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1025045809-hanyoungae한영애의 공연을 갔다 왔다. 단독공연만 따지면 다섯 번째쯤 되는 듯하다. 한 음악인의 공연치고는 많이 본 편이다. 장소는 예술의 전당(나는 이 말 뒤에 ‘포’자를 집어넣고 싶다. 진심으로) 안에 있는 자유소극장이었고, 일시는 12월 21일 그러니까 열흘간의 공연 중 네 번째였다. 지난 1995년 같은 자리에서 공연 중이던 한영애를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지금 ‘US line’의 필자 중의 한 명(과 그의 프로토-엄처)를 만나 함께 봤다(물론 우리는 공짜였고 그들은 돈내고 봐서 공연 끝나고 씩씩거리는 그를 달래러 인근의 패밀리 레스토랑을 들렀던 기억이 난다. 필호야, 그때 내가 돈 낸 거 맞지? 음료만 마셨나?).

별 쓰잘데기 없는 걸 다 쓴다는 핀잔이 들리지만 공연을 보러 간다는 일은 어쩔 수 없이 과거를 회상하는 일과 불가분한 듯하다. 더구나 한영애처럼 ‘팬과 함께 나이들어가는’ 흔치 않은 뮤지션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무대와 객석 등 하드웨어들은 그때보다 나아진 게 없어 보였다. 스피커나 조명도 따로 불러서 급하게 설치한 듯한 느낌이 역력했다. 관객들의 숫자는 200명이 넘어 보였는데 늦게 간 탓에 2층의 좋지 않은 자리를 잡아야 했다. 복도까지 관객을 앉혀서 정원 이상을 채우는 소극장에서 변의나 뇨의를 느꼈을 때의 엄청난 곤란함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은 있었다. 어쨌든 흥행에 실패한 것 같지는 않았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관객의 평균연령층이 생각보다 많이 높았다는 점이다. 공연 중간에 특별한 관객 두 분을 무대에 모셨는데, 결혼 30주년을 기념하여 강원도 횡성에서 올라온 노부부였다. 멋쟁이 할아버지, 할머니였다. 나머지 관객들도 대략 30~40대가 주류였고, 젊은 층이 오히려 드문 편이었다. 문득 나는 ‘열린 음악회’같은 분위기가 되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염려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나이든 층이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초대되었다고 하면 비슷하게 설명이 될까.

하지만 수다로 일관한 것은 아니었다. 무대의 주인은 ‘앙징맞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파란 의상을 입고 나와 마이크도 대지 않은 채 “안녕하셨어요”라고 인사했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나무에 물을 주는 것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평소처럼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느낌은 따뜻한’ 멘트와 더불어. 곧 “감사의 시간”이 처음 곡이었는데, 오리지널 레코딩과는 달리 북소리(이때는 드럼이라기 보다는 북이라고 하는 게 어울린다) 장단에만 맞추어 불렀다. 그 주술적인 목소리는 여전했다. 두 번째 곡인 “모습이 변한다 해도”도 원곡과 달리 느린 템포의 발라드처럼 불렀다. 그 세 번째인지 네 번째인지 순서를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여울목”은 후렴부분부터 정박의 테크노 비트가 들어갔다. 처음에는 ‘이건 실패야’라고 속으로 뇌까렸지만 듣다보니 ‘그럭저럭 어울리는’ 수준을 넘어서는 걸 느꼈다. 그 순간 왜 한영애의 노래는 꼭 ‘라이브’로 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이유가 떠올랐다. 단지 원곡과 다르게 연주한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안 본 사람한테는 비밀이다. 그래봐야 젊은 친구들이 볼 것 같지도 않지만.

중반부에서는 잠시 관객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 시간이 있었다. 연주자들이 의자에 앉았고 이전 공연에 비하면 ‘말’도 좀 많았다. 와중에 발라드 “마음 깊은 곳에 그대로”와 포 넌 블론즈(4 Non Blondes)의 “What’s Up”을 불렀다. 인터넷을 통해 ‘한영애를 통해 듣고 싶은 노래’에 많은 신청이 왔던 곡이라고 한다. 린다 페리에 못지 않게 혹은 더 잘 불렀다(그런데 린다 페리는 요즘 뭐할까? ‘열린 음악회’에 코걸이하고 나온 뒤 소식이 없네).

이때부터 지원이가 보채기 시작해서 리듬에 맞추어 손바닥치고 놀아주느라 공연에 집중을 못했다. “조율”을 좋아하는 지원이는 “그 노래 언제 나와?”를 연신 물어댔다. 그러는 사이 한영애의 좀 강한 곡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누구 없소”는 재즈 풍으로 편곡해서 불렀고, “코뿔소”와 “말도 안돼”는 오리지널과 비슷하게 연주했다. “말도 안돼”는 어떤 영화의 엔딩에 삽입된 사연으로 인해 다시 한번 곱씹어서 들을 수 있었다. 불만스러운 것은 한국의 청중들은 록 음악을 들을 때도 백비트가 아니라 다운비트에 맞춰 박수를 치는가라는 점이다. 내가 듣기에 그러면 전혀 흥이 안 나 보이는데… ‘민족성’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건가.

어느 덧 1시간 30분이 지나 마지막 곡인 “난다(비상구)”는 미리 녹음된 루프와 리얼 드러밍이 어우러진 리듬 위에서 붕붕 뜨는 듯한 기분을 안겨 주었다. 매시브 어택(Massive Attack)의 공연이 이럴 지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칠 즈음 관객들은 ‘앵콜’을 연호하였다. 상투적인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보통 ‘예정된’ 앵콜을 준비할 때 관객들의 소리가 작으면 좀 머쓱거리면서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날은 그렇지 않았다. 몇몇 젊은애들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차분하게 앉아서 박수만 치던 사람들이었지만 ‘앵콜’을 외치는 소리만은 우렁찼다는 뜻이다. 다시 등장한 한영애는 예상 외로 트로트곡인 “사랑밖에 난 몰라”를 ‘재즈풍’으로 “봄날은 간다”를 ‘테크노풍’으로 블렀다. 트로트지만 ‘구린’ 느낌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조율”. 그리고 공연은 끝났다.

전체적으로 공연장의 분위기는 차분한 편이었고, 그다지 ‘혁신적’인 것도 많지 않았다. 또 리듬이 다소 처지는 듯한 기분도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위험한 순간도, 지루한 순간도 없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무대를 장악하는 한영애의 ‘동작’도 크게 작용하는 듯하다. 특히 가끔씩 기를 모으는 듯한 동작은 숨을 멈추게 할 정도의 몰입을 강제한다. 일거수 일투족을 표현하기는 힘들다. 그 순간 든 생각은 ‘공연예술인’이라면 ‘좋은 엔터테이너’가 되어야 한다는 평소의 지론을 확인함과 동시에 진지한 젊은 뮤지션에게 이런 면이 너무 없다는 생각도 다시 떠올렸다. ‘인디 밴드’, 특히 보컬을 맡은 싱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연기 수업’이라는 잡생각도. 아무튼 무대 위에서의 자연스러움이란 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연출과 불가분해 보인다.

공연이 끝나고 대기실에서 인사치레를 하면서 유명 연극배우의 모습도 보았고, ‘팬클럽 코뿔소’에 가입하라는 젊은애들의 목소리, CD를 고르고 싸인을 받으려는 ‘아줌마’들의 모습을 뒤로 하고 공연장을 빠져 나왔다. 아직까지는 대한민국에서 한 명의 ‘가수’가 기획한 공연 중에 이보다 나은 공연은 없을 듯하다. 한 명의 음악인으로서 면면하게 음악 활동을 한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힘든 것이라는 생각도. 문득 란이나 진영이가 40대 아줌마가 되어서 델리 스파이스의 공연을 본다면 이런 기분일 거라는 생각도 하면서. 멈춰 서 있는 듯하면서 날아오르는 일은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이런저런 공상을 하면서 남부순환로를 들어섰더니 공연 끝나고 돌아가는 차량과 평소처럼 진행하던 차량이 합쳐져 꾸역꾸역 막혀 있었다. 공상은 사라지고 현실이 다가왔다. 19991223 | 신현준 homey@orgio.net

관련 사이트
한영애 팬클럽 ‘코뿔소’
http://han.withyo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