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뭔 바람이 불었는지 모 방송사와 모 신문사에서 “이번에 저희가 테크노 음악 특집을 하는데요… 좀 도와주세요”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신문사에 글쓰는 거야 뭐 직업이 직업인 관계로 그러려니 했지만, 방송사에서 갑자기 웬일인가 했더니, 요즘 가요계에 테크노가 뜨고 있단다. 순간 ‘가요평론가 주제에 가요도 안 듣는가’라는 자괴감이 엄습한 탓인지 보통 때같으면 “제가 비디오가 안되서 TV는 좀 그렇습니다”라고 정중히 사과했을 일이지만 이번엔 전화기를 꽤 오래 붙들고 앉아있었다. 살랑거리면서 인터뷰를 부탁하는 ‘작가 언니’와 승강이를 하던 중 내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돈 주면 할께요.” 이러면 대충 “지가 뭔데 TV에 얼굴 내보내준다는데 돈까지 바래. 웃기지도 않는 인간이군”이라는 말이 목구멍에 맴도는 듯한 톤으로 전화를 끊는 게 다반사이다. 그런데 이 날은 “예, 드리죠”하는 게 아닌가. 별 수 없이 나는 올가미에 걸려든 참새처럼 푸득거리면서 약속 장소를 향해야 했다. 그 방송은 [한밤의 TV연예]라는 프로그램이었다. 할 일 없을 때 마이 러버와 함께 소파에 앉아서시간 때우던 프로였다(그때 우리 대화는 주로 ‘연예인들 씹어대는’ 일이다). 아무튼 홍대 앞의 어떤 미술 학원 건물을 임시 스튜디오 삼아 나는 장장 30분 간 떠들어댔다. 평소 발음이 여기저기 새고 긴장하면 말까지 버버거리는 본인의 스피치 실력이지만, 이날은 웬일인지 말빨이 섰다. ‘회견료’는 불행히도 현장에서 전달되지 않았지만(지들이 받을 때는 현장일텐데… 아, 이 말은 유언비어이니 취소해야겠다) “인적사항과 계좌번호를 적어주시죠”하는 PD님의 말을 믿고 ‘회견장’을 유유히 빠져 나왔다. 이틀 뒤 D 데이가 다가왔다. 첫 순서는 ‘백지연 친자확인 소송사건’을 둘러싼 소식이었다. 아, 나같은 ‘고학력자’가 저런 프로그램에 얼굴을 내비치다니. ‘아들이 ‘경제학 교수’가 되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연로한 부모님이 보시면 어떻게 하나…’라고 걱정하고 있으니 ‘패션 모델로 변신한 축구선수 안정환’ 이야기가 이어졌고….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순간, 테크노 특집이 드디어 방영되었다. 그런데 초장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최근 한국에서 테크노 열풍의 핵은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일명 ‘도리도리 춤’이라고 그러는 것 아닌가. ‘시범’을 보이기 위해 등장한 인물은 최창민, 채정안, 구피, 스페이스 A같은 애들이었다. 이정현이라는 인물이 몇 뮤직 비디오에서 춤 솜씨를 선보인 게 화제가 되었다는 말도 나왔다. 이정현이 누구지? ‘아, 요즘 내가 열라 싫어하는 모 영화감독의 면피용 영화에서 데뷔했던 그 애구나’하는 순간 젝스키스나 H.O.T.같은 ‘수퍼스타’들도 신보에서 테크노를 도입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아하, 테크노는 히트가요의 ‘반주’이자 ‘안무’구나. 그러다보니 요즘 죽을 쑤고 있는 야구 팀을 소유한 재벌사의 PCS폰 광고에서 예쁘디 예쁜 여자 탤런트가 연출하는 로봇같은 동작이 ‘테크노’라는 말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땐 별로 심각하게 듣지 않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의문이 풀린 건 ‘테크노 춤’을 유행시킨 게 독일 출신의 ‘테크노 팝’ 그룹 666이라고 한다. ‘한’ 테크노 그룹의 춤을 테크노의 ‘모든’ 것이라고 수용하는 신기하고 놀라운 능력. ‘머리에 뿔 달아야 테크노’ 라는 말이 안 나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나는 왜 안 나와’하면서 불퉁거리고 있는 중 지원이의 환호 소리와 더불어 드디어 본인의 모습이 등장했다. 그런데 뭐야 이거. 30분 동안 떠들게 해놓고 20초도 안 나오잖아. 그리고 방송에 나온 멘트라곤 “테크노는 본래 언더그라운드 클럽에서 DJ들에 의해 만들어진 음악인데… 지금은 그렇게만 보기는 힘들고 주류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 정착했습니다”로 끝이었다. ‘이건 내가 할 말의 요지를 말하기 위해 전반적인 배경을 설명한 부분인데… 이건 정말 지엽적이고도 지엽적인 말인데, 젠장 뭐야’라고 생각하는 사이 나의 모습은 사라져버렸다. 내가 그토록 강조하고 떠들었던 이야기들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아빠, 대중음악 평론가가 뭐야”라고 묻는 지원이의 질문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내가 이런 말해봤자 “그런 줄 몰랐어? 그럴 줄 모르고 한 사람이 병신이지”라고 할 사람이 주위에 수두룩하니 이건 낭패도 보통 낭패가 아니다. 그래도 국내 최고의 테크노 음악 동호회인 하이텔 ’21세기 그루브’에서 부시삽까지 지냈는데(최근에 활동 부진으로 짤렸지만), 회원들이 이걸 보면 나를 뭘로 볼까 민망하기 그지없다. 그때 내 속에서 이런 자성의 소리가 울려퍼졌다: ‘컷 앤 믹스’, ‘컷 앤 페이스트’는 테크노 뮤지션보다 방송국 편집국이 훨씬 더 잘하는군… 쩝. 아무튼 소인배의 심성 상 심한 모욕감을 느켰다고 생각하는 내 속에서는 서서히 전의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테크노가 뭐 정통이 어딨고 이단이 어딨느냐. 수용하기 나름이지’라는 유연한 입장을 포기하기로 작정했다. 처음 괘씸하게 생각된 점은 인터뷰에서 내가 했던 말들이 리포터를 맡은 맨질머리 재즈 드러머인 N모씨, 아니 NK모 씨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내가 아는 걸 그 사람이라고 모를쏘냐’라는 생각은 시간이 좀 지난 뒤에야 든 생각이었을 뿐 그 순간은 전혀 안 그랬다. 나는 ‘쳇, 인터뷰 화면 보면서 쌥치기했군’이라고 이기죽거리고 있었다. 물론 리포터는 내가 하지 않은 말도 많이 했다. “테크노는 개인적인 음악… 세기말… 젊은이…” 머리가 좀 어지러워졌다. 그러나 클라이맥스의 순간은 아직 남아 있었다. 화면이 사라진 뒤 리포터는 그 옆에 앉은 또 한 명의 리포터에게 “힙합과 테크노의 차이가 뭔가요”라고 물었다. 답변해야 할 사람은 평소에 나와 몇 번의 안면이 있는 평론가 L씨였는데, 아마도 사전 협의가 없었던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테크노는 전자 음악이고, 힙합은 메시지가 있는 음악이죠”. 현기증 증상이 더욱 심해져서 그 뒤에 한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도대체 당신 생각은 뭔데’라는 묻는 분들을 위해 이젠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정리하면서 나의 방송 수난기를 마친다. 구미일 각국에서 테크노 음악은 댄스 클럽의 언더그라운드 문화로 시작하여(1980년대 초중반), 청년 중심의 대중문화 현상으로 발전하고(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음악 비즈니스계를 통해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 성립되었다(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는? 한마디로 ‘중간 생략’, ‘사지절단’, ‘거두절미’다. 하지만 테크노의 한국형 ‘매스 미디어 버전’에 대해 ‘저건 테크노도 아니다’라고 폄하하지는 않을 작정이다(왜냐하면 이렇게 말하면 ‘사대주의’, ‘엘리트주의’라고 욕먹기 때문이다, 히히). 그런데 이상한 게 있다. 한국에서 ‘진짜’ 테크노를 추구하는 인물들은 ‘말’이 별로 없다. 또한 자신이 추구해 왔던 음악에 테크노의 방법론을 부분적으로 도입하는 뮤지션들도 ‘이게 테크노입네’라는 말은 없다. 오직 이걸로 한몫 봐야겠다고 눈이 벌건 인간들만 ‘저희가 이번에는 테크노를 했는데요’ 라고 떠든다. 이런 테크노는 ‘세기말’, ‘밀레니엄’ 어쩌구 하면서 판매되고 있다. ‘징한’ 인간들이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인데 어쩌겠나’라는 생각도 들지만, 나같은 사람 정신 건강도 좀 배려해 주면 어디 덧나나. 내 주위엔 나같이 쪼다같은 사람도 꽤 많은데. 19990915 | 신현준 homey@orgi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