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보름동안 반가운 두 이름이 뉴욕을 찾아왔다. 정글 브라더스 Jungle Brothers와 드 라 소울 De La Soul. 둘 다 백인 평자들로부터 늘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던 몇 안 되는 힙합 뮤지션들이고 여전히 생산적인 작업들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공연은 당연히 필자의 의무방어전 리스트에 올라갔다. 50불에서 30불사이의 가격에 팔아대는 벡 Beck의 NBC 방송국, ‘극장식 공연'(그것도 예정일 표가 매진이 되자 다음날 공연을 억지로 추가했던데)을 보기 불가능한 상황에서, 싼 가격에 서서 뒤엉켜 보는 이런 소극장 공연이 훨씬 재밌다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찾아간 이 공연들은 생각보다 많은 관객들이 모였고, 공연 자체도 굉장히 재미가 있었다. 다양한 피부색과 외모의 관객들이 모인 이 두 공연장에서 힙합뿐 아니라 일렉트로니카, 록, 재즈, 레게, 아프리카 리듬, 중국 무술 등등을 모두 섭렵했다고 하면 허풍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분명한 사실이며, 이런 맥락에서, 이들이 보여준 일련의 새로운 음악적 시도들과 공연장 안팎의 분위기는 최근 1~2년 사이의 미국 힙합 씬에서 일어난 많은 변화들, 그리고 이를 둘러싼 가십거리들이 결코 괜한 바람잡이 스토리들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였다. 지금의 미국 힙합? 사실 미국에서 힙합 전문지들을 제외한 미디어들이 힙합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요즘처럼 많이 떠들어댔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내용들이 너무도 중구난방인지라 그 이야기들을 종합해서 하나의 최근의 미국 힙합의 트렌드를 정의하기는 불가능한 것 같고… 사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있는 현재 미국 힙합의 음악적 내용이나 스타일, 그리고 관련된 문화적 현상들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복잡하다(물론 역으로 이런 현재의 국면이 미디어들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들을 제공했을 것이다). 어쨌든 몇 가지 눈에 들어오는 것들만 “현상적인” 수준에서 이야기하자면… 1. 마이크로 싱코페이션 힙합 7년 전 미국에 처음 (놀러)왔을 때, 필자의 느낌으로 미국의 힙합은 말 그대로 ‘갱스타’, ‘아프리칸 아메리칸(African-American) 흑인’ 힙합이었다. 동부든 서부든 투팩 2Pac이 영화와 라디오 방송을 누비고, 닥터 드레 Dr. Dre 식의 사운드가 여전히 득세를 하는, 그리고 전형적인 비 보이 B-Boy 스타일에 더욱 거칠고 폭력적인 이미지와 패션을 더한 흑인 젊은이들이 ‘Thugs’를 형성하고 있는… 이는 가장 눈에 뜨이는 흑인음악 그리고 흑인 청년문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힙합 사운드와 패션(태도는 글쎄…)은 몇 년 안에 한국에도 들어왔고 한국의 힙합 팬들에게 장기간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혹은 여전히 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2년 전 공부하러 미국으로 다시 나가면서 필자가, ‘미국 내에서의 힙합 씬과 이에 관한 주된 담론들 또한 (몇 가지 큰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런 맥락 하에 놓여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즉, 투팩과 비기 Biggie의 여전한 사후 힘겨루기(물론 그들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닥터 드레의 음악적 변신과 진로, 스눕 독 Snoop Dogg의 졸렬한 버티기 전술, 퍼프 대디 Puff Daddy의 비즈니스 전략, 우탱 클랜 Wu Tang Clan의 끝없는 영웅담, 나스 Nas, 본 썩스 앤 하머니 Bone Thugs’N’Harmony, 아웃캐스트 Outcast에서부터 루츠 Roots와 푸지스 Fugees에 이르는 떠오르는 대안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울러서, 갱스타 랩의 미래에 대한 전망, 웨스트와 이스트코스트 랩의 힘겨루기의 비극적 결말, 혹은 화해의 방향, 뭐 이런 것들… 마이크로 싱코페이션 힙합을 주도하고 있는 프로듀서 팀바랜드. 여기 와서 제일 먼저 당황했던 것은 MTV와 흑인 전문 TV 채널, 그리고 라디오 힙합 방송에서 죽어라 틀어대는 예상치 못한 이상한 힙합들 때문이었다. 여전한 엇박의 펑키한 힙합 리듬이긴 하지만, 아주 자잘하게 쪼개놓은 비트 위에 속사포처럼 중얼거리고 주절거리는 랩과 현란한 사이버 그래픽 무대 위에서 기계처럼 추어대는 춤은 필자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미 미국의 힙합은 갱스타 랩과는 전혀 무관해진지 오래였고, 귀염둥이 제이 지 Jay Z와 메이즈 Mase, 허풍쟁이 매스터 피 Master P와 버스타 라임스 Busta Rhymes, 멋쟁이 아줌마 미씨 엘리엇 Missy Elliott, 과격분자 DMX, 또 팍시 브라운 Foxy Brown, 노리에가 Noreaga 등등이 득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다소간 일관된 사운드의 뒤에는 퍼피 Puffy와 와이클레프 Wyclef 외에도 팀바랜드 Timbaland, 저메인 듀프리 Jarmaine Dupri 등의 새로운 거물 프로듀서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마이크로 싱코페이션 micro-syncopation’ 힙합이 메인스트림 흑인 힙합 씬(즉 오버그라운드 흑인 힙합 뮤지션과 일반 흑인 청중들을 모두 아우르는)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고 이는 아직도 여전한 것 같다. 2. DJing, 그리고 록-힙합 혹은 힙합-록 메인스트림 힙합의 이러한 전반적인 경향과 다르긴 하지만, 언더그라운드 혹은 인디 레이블을 바탕으로 한 힙합 역시 최근 1~2년 사이에 전혀 다른 방향에서 목소리를 높여온 게 사실이다. 메인스트림 힙합이 마이크로 싱코페이션이라는 한가지 색깔로 뒤덮여있는 것에 반해, 이 쪽은 말 그대로 팔색조의 모습 그 자체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이들의 사운드를 아우르고 있는 것은 70~80년대 올드 스쿨 힙합을 현재의 첨단 테크놀로지를 바탕으로 변형, 부활시킨 ‘복고적 진화’이다. 올드스쿨 스타일의 DJ 리믹스의 대명사, 훵크매스터 플렉스. 크리스피 Krispy와 같은 ‘밤 힙합 Bomb HipHop’ 레이블의 뮤지션들이나 엑서큐셔너스 Executioners, 믹스 매스터 마이크 Mix-Master Mike, 훵크스터 플렉스 Funkmaster Flex, 피넛 버터 울프 Peanut Butter Wolf, 프리스타일 펠로십 Freestyle Fellowship 등(물론 이 명단에 난자 튠 Ninja Tune의 키드 코알라 Kid Koala를 포함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의 사운드는, 물론 개인에 따라 앱스트랙트한 사운드에서부터 고전들의 리메이크까지 다양한 특기들을 보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의 흑인 클럽 DJ들의 “DJing”의 부활이다. 현재 이들의 기술은 거의 초인적인 수준에 이른 게 사실이다. 맨해튼이나 브롱스의 힙합 클럽(물론 흑인과 백인 클럽을 모두 포함해서)의 DJ들의 기량을 보아도 눈에 휘둥그레질 정도인데, 그 경쟁을 뚫고 이미 음반을 발매하고 국제적인 명성을 획득하고 있는 친구들의 기량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들의 과도한 디제잉은 귀에 거슬리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가령 10여분씩 죽어라 판만 긁어대면 사실 부담스럽다. 또 다른 80년대 힙합의 복고적 진화로서, 록음악과 힙합의 결합 역시 여전하다. 아니, 이는 언더그라운드와 오버그라운드 양쪽에서 최근에 특히 눈에 띄는 현상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RATM, 키드 록 Kid Rock, 림프 비즈킷 Limp Bizkit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물론 이들 역시 기본적으로는 80년대 록과 힙합의 결합을 통해 비스티 보이스 Beastie Boys나 런 디엠씨 Run DMC가 만들어내었던 사운드에서 분기한 것이 사실이지만, 말 그대로 힙합 뮤지션이라고 이야기되는 쪽에서도 록적 감수성과 힙합 사운드를 결합한 출중한 음악들을 내놓고 있는 뮤지션들이 상당하다. 오버그라운드 쪽의 루츠 Roots와 프린스 폴 Prince Paul 외에, 블랙 스타 Black Star(와 모스 데프 Mos Def), 블랙 아이드 피스 Black Eyed Peas 등 언더그라운드 출신 중에서도 이런 경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맥락에서 한가지 최근의 가장 흥미로운 소식은 노장 런 디엠씨 Run DMC의 새 음반 발매이다. TV의 ‘Gap’ CF에서 멤버인 런 Run이 화끈한 랩 실력을 과시했던 것 외에는 근래에 별다른 활동이 없었던 런 디엠씨 Run DMC가 자신들의 적자인 키드 록, 림프, 그리고 에버래스트 Everlast, 수거 레이 Sugar Ray를 불러모아 판을 낸다고 하니 음악적 내용 뿐 아니라 상업적인 성공 여부 또한 큰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3. 다국적, 다민족, 다인종 힙합 음악 혹은 문화 음악적으로나 스타일 면에서 힙합 씬이 “아프리칸 아메리칸 흑인음악” 혹은 “아프리칸 아메리칸 흑인문화” 라는 테두리를 벗어난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앞서 얘기한 백인 힙합-록 뮤지션들이나, 디제이 섀도 DJ Shadow에서 밤 힙합 레이블 그리고 언더그라운드 힙합 클럽에 이르는 백인 DJ들의 득세는 말할 것도 없고, 캐러비언,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유럽 등 전세계에서 몰려든 다양한 국적과 인종, 민족의 힙합 뮤지션들이 미국 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다. 물론 “힙합”이라는 음악의 개념 자체도 다국적, 다민족, 다인종 퓨전으로 인해 보다 자의적인 정의들이 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팔뚝에 한자 문신을 새긴 뉴욕 닉스의 농구 선수 마커스 캠비. 이는 미국 힙합 문화 자체의 수용자 층과 스타일의 변화와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다. 어느 것이 원인이고 결과인지 설명할 도리는 없지만, 온갖 인종, 민족의 이민 집단들로 구성된 미국에서, 이들 다양한 집단의 문화적 아이템과 아이디어들이 힙합문화의 스타일과 태도에 스며들고, 사운드적 특징들이 힙합 음악에 융합되고, 아프리칸 아메리칸 흑인 뿐 아니라 백인, 나아가, 히스패닉, 아시안, 캐러비언 출신 이민 청년들(이민 2세대 뿐 아니라 성장기에 미국에 건너온 친구들까지 포함해서)까지 힙합 음악과 패션에 열광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졌다. 이건 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인지라, 말 그대로 현상적인 수준에서 떠오르는 몇 가지 사례들만 열거하겠다. 1) 흑인들이 일반적으로 지니는 동아시아인들에 대한 기본적인 반감은 현재도 여전하지만, 이와 상관없이 중국, 혹은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아이템들은 오래 전부터 힙합 음악과 스타일에 결합되어 왔다. 우탱들의 중국 무술에 대한 편집광적인 동경, 혹은 베끼기에서 출발하여, 뮤지션뿐 아니라 광범위한 흑인 힙합 팬들의 중국문자에 대한 애정(NBA 스타들의 팔뚝만 봐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과 이소룡에 대한 광적인 몰입… 할렘의 비디오 가게에 뒤덮인 이소룡과 성룡의 클래식들과, 동시에 차이나타운 길거리에서 흑인 친구들이 팔고 있는 불법 복제한 우탱들의 씨디는 이러한 ‘흑-중’, 혹은’흑-동아시아’ 결합의 산 증거이다. 더욱이 보다 광범위하고 상업적인, 문화산업적 전략 차원에서의 결합(미국에 입성한 성룡, 주윤발, 홍금보와 흑인배우들, 힙합뮤직이 결합된 할리우드 영화와 드라마들)은 현재 노골적인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물론 블랙필름, [슬램]에 주연으로 출연했던 흑인 혼혈 한국계 배우 소냐 손 Sonja Sohn의 열연이나, 짐 자무시 Jim Jarmusch의 신작, [The Way Of The Samurai]에서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한 흑인 배우 포레스트 위태커 Forest Whitaker가 일본도를 휘둘러대는 모습은 이러한 상업적 맥락에서 적당히(?) 예외라고 봐줄 수도 있지만. 사이프러스 힐의 스페인 앨범, [Los Grandes Exitos en Espanol] (1999). 2) 미국 인구의 절대치를 차지하는 히스패닉계 청년들의 힙합에 대한 사랑은 대단하다. 이러한 기반 하에, 사이프러스 힐 Cypress Hill(그들의 혀짧은 랩은 스페인어식 영어 발음에 바탕한 발명품이다)로 대표되는 미국의 히스패닉 힙합 씬은 미국을 기점으로 라틴 아메리카와 미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다양한 스타들을 배출하고 있다(이들의 스페인어 랩 음반들은 맨해튼의 히스패닉 거주지역을 지나노라면 늘 들을 수 있다). 최근에 발매된 사이프러스 힐의 스페인어 랩 음반 역시 이러한 히스패닉 힙합 씬의 성장과 연관하여 이해할 수 있다(물론 전반적인 미국 내에서의 라틴 음악의 붐이라는 더 큰 맥락이 전제조건이긴 하지만). 3) 이미 한물간 스토리지만 푸지스의 성공은 캐러비언 정체성 나아가 ‘아프리카주의(pan-Africanism)’가 힙합이라는 음악을 통해, 전혀 다른 문화적, 민족적 정체성을 지닌 흑인들을 단지 (아프리카라는) 뿌리가 같다는 이유로 결집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미국에서 캐러비언 지역, 그리고 최근의 아프리카 지역에서 이민온 대부분의 흑인 이민 청년들은 누구나 성장기에 큰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미국 본토의 아프리칸 아메리칸 흑인들보다 자신들은 문화적, 역사적으로, 혹은 성장배경 면에서(물론 자신의 모국에서이긴 하지만) 훨씬 우월하다는 자부심에도 불구하고(이는 본토 흑인들과 이들 흑인 이민들간의 뿌리깊은 갈등의 기본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그들은 미국 내에서 백인들 혹은 기득권 세력에 의해서 경제적, 정치적, 인종적으로 아프리칸 아메리칸 흑인들과 동일한 부류의, 단지 ‘열등한 흑인’으로만 취급된다. (이는 한국 사람들이 ‘시커먼’ 사람들을 모두 똑같은 흑인으로 분류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 보라. 서양인들이 당신을 보고 중국인, 일본인이라고 부른다면 당신 기분은 어떨지…) 하지만 이들의 부모 세대와 달리, ‘아프리카인으로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뿌리’라는 이름 하에 모든 흑인의 정치적, 문화적 단결에 대한 호소를 통해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아프리칸” 정체성을 만들고자 하는 청년들이 이들 흑인 이민집단 내에 90년대 이후 증가해왔다(이는 한편으로는 60~70년대 캐러비언 지역과 영국을 풍미했던 라스타파리아니즘 Rastafarianism의 90년대 식 재현이기도 하다). 아이티 출신의 이민 2세대인 푸지스의 정치적 모토 역시 이러한 맥락을 바탕으로 하며, 이러한 메시지와 빼어난 음악적 감수성의 결합을 통해 그들은 아프리칸 아메리칸과 캐러비언 출신 흑인들을 모두 흡수하며 가장 영향력 있는 힙합뮤지션들이 될 수 있었다. 4. 게이 힙합문화의 부상 어차피 힙합 음악과 힙합문화가 걷잡을 수 없는 ‘정체성의 혼란’, 혹은 ‘혼란의 정체성’을 현재의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면, 힙합문화 내에서의 게이 힙하퍼들의 출현 역시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의 뉴욕 내의 대표적인 흑인 거주지역인 브롱스의 클럽들에서 게이 힙합 씬의 부상은 미디어들에겐 정말 섹시한 소재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빌리지 보이스 Village Voice]지는 최근 호에서 이를 다루면서, “이러한 현상은 힙합문화의 기본적인 태도에 견주어볼 때 유례없는 것”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사실 힙합은 (레게처럼)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마치스모 Machismo’에 기댄 음악과 문화이다. 갱스터적인 폭력과 섹스광적인 허풍, 여성의 비하와 성적 상품화는 20년 이상 변함없는 힙합 음악의 주제였다. ‘Thugs’는 바로 이러한 자세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단어이며, 따라서 ‘패곳 faggot'(남성동성애자)은 힙합 문화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대표적인 하드코어 래퍼 DMX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MC들의 랩은 동성애에 대한 비하와 남성적인 성적 기질에 대한 보무당당한 태도를 늘상 강조해왔다. 따라서 힙합 클럽 내에서 힙합 패션(이 또한 지극히 반여성적인 스타일 아닌가)으로 무장한 흑인 게이 커플들의 급증은 이례적인 현상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인종적,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의 혼용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힙합 문화 내에서의 성적 정체성의 혼란 또한 당연한 일이지도 모른다. 전자의 변화들이 힙합 음악과 문화의 내용을 90년대 이후 뒤흔들어 놓았듯이 게이 힙합 씬의 부상이 앞으로 어떠한 변화들을 가져올 수 있을 지도 주목해 볼 만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미국 힙합의 현재의 국면들(언더그라운드 힙합 씬과 오버그라운드 힙합 씬, 그리고 힙합 음악과 힙합 문화를 모두 아우르는)에 대한 이야기는, 말 그대로, ‘최신 미국음악, 혹은 문화소식’ 이상의 의미는 없을 지도 모른다(그런 이야기들이 어차피 한국의 힙합 씬과 그를 둘러싼 최근의 논의들과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하지만 무엇이 ‘진짜’ 힙합이고 무엇이 ‘한국’ 힙합인지, 그리고 무엇이 ‘원래의’ 힙합문화의 태도이고 한국에서 힙합 한다는 것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뮤지션들과 팬들 사이의 혼란스럽고도 진지한 최근의 논의들은, 현재의 미국 힙합의 국면들을 둘러싼 미국 미디어와 평자들, 팬들 사이의 입씨름과 흡사한 면들이 있는 것 같다. 다행히도 과거에 흔히들 이야기되던 “본래 본토 힙합의 사운드와 태도는 이런데 한국에서는 이따위로 바뀌어서 안타깝다”, “저렇게 하는 건 진짜 힙합이 아니야”라는 식의 비교평가의 목소리가 줄어들고, 보다 생산적이고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 같아 멀리서나마 반가울 뿐이다. 20000212 | 양재영 coct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