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00년 9월 3일
장소: 예술의 전당 야외극장

20001018094325-wild9월 2일과 3일 저녁 8시 예술의 전당 야외극장에서 들국화의 콘서트가 있었다. 내가 찾아간 날은 일요일 저녁이었는데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젊은 시절 가슴을 콩닥콩닥거리게 했던 ‘형님’들이 다시 모였다는데 안 찾아뵐 수 있냐는 마음으로 공연장을 향했다. 차들이 엄청 많아서 주차하는데 애를 먹었는데 다행히도 평소에 차를 못다니게 하려는 바리케이드를 치워주는 ‘선처’로 공연장 가까운 곳에 주차할 수 있었다.

차가 많은 걸 보고 연로한 분들이 공연을 찾은 것으로 추측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았고 젊은 친구들도 꽤 많았다. 물론 같은 장소에서 몇 달 전 공연을 가졌던 델리 스파이스의 팬들에 비하면 전반적으로 연로한 편이었지만. 30살을 기준으로 그 아래의 젊은 애들과 그 위의 늙은(?) 것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는 요즘 ‘재야 운동단체 집회’를 제외한다면 드문 일이기도 했다. 나는 20대의 들국화 팬이 어떤 음악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공연 문턱에서 부부동반으로 온 시인 김정환을 만났는데 ‘좌파 문인’이었던 그가 들국화 형님들과 평소에 친한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공연 시간이 조금 남아 가기 싫다는 마누라를 설득하여 대기석을 찾아 찬권형, 성원형에게 인사를 했지만 성원형은 ‘누구였지?’라고 말해서 머쓱해지기도 -_-. “저번에 델리 스파이스 CD 드린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니 “아 맞아”라고 말하면서 연락처 좀 적어달라고 했지만 메일로 보내드린다고 하고 나왔다. 그때 평론가 강헌의 모습도 보였는데 서로 눈길이 맞지 않아서 인사는 못 나눴다. 마누라가 그걸 보고 “라이벌이라고 인사도 안 해요?”라고 농담을 던져서 피식 웃고 말았다. 전인권은 그의 전매특허인 ‘공연전에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발성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비가 한차례 퍼부은 뒤였지만 습기가 불편할 정도는 아니라서 초가을 밤의 야외무대의 분위기는 꽤 좋았다. 공연이 임박해 오니 팬클럽에서 온 듯한 ‘단체복’의 젊은이들이 “행진”을 불렀는데 키를 너무 높게 잡아서 고음이 필요한 후렴에 가서는 합창이 안되고 혼자 고래고래 소리지르다가 끝나버렸다. 그리곤 강헌이 나와서 뭐라뭐라 그러고 나갔고(라이벌이라서 자세히 얘기 안함^^), 오프닝으로 어떤 아저씨와 아가씨(?)가 나왔는데 엉뚱하게도 “Ich Liebe Dich”를 불렀다. 이 곡이 끝나고 아가씨는 퇴장하고 아저씨는 자기가 들국화 멤버들의 친구인데 자기는 공부를 잘해서 미국에서 의사 하면서 살고 있고, 들국화 멤버들은 공부는 안 했어도 한 길을 걷더니 오늘날 이렇게 됐다는 식의 말과 센트럴 파크에서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이랑 셰릴 크로우(Sheryl Crow)랑 공연하는 거 봤다는 등의 재담을 하더니 퀸(Queen)의 “Love of My Life”를 불렀다. 소시적에 통기타 좀 쳐봤던 솜씨였지만 왠지 “우리들 세상”[1970년대 학교 강당에 고딩들 몰아넣고 하던 KBS 프로그램. 사회는 현재 ‘가요무대’ 사회자인 김동건]에서 장기자랑하는 듯한 분위기같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이윽고 들국화가 등장했는데 전인권, 최성원, 주찬권 세 명뿐이었다. 세 명으로 어떻게 하려나 싶었는데 전인권은 마이크를, 주찬권은 스틱을 잡고 최성원은 키보드 앞에 앉았다. 결국 기타와 베이스 없는 록 음악이 나왔는데 첫 곡은 “He ain’t heavy, he’s my brother”(원곡은 the Hollies)였고, 이후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매일 그대와” 등 15년 전의 히트곡들을 연주했다. 검정색 교복을 입고 연주하는 음악은 뭔가 1970-80년대 멋도 모르고 팝송 좋아했던 사람의 정서를 자극하는 모습이었다. 허성욱과 손진태(혹은 조덕환 혹은 최구희)의 공백을 아쉬워하고 있던 나와는 달리 관중들은 그것만으로도 좋은 듯해서 나도 덩달아 좋았다. 전인권의 요즘 목소리야 장안에 소문이 파다하지만 그래도 ‘결’이 느껴질 때 찌릿찌릿한 건 여전했다. 노래를 잘해야 맛도 아니고 들국화가 내 앞에 존재하고 들국화를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흥을 돋우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제일 앞 줄 부근의 팬클럽 회원인 듯한 애들이 태극기를 휘날리는 것도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분위기가 바뀐 건 어둠이 완전히 깔리고 게스트들을 초빙하면서부터였다. 김장훈이 나와서 빨강 치마를 입고 “오페라라라라라”를 비롯한 노래를 불렀는데 몸이 어디가 아파서라고 하지만 되게 못 불렀다. 그에 이어 최민식, 이효정, 박경림, 이주노 등이 나와서(하도 많이 나와서 다 기억나지 않는다 -_-) 축하의 말을 한마디씩 하였고 그 다음부터 제창형 대곡들이 줄을 이었다. 게다가 최이철을 포함하여 사랑과 평화의 멤버들이 무대 위에 올라와서 악기를 잡으면서 사운드는 빵빵해져 갔다. 최성원은 키보드와 베이스 기타를 번갈아가며 연주하는 분주한 모습이었다. “사노라면”, “돌고 돌고”같은 ‘에브리바디 싱얼롱’형 대곡들이 연주되는 동안 무대도 객석도 질펀한 분위기에 휩싸였고, 질펀함이라면 들국화를 능가하는 사랑과 평화의 히트곡 “한동안 뜸했었지”, “장미”도 연주되었다. 이때부터는 ‘음악을 감상하는 일’은 공연의 목적이 되기는 힘들었다.

다행이게도 이은미가 두 번째 게스트로 나와서 분위기를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열창형 가수 이은미의 무대가 차분했다고? 다름 아니라 반주가 MR(‘녹음된 반주’라는 콩글리시)이기 때문이었다. 노래는 잘했고 밴드를 대동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이해하지만 MR을 워낙 듣기 싫어하는 나로서는 좀 그랬다(사견이지만 MR 반주를 틀고 노래부르는 게스트의 콘서트의 관행으로 굳어지는 듯한데, 그러려면 차라리 오프닝을 길게 하고 게스트는 없애는 게 나을 것 같다).

공연 후반부(‘3부’쯤 되는 듯하다)에서 전인권은 신곡 “저 푸른 소나무”와 “늦지 않았습니다” 등을 불렀다. 최성원도, 주찬권도 없던 [들국화 3집]에서 잠시 선을 보였던 ‘한국적 가락’이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하여 청중 대부분은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들국화의 전성기의 작곡은 못 나오지 않을까’라는 불안감마저 감돌았다. 그때쯤 최이철과 더불어 일본인 기타리스트(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겠다)까지 합세하여 “그것만이 내 세상”을 연주했다. 중간 부분에서의 기타 솔로는 ‘그런 거장적 연주는 별로’라는 대세에 합류한 나로서도 듣기 나쁘지 않았다. ‘잘난 척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후렴부에서 전인권의 노래는 오래 전부터 마이크를 관객에 대는 시간이 많았지만 ‘송가’로서의 가치는 여전해 보였다. 앵콜부에서는 권인하가 나왔고 김장훈도 다시 나와 전인권과 함께 레드 제플린의 “Rock’n’roll”까지 연주했다. 내가 본 단독 공연 중에는 최다 게스트 신기록을 세웠다.

공연이 끝나니 푸짐한 잔치상을 모두 해치운 뒤의 포만감 비슷한 감정이 밀려왔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정신도 몽롱한 기분 말이다. 노래를 따라부르느라 목도 헐헐해진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 이번 공연은 1998년의 공연보다 감흥이 덜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그때는 정말 ’11년만에’ 그들을 다시 보았다는 이유도 작용했겠지만, 키보드와 코러스를 제외하고는 멤버 4명 주축으로 꾸렸다는 이유가 더 컸다. ‘팬과 함께 직접 교감하는’ 기분이 강했던 반면, 이번에는 ‘그들(연예인?)과 함께’라는 기분이 더 강했다. 그때도 김장훈과 강산에 등이 게스트로 등장했지만 이렇게 왁자한 느낌은 아니었다.

“새로운 음악적 조류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네”라는 말이 불혹을 넘어선 들국화 멤버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들에게 이제 ‘언더’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들국화에게 기대하는 것이 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다시 한번 그때의 파란을 재현해 보는 것? 후배 뮤지션들을 챙겨주면서 선배 밴드의 전범이 되는 것? 어질어질한 주류 음악계에 ‘음악성 있는 주류’를 재확립하는 것? 노스탤지어만으로도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 한국을 넘어 범아시아적 록 밴드가 되는 것(이 말은 강헌이 공연 팜플렛에 쓴 말이다)? 공연에서 느꼈던 카타르시스가 서서히 중화되면서 복잡한 생각이 밀려 왔다. 문득 ‘음악만 듣고 행복했던 시절’이 그리워졌다. 웬 노스탤지어? 20000916 | 신현준 homey@orgi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