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페미 쿠티로 돌아오자. 통속적인 질문도 다시 던져 보자. 페미 쿠티는 아프로비트의 새로운 형식의 창조자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시장을 노리는 존재인가.

앞서 말했듯 페미는 19살 되던 무렵 펠라가 영어의 몸이 되자 밴드를 물려받았고 펠라가 석방된 뒤에도 앨토 색서폰 주자로 활동했다. 1989년 아버지로부터 독립한 뒤 그의 밴드의 연주를 지켜본 아버지는 “넌센스”라고 일축했지만, 2년 뒤에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한다. 그렇다면 페미는 줄리안 레넌보다는 지기 말리에 가깝다. 이유는 아들의 음악이 아버지의 음악보다 대중적이며, ‘현대적 영향’에 민감하다는 뜻이다(참고: 지기 말리의 음악은 초기에 ‘레게의 가장 팝적 형태’라는 평을 받았다).

 20010320044207-01-Femi20Kuti사진 설명 : 페미 쿠티, ‘긍정적 힘(positive force)’의 표정.
페미의 세 번째 정규 앨범인 [Shoki Shoki]은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 아메리칸 훵크를 연상시키는 스타일이다. 특히 베이스 라인과 기타 리프와 관악기가 그렇다. 그렇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훵키한 리듬은 때로 정글의 브레이크비트처럼 무자비하게 몰아치고, 하우스 음악으로부터 영향받은 듯한 피아노도 종종 나오고, 콩고의 수쿠스(soukous)로부터 영향받은 기타 주법도 종종 등장한다. [빌보드]의 표현을 따르면 “빅 밴드 작업의 아프로비트의 토대를 레어 그루브와 DJ의 브레이크비트 등 현대의 영미 클럽 음악과 솔기없이 접속한” 음악이다. 비영미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온(그러면서 ‘월드 뮤직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데이비드 바이언(David Byrne)도 페미 쿠티의 공연을 보고 “부분적으로 존 콜트레인이고, 부분적으로는 제임스 브라운이고, 그러면서도 전적으로 아프리카적인 훌륭한 공연”이라는 평을 했다. 페미 쿠티의 음악은 선진적 댄스 음악을 수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다시 아프리카화(reafricanization)’하고 있다.

페미 쿠티의 음악이 ‘나이지리아 음악’에 그치지 않고 미국과 유럽의 댄스 클럽에도 파장을 미치고 있는 사실은 이런 특징과 무관치 않다. 1999년 페미는 그의 밴드 포지티브 포스를 이끌고 미국과 유럽의 클럽가에서 선풍을 몰고 온 바 있고 3월에는 뉴욕에서 대대적인 공연을 가졌다. 이런 활동은 미국판 앨범에 세 개의 리믹스 트랙이 보너스로 수록되어 있는 점에도 반영된다. “Beng Beng Beng”은 샤토 플라이트(Chateau Flight)의 손에, “Truth Don Die”는 케리 챈들러(Kerri Chandler)의 손에, “Blackman Know Yourself”는 루츠(The Roots)의 손에 각각 맡겨졌다. 편의상 용어를 사용하면 순서대로 뉴욕 하우스, 런던 디스코, 필라델피아 힙합 풍의 리믹스다. “Beng, Beng, Beng”은 매스터스 앳 워크(Masters At Work)같은 프로덕션 팀의 사운드를, “Truth Don Die”는 블랙 사이언스 오케스트라(Black Science Orchestra)같은 프로덕션 팀의 사운드를 각각 연상시킨다.

평자에 따라서는 멜로딕한 창법이나 4-5분대의 짧은 곡 구조 때문에 페미의 음악을 펠라의 하수로 보는 경우도 있다. 홍보 문구에 “펠라 쿠티의 아들”이라고 쓰여있는 점도 너무 많으면 눈에 거슬릴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을 덕보는 게 단지 장삿속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이는 음악 뿐만 아니라 음악 밖의 활동에서도 드러난다. 이번 앨범의 수록곡인 “Truth Don Die”나 “Blackman Know Yourself”에서의 정치적 메시지는 아버지만큼이나 강렬하다. 또한 [뉴스위크]와 가진 인터뷰에서 신임 민선 대통령 오바산조와 현재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다소 만족하고 있다는 것과 과거 정부의 도둑질과 부패를 참고 견디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과거 정부에는 오바산조의 정부[1976-1979년]도 포함된다”, “올해 말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다면, 시간 낭비 없이 정부를 반대할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밝히고 있다.

페미 쿠티의 아프리카중심주의(Afrocentrism):
“미국인과 유럽인들은 민주주의를 실천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수용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서양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이다. 아프리카인들은 그들 자신의 이데올로기의 형태를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는 아프리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매년 선거하러 가지만 선거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민들은 무언가의 일부라는 느낌을 갖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믿지 않고 시스템을 믿지 않고 나라를 믿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필요로 하며, 단순히 미국인이나 유럽인이 하는 것이라고 해서 아무 거나 수용하지는 않는다”.

20010320044207-02-Youssou20Ndour사진 설명 :유수 엥두르(Youssou N’Dour), 므발락스(mbalax) 혹은 세네갈 소울의 스타.
그런데 페미가 말한 “아프리카의 특정 지역의 리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리듬에 대한 아프리카적 접근이 중요하다”는 말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월드 비트’라는 용어를 접하게 된다. ‘월드 뮤직’이라는 용어가 ‘영미권의 대중음악이 아닌 모든 음악’을 지칭한다면, ‘월드 비트’는 그 중에서도 아프리카로부터 파생된 음악들을 지칭한다. 정확히 말하면 서양에 기원을 두지 않은 모든 리듬을 말하지만 대부분은 아프리카적 기원과 관련된다. 예를 들어 이 글에서 소개한 가나의 하이라이프와 나이지리아의 주주 외에도 말리의 그리어트(griot), 세네갈의 므발라(mbalax), 콩고/자이레의 수쿠스(soukous), 짐바브웨의 치무렝가(chimurenga),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므바쾅가(mbaquanga) 등이 여기 포함된다. 나아가 아프리카 음악 외에도 소(小) 앤틸리스(Antilles)의 주크(zouk), 트리니다드의 소카(soca), 아이티의 콤파스(compas), 온두라스/벨리즈의 푼타(punta) 등 아메리카 대륙의 음악도 포함된다.

쿠바의 맘보/룸바/차차차, 자메이카의 레게/스카/록스테디, 브라질의 삼바/람바다 등은 이들과 함께 분류되기에는 너무 국제화되고 현대화되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월드 비트에 포함될 수 있다. 말하자면 월드 비트는 아프리카인들이 세계 각지에 산포되어 만들어진 음악인 셈이고, 페미가 말한 ‘리듬에 대한 아프리카적 접근’을 가진 경우다. 따라서 월드 비트라는 개념은 아프리카인들의 “상상된 다이애스포라 커뮤니티(imagined diasporic community)”를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렇지만 월드 뮤직/월드 비트라는 용어가 어떻게 마케팅되는가를 살펴 보면 수상쩍은 면이 많다. 무엇보다도 월드 뮤직/월드 비트의 청중들은 ‘이국적 감정’을 추구하는 부유한 백인들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상업적으로 성공한 월드 뮤직들이 전달하는 감정은 ‘편안하고 친숙한’ 이국적 감정일 뿐이다. 제 3세계의 정취는 사막이나 정글 속에서 고단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고급 호텔이나 차의 창문 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모습일 뿐이다. 그래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음악’이라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월드 뮤직/월드 비트의 프로듀싱은 서양 팝 음악의 ‘사탕발림의 영향(sugaring influence)’ 하에 있는 경우가 많다. 저명한 월드 뮤직의 프로듀서나 엔지니어들은 대부분 팝 음악계에서 오랜 경력을 쌓아온 사람들이다.

20010320044207-03-Papa20Wemba사진 설명 :파파 웸바(Papa Wemba), 수쿠스 혹은 룸바 록의 인터내셔널 스타.
그래서 월드 뮤직/월드 비트에 대해 “비서양 음악에 대한 모욕적 용어”, “음악적 사파리”, “세계의 나머지(The Rest)의 음악의 게토화” 등 강하게 비판하는 경우도 많다. 앞서 데이비드 바이언이 월드 뮤직을 ‘싫어한다’고 말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주1) 비판의 대상은 폴 사이먼(Paul Simon)이나 피터 게이브리얼(Peter Gabriel)같이 아프리카 음악을 ‘소개’한 베테랑 팝 스타들 뿐만 아니라 유스 엥두르(Youssou N’dour: 세네갈), 안젤리크 키조(Angelique Kidjo: 브냉), 이스마엘 로(Ismael Lo: 세네갈) 같이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이른바 ‘월드 로커(world rocker)’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이들 못지 않게 유명한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뮤지션들인 카세 마디(Kasse Mady), 살리프 케이타(Salif Keita: 말리), 라이 레마(Ray Lema: 자이레), 파파 웸바(Papa Wemba: 자이레)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 아프리카 출신 팝 스타들의 음반은 매끄럽고 번드르르한 1980년대 주류 팝 음악의 프로듀싱을 택하고 있다.

여기서 아프리카산(産) 월드 뮤직의 비즈니스의 시스템을 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프리카산(産) 월드 뮤직의 센터가 뉴욕이나 런던이 아니라 파리다. 영미권에서 대중화되는 월드 뮤직은 직수입되는 것보다 파리의 ‘테스트 시장’을 거쳐 간접 수입되는 경우가 많다. 유수 엥두르처럼 영어권 아프리카 뮤지션의 경우도 앨범의 몇 곡은 프랑스어 버전으로 부를 정도다. 여기서 프로듀서 이브라이마 실라(Ibrahima Sylla)의 역할이 특히 중요한데, 그는 아프리카 가수들의 음반들을 제작해 왔고, 그런 의미에서 ‘전지구적 음악 상인(global music merchant)’으로 불린다. 방금 살펴본 아프리카 팝 스타들 중에는 아예 파리로 활동무대를 옮겨서 활동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마치 ‘제 3세계는 원료를 생산하고, 선진국은 이를 가공하는 산업에 특화했던’ 20세기의 국제 분업 패턴을 연상시킨다.

문화연구에서는 이를 탈영토화(deterritoroalization)과 재영토화(reterritorialization)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네스토르 가르시아 칸클리니(Nestor Garcia Canclini)에 의하면 탈영토화란 “문화와 지리적 영토 사이의 자연적 관계를 상실하는 과정”이다. 앞서 본 파파 웸바는 자신의 팝 지향적 음악에 대해 변호하면서 자신을 ‘탈자연화된(denaturalized)’ 음악인이라고 소개한 바 있는데 이 말도 탈영토화와 비슷한 뜻이다. 반면 재영토화된 “오래되고 새로운 상징적 생산들을 재(再)국지화(relocalization)하는 과정”이다. ‘재국지화’라는 번역어가 난해하다면 (아프리카의 경우) ‘다시 아프리카적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아무래도 예를 들어 설명해야 할 듯하다. 주주를 예로 들면 ‘본래의’ 주주는 나이지리아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요루바족의 전통적 커뮤니티의 사운드였고, ‘모던 주주의 아버지’인 I.K. 다이로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자연적’ 음악으로 들린다. 그렇지만 킹 서니 아데나 에벤에제르 오베이 등을 통해 세계 시장으로 수출되면서 사운드는 영미의 록 음악의 보편적 사운드에 근접했다(탈영토화). 이와 동시에 이들의 주주는 ‘나이지리아’라는 나라에 대한 새로운 상징과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고 ‘월드 뮤직’이 된다(재영토화). ‘아, 나이지리아도 미개한 나라가 아니라 어느 정도 현대화되었구나’라는 생각을 심어주면 이 과정은 완료된다. 달리 말하면 탈영토화/재영토화 과정을 완수하지 못한 월드 뮤직은 성공하기 힘들다. 또한 탈영토화 쪽으로 기울면 팝 음악의 한 변종이 되어 ‘이국적’ 감정을 공급하지 못하며, 탈영토화에 실패하여 쉽게 재영토화되면 너무 ‘토속적’으로 들려서 월드 뮤직 팬들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 전자의 경우 [파워 오브 원 Power of One]이나 [라이언 킹 Lion King]의 사운드트랙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후자의 경우는 ‘실패한’ 월드 뮤직의 사례에서 발견된다.

그렇다면 아프로비트는? 몇 차례 언급했지만 아프로비트는 처음부터 ‘탈영토화된’ 음악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펠라의 의식적 노력에 의해 1970년대 이후 ‘재영토화(혹은 재아프리카화)’되었다. 그렇다면 아메리칸 음악에 강하게 영향받은 음악을 선보인 펠라가 ‘식민주의적 취향’에 그토록 반대했던 것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페미의 음악 역시 펠라와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펠라가 수용했던 재즈와 훵크가 이제는 좀 낡아 보이는 시점에서 페미가 하우스와 드럼&베이스와 힙합을 ‘재영토화’하는 양상은 흥미롭다. 또한 영미권으로부터의 영향에 민감하면서도 ‘인터내셔널 스타’가 되어 외국으로 진출하는 것과는 거리를 두고 나이지리아의 음악적 커뮤니티에 충실한 자세도 향후 그의 앞길을 주목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월드 뮤직/월드 비트가 ‘순수한 토착의 음악’이라는 환상은 버릴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월드 뮤직은 영미 팝 음악의 영향 하에 토착의 전통과 수입된 영향 그리고 다양한 국제적 영향 등이 혼성교배되어 탄생한 음악이다. 탈영토화하고 재영토화하는 부단한 과정의 잠정적 결과물일 뿐이고, 따라서 순종이 아니라 잡종(hybrid)이다. 가르시아의 개념을 다시 빌어오면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부단한 과정 속에서 무수한 잡종들이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다양한 잡종들을 잘 ‘가려내는’ 것이다.

우리가 ‘아프리카 음악’이라고 부르는 것들에도 아프리카적 요소, 유럽적 요소, 라틴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을뿐더러, 아프리카 음악들 사이의 상호작용도 존재하고, 아프리카 ‘본토’와 아프리칸 다이애스포라 사이의 교류도 발생한다. 한 예로 ‘가장 범(凡)아프리카적인 음악’이라는 평을 듣는 콩고/자이레의 수쿠스(Soukous)마저도 “쿠바의 룸바를 복제하려다가 ‘실패’하여 새로운 무언가가 탄생한 것”(데이비드 바이언)이라는 게 ‘정설’이다. 나이지리아의 주주 역시도 삼바의 영향이 강한데, 이는 브라질에서 노예로 살던 흑인들이 노예 해방 이후 나이지리아로 귀환해 온 역사적 사실에 적잖이 기인한다. 뿐만 아니라 글로벌화된 시대는 문화적 상호작용을 더욱 쉽게 만든다.

마무리하려고 보니 나이지리아 등 서아프리카 못지 않게 중요한 남아프리카의 음악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었다. 어쨌든 이 경우도 레이디스미스 블랙 맘바조(Ladysmith Black Mambazo)의 아 카펠라 합창음악 — 폴 사이먼의 [Graceland](1986)에 등장하는 이른바 므부베(mbube) 음악 – 보다는 짐바브웨의 분두 보이스(The Bhundu Boys)의 댄스지향적 기타 밴드 음악 – 이른바 지트(jit) 음악 — 이 더 흥미롭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하자. 그런 기회가 오려나? 아무튼 많은 이들에게 뜬금없었을 아프리카 음악 기행이여, 다시 올 때까지 안녕! 20000415 | 신현준 homey@orgio.net

주1) 영미의 아카데미에서 월드 뮤직에 대한 정의도 ‘…이다’라기 보다는 ‘…가 아니다’는 형식을 취한다. 그만큼 모호하다는 뜻이다. [대중음악 사전](로이 셔커 저, 이정엽·장호연 역, 한나래, 1999)이나 다른 학술적 저술들에 의하면 월드 뮤직의 자격으로 네 가지를 지적한다. 1) 영미의 팝 음악의 어법이 아닌 음악이며, 2) 팝이나 록의 국지적 변종이 아닌 음악이며, 3) 인위적으로 보존된 전통음악이 아닌 음악이며, 4) 포크, 블루스, 컨트리 등 미국의 ‘루츠’ 음악도 아닌 음악이다. 세간의 인식은 ‘대체로 서양적이지 않을수록, 현대적이지 않을수록 월드 뮤직에 가깝다’는 정도일 것이다. 한국에서 월드 뮤직의 정의는 ‘이상하다’. 음악 어법이 영락없는 영미 팝이라도 가사가 영어만 아니거나 음악인의 국적이 영어권 나라만 아니면 월드 뮤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외국의 모든 음악’을 월드 뮤직이라고 칭하는 사람도 있다. [중앙일보]의 1월 31일의 기사에서 ‘대중음악 전문기자’인 강찬호는 한 지상파 방송의 ‘(영미) 팝 음악’ 전문 프로그램을 소개하면서 “국내 가요문화의 발전을 위해 균형있는 월드 뮤직의 섭취는 필수적이다”라고 쓰고 있다. ‘정의를 잘못했다’라는 지적은 가급적 삼가는 게 좋지만 주류 저널리즘 담당자가 이렇게 어이없는 수준이면 곤란하지 않을까. 한편 엔야(Enya)를 소개하면서 “80년대 접어들며 크게 인기를 얻었던 ‘뉴에이지 음악’과 민속음악을 바탕으로 한 ‘월드뮤직’은 이른바 켈틱 뮤직과 맞물리게 된다”는 한 유명한 TV 프로그램 진행자이자 음악 평론가의 문장도 참 이해하기 힘들다.([한겨레], 1999.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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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이트
MCA 레코드사 – 펠라 쿠티 페이지
http://www.mcarecords.com/ArtistMain.html?ArtistId=237
펠라 쿠티 관련 기사 “From the foot of The Shrine”
http://www.afribeat.com/archiveafrica_fela.html
펠라 쿠티 상세 디스코그래피
http://biochem.chem.nagoya-u.ac.jp/~endo/EAFela.html
펠라 쿠티의 죽음을 다룬 기사 “Africaman Original” (Carter Van Pelt)
http://incolor.inetnebr.com/cvanpelt/Felaweb/africaman.html
MCA Records의 쿠티 부자 음반 발매 관련 기사 [Urban Spectrum on the Web] http://www.urbanspectrum.net/music.html
페미 쿠티 인터뷰 [Ink Blot Magazine] http://www.inkblotmagazine.com/Interviews/int_Femi_Kuti.htm
페미 쿠티 관련 기사 [BostonHerald.com] http://www.bostonherald.com/entertainment/music/katz11022001.htm
페미 쿠티 [뉴스위크] 인터뷰
http://www.newsweek.com/nw-srv/printed/int/dept/vu/ov5002_1.htm
http://www.newsweek.com/nw-srv/printed/int/dept/vu/ov5002_2.htm
데이비드 바이언의 월드 뮤직 비판
http://www.nytimes.com/yr/mo/day/artleisure/music-world.html
아프리카 음악 백과사전: 아티스트 바이오그래피, 디스코그래피, 음악용어 해설 및 기타
http://www.africanmusic.org/glossary.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