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1018101908-drivingmecrazy미국에서 1995년에 발매된 이 앨범은 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조용한 불’로 묘사되는 슬로우 코어 장르를 독자적으로 스타일화시킨 씸의 음악적 에너지가 최고조에 달해있는 모습을 이 앨범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멤버 구성은 박수영(Sooyoung Park, 보컬, 기타), 이승호(미국명 John Lee, 기타), 신성우(미국명 William Shin, 베이스), 그리고 크리스 맨프린(Chris Manfrin), 이렇게 4인조이다. 이 앨범을 낼 당시에는 이승호가 빠져 있었고 대신 기타리스트 렉 슈레이더(Reg Shrader)가 밴드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승호는 씸과 함께 미국 인디 씬에서 명성을 날리던 어미니어쳐(a-Miniature)라는 밴드의 멤버였는데, 1999년부터 씸에 합류하여 함께 활동하고 있다.

씸은 인디 밴드이기를 고집한다. 한 때 게펜 레이블과의 계약이 이야기되기도 했으나 씸은 심사숙고한 끝에 메이저 씬으로 넘어가 시장의 소모품으로 힘을 소진하는 밴드가 되기보다는 자신의 음악적 독립성과 건강함을 지켜내기 위해 인디 밴드로 남는 쪽을 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씸은 어떤 면으로는 자신의 음악적 지속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심에 찬 전략을 세워내며 미국이라는 수퍼 머티리얼한, 모든 것이 돈으로만 이야기되는 사회에서 버티려고 노력하는 밴드이다. 이만한 자기성찰 속에서 자신을 이끌어가는 밴드는 사실 만나기 힘들다. 그런 밴드가 한국계 밴드라는 사실이 우리의 가슴을 뿌듯하게 한다.

앨범으로 돌아와 보자. 이 앨범에는 씸의 정수가 담겨 있다. 미국의 록 평단을 통해서도 [Are You Driving Me Crazy?]는 최고의 찬사를 받은 앨범이다. 내 생각으로는 1990년대에 나온 수많은 미국 얼터너티브 록 계열의 앨범들 중에 베스트 50 안에 꼽을만한 명반이다. 씸의 음악적인 견인력은 매우 선구적이다. 그들의 노래에서 미국 백인들의 활력 넘치는 리듬감을 발견할 수는 없다. 사실은 그 부분이 씸 음악의 핵심이다.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수많은 백인 밴드들이 하지 못한 것을 씸은 자신의 몸으로부터 끌어내고 있다. 마냥 즐겁기만 하고 마냥 힘에 넘치기만 하는 사람들이 도달하지 못하는 내면적인 깊이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주변부적인 뿌리로부터 비롯하는 어떤 슬픔을 중심으로 음악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표현법은 미국 록큰롤 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방식이다. 물론 씸은 자신들이 심플하고 간결한 록큰롤 뮤지션이라는 걸 잊지 않는다. 터질 때는 터져오르고 마는 드라이브 감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 도달하기 위해 씸처럼 많은 굴곡을 곡 안에 포괄하고 있는 밴드는 별로 없다.

첫 곡 “Berlitz”는 조용한 기타 아르페지오와 박수영의 드라이하면서도 내적인 호소력을 지닌 목소리로 시작하여 점차 분위기가 고조되는 씸 특유의 드라이브감을 발휘하고 있는 곡. 두 번째 곡 “Hey Latasha”는 이 앨범에서 싱글로 커트되어 인상적인 뮤직 비디오로도 제작된 노래이다. 푸른 파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앨범 자켓과 걸맞게 뮤직 비디오도 넘실대는 겨울 파도의 묘한 울렁거림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암시적인 비장함을 머금은 서막에서 비롯하는 힘이 코러스 부분의 깊이 있는 분출로 이른다. 세 번째 곡 “Port of Charleston”은 느리고 차분한, 서정적인 노래이다. 이런 노래를 들으면 씸의 음악적 뿌리 가운데 닐 영(Neil Young)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다. 읊조리는 듯한 박수영의 보컬이 매력적이다. 다음 곡 “Rainy Season” 역시 비슷한 계열의 노래라 할 수 있다. 씸의 음악은 참 우울하고 낭만적인 데가 있다. 시카고의 흐린 하늘과 긴 겨울을 연상케 하는 감상적인 곡인 이 노래의 중간에 간결하게 흐르는 스트링과 브라스 선율은 참 인상적이다. 다음 곡 “Two Is Enough”는 물론 조용하고 차분한 굴곡을 몇 번 뒤척이긴 하지만, 앞의 두 곡과는 대조적으로 스트레이트하고 강하다. 아무리 몽환적이라 해도 이들 음악은 역시 록큰롤이다. 심플하고 강렬한 록큰롤의 전통에서 보더라도 씸의 음악은 정통성이 있어 보인다. 이어지는 곡 “Haole Redux” 역시 심플하고 아름다운 록큰롤이다. 씸의 특징 중의 하나는 마이너가 아니라 메이저를 가지고 슬픔을 표현한다는 것. 메이저의 화음들이 이토록 슬프게 작용하는 걸 씸의 음악 이외에서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 슬픔은 결국 묘한 희망을 내포하고 있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 [Haole Redux]는 그런 양면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노래이다.

일곱 번째 곡 “Tuff Luck”은 다시 조용한 노래이다. 그러나 조금 거칠게 이야기한다면 이 노래는 뚝심이 있다. 한국 사람이 나눠 가지고 있는 뚝심이 툭툭 던져내는 간결한 멜로디와 리듬감 속에서 발견된다고 하면 무리한 해석일까? 어쨌거나 이 서정적인 노래에서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건 그런 것들이다. 그 뚝심의 뿌리에는 다음 곡 “Broken Bones”의 분노와 아픔이 머물러 있다.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는 박수영의 보컬 스타일로서는 예외적으로 간헐적으로 비통한 뒤틀림이 터져 나오는 걸 들을 수 있는 곡이다. 아홉 번째 곡 “Sometimes I Forget”에 이르면 비틀거리고 힘에 부치지만 그 모든 아픔을 거두어 다시 떠나려는 의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 앨범이 명반인 것은 그러한 몸의 움직임들이 노래들과 자연스럽게, 그리고 절절하게 밀착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이쯤 되면 음악이니 뭐니 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러운 목소리의 자기 토로로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마지막 곡이자 열번 째 곡인 “Petty Thievry”는 스트레이트하게 달려가는 곡이다. 1999년에 한국에 왔을 때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하여 언플러그드 라이브 버전을 들려주기도 했었는데, 이 노래는 발랄하고 즐겁고 힘있다. 모든 것들을 딛고, 잊고(forget), 달린다. 그들은 록큰롤 가수다.

어쩌다 씸의 음악을 너무 감상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나 모르겠다. 그러나 씸의 음악을 들을 때면 그들을 만났던 개인적인 추억과 여러 주변 정황, 그리고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것 따위 때문에 객관적이고 냉정한 비평의 시각을 자꾸 잃어버린다. 1999년 4회 ‘소란’ 공연 때 들려 주었던 이들의 빛나는 라이브 사운드가 귀에 쟁쟁하게 머문다. 2000년 6월에 그들이 다시 온다니까, 그 때 그 광채를 다시 느껴보려 한다.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20000515 | 성기완 creole@nownuri.net

* 이 글은 [Are You Driving Me Crazy?] 라이센스 앨범 라이너 노트입니다.

수록곡
1. Berlitz
2. Hey Latasha
3. Port of Charleston
4. Rainy Season
5. Two Is Enough
6. Haole Redux
7. Tuff Luck
8. Broken Bones
9. Sometimes I Forget
10. Petty Thieve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