는 사람의 마음에 가져오는 것은 손쉽게 낫지 않는… 깊은 본성의 깨우침이다…”라는 작가 강신자의 설명처럼 앨범 전곡들이 고요히 침잠하면서 듣는 이의 맘을 서서히 만져주는 그런 분위기의 곡들로 가득 차 있다. 그녀에 대한 과한 애정이 이렇게 긴 글을 만들었지만, 이렇게 ‘노래’가 무엇인지, ‘노래’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그런 ‘노래’ 자체의 근원적인 힘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가수가 있다는 사실이 고마울 뿐이다. 단 하나, 불만은 그녀의 노래를 너무나 듣기 힘들다는 사실이고, 그 사실에 그녀 자신도 쉽게 반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건 아주 개인적인 불만이지만, 그녀가 갖고 있는 모순이자 한계일 수도 있다는 여전한 의문은 남는다. 20000929 | 박정용 jypark@email.lycos.co.kr 7/10 수록곡 1. Actually, Finally 2. House 3. A try-on 4. Desert 5. Lonely Loony Lounge 6. Super Eraser Medium 7. Simple Like People 8. Boiled Egg 9. Eternity 10. Broken Pearl 11. Release Your Mind 12. Breeze 관련 글 Lee-tzsche [Asian Prescription] 리뷰 – vol.1/no.2 [1999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