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아웃 뉴욕(TimeOut NewYork)]이라는 잡지가 있다. 매달 뉴욕 시의 다양한 대중문화 이벤트와 상품을 안내하는 책자이다. 즉 뉴욕 시에서 향유 가능한 들을 것, 볼 것, 먹을 것, 입을 것 등을 모조리 소개하는 가이드북인 셈이다. 이 잡지는 매년 8월이면 뉴욕 시에서 새롭게 생활을 시작하는 대학생들을 위해 학생용 프리 버전을 만들어 무료로 길거리에 풀어준다.

한국에서 갓 건너온 후배들에게 주기 위해 동네 버진(Virgin) 레코드에서 몇 권 얻어 전철을 타고 가면서 죽 훑어보다가 흥미로운 글을 발견하였다. 이 잡지의 음악 전문 기자, 뉴욕의 대중음악 전문가 몇 명이 뉴욕의 정서 혹은 정신을 대표할 수 있는 음반을 선정해 놓은 섹션이었다. 음반산업의 발흥기라 할 수 있는 195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총 48장의 앨범이 뉴욕을 대표 혹은 상징하는 앨범으로 선정되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아트 블래키 퀸텟의 초기 하드밥 명반인 미드타운의 재즈 클럽 버드랜드 라이브 앨범을 포함하여 찰스 밍거스(1959), 존 콜트레인(1964), 오넷 콜맨(1959) 등 재즈 앨범도 있었고, 필립 글래스의 미니멀리즘 앨범부터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니코의 앨범, 그리고 소닉 유쓰(1988), 토킹 헤즈(1980), 텔레비전(1977), 뉴욕 돌스(1973), 패티 스미스(1975) 등 뉴욕 아방가르드 록과 언더그라운드 클럽 씬을 풍미했던 앨범도 있었다. 그리고 키스(1974), 블론디(1978), 빌리 조엘(1977), 빌리지 피플(1977), 마돈나(1983)의 앨범도 눈에 띤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힙합 앨범들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나의 느낌과 비교적 일치하는 11장의 힙합 앨범은 뉴욕 뿐 아니라 당대의 미국의 힙합 음악을 대표하는, 혹은 주류 힙합에 맞서는 아이콘이었으며, 동시에 1980년대 이후 힙합 역사의 시간적, 공간적 발전과 배열을 증명하는 듯해서 무척 흥미로웠다.

알다시피 미국, 특히 뉴욕은 온갖 에쓰닉(ethnic) 집단과 인종, 언어와 문화의 집결지이다. 이들이 구성하는 다양한 퓨전과 모자이크는 현재 뉴욕 대중문화와 대중음악의 정수를 이룬다. 뉴욕의 힙합 역시 결코 예외가 아니다. 힙합 음악의 태두 쿨 디제이 허크(Kool DJ Herc)가 1967년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뉴욕의 브롱스로 이민오던 시기부터 이미 캐러비안과 아프리칸 아메리칸 흑인의 사운드의 퓨전이 시작되었고 이는 힙합의 근간이 되었다.

1970년대 중반 힙합 사운드의 트레이드마크인 브레이크(breaks)와 스크래치(scratch)가 쿨 허크와 그랜드위자드 테오더(Grandwizard Theodore)에 의해 얼떨결에(?) 창조되고, 힙합의 전설 아프리카 밤바타(Afrika Bambaataa), 그랜드마스터플래쉬(Grandmasterflash) 등이 흑인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하면서 힙합의 본격적인 역사는 시작된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는 커티스 블로우(Kurtis Blow)와 후디니(Whodini) 같은 힙합 아이돌이 나와 흑인 청년들을 사로잡는다.

Run-D.M.C., Run-D.M.C. (1984)

하지만 힙합이 백인 음반산업을 사로잡고 대중음악 산업의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은 불과 15년 전인 1983~4년경이고, 그 대표주자 중 하나가 런 D.M.C. (Run-D.M.C.)이다. 이들 [RunD.M.C.](1984)에서 힘있는 랩과 강력한 메탈 사운드를 결합한 새로운 크로스오버로 흑인과 백인 청중을 모두 사로잡았다. 이는 커티스 블로우나 후디니와는 확실히 구별되는 사운드였으며, 힙합이 록/팝 사운드를 가미하여 백인에게 어필할 수 있고, 나아가 국제적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둘 수 있음을 보여준 명백한 증거였다. 물론 이 음반은 뉴욕대학교 기숙사 방에서 릭 루빈(Rick Rubin)과 러셀 시먼스(Russsell Simmons)가 발기한 인디 레이블 데프 잼(Def Jam)을 1980~90년대 힙합의 대표 레이블이자, 나아가 영화, 방송 등을 포괄하는 대표적인 흑인 오락, 미디어 재벌로 성장케 만드는 바탕이 된다. 런 D.M.C 자신도 차기작 [Raising Hell](1986) 앨범과 “Walk This Way”를 통해 더 큰 성공을 거두게 되고, 더불어 미국에서 사멸해가던 아디다스 스포츠 웨어를 새로운 청년 의상으로 탈바꿈시키고, 에어로스미쓰(Aerosmith)를 부활시키는 데도 혁혁한 기여를 한다.

Boogie Down Productions, Criminal Minded (1987)

힙합은 끊임없이 다양한 국적의, 혹은 국적을 알 수 없는 사운드와 문화의 요소들을 자기 것으로 흡수하면서 성장한다. 동시에 흑인들의 생각과 느낌이 다양한 수준에서 랩을 통해 발설된다. 이러한 특성은 부기 다운 프로덕션스(Boogie Down Productions)의 힙합 클래식, [Criminal Minded](1987)에서 명쾌하게 드러난다. DJ인 스캇 라 록(Scott La Rock)은 힙합의 비트와 레게를 어떻게 결합시킬 수 있는지를 명쾌하게 제시한다. 이 탄탄한 사운드는 KRS 원(KRS-One)의 흑인의 거리 철학을 내포한 정치성 짙은 가사와 조화를 이루며 1980년대 흑인 힙합을 대표하는 음반을 만들어 내었다. “South Bronx”와 “The Bridge Is Over”는 여전히 뉴욕 흑인의 생각이자 소리, 리듬으로서 유효하다. 뉴욕의 반대편, 웨스트코스트 갱스타 힙합의 원조로 평가받는 이 앨범은 역설적이게도, 라 록의 죽음을 가져왔으며(지금도 여전히 반복되는 갱스타 힙합의 비극적 연대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사운드의 원천을 상실한 KRS 원은 이후 자신만의 길을 모색하지만, 허풍선이, ‘자칭’ 힙합 철학자로 폄하되고 만다.

Eric B. & Rakim, Paid In Full (1987)

BDP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뉴욕에서는 흑인 힙합의 또다른 클래식이 될 음반이 겁없는 초짜 듀오에 의해 발매되었다. 에릭 B. 앤 라킴(Eric B. & Rakim)의 데뷔앨범 [Paid In Full](1987)은 흑인 음악의 대부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의 샘플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로 인해 법적 제재를 받게 되어 더욱 유명해졌지만, 이 음반의 더 큰 의미는 하드코어 힙합 사운드를 정의했다는 점에 있다. 에릭 B.의 무조의 텍스쳐와 불길한 사운드, 라킴의 복잡난해한 가사와 독특한 랩의 결합은 최면적이고 몽환적인 힙합음악을 만들어내었으며, 이들은 즉시 힙합 음악의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재능을 몽땅 투자한 이 앨범은 동시에 그들의 음악적 재능을 소진시키고 말았다.

Public Enemy,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 (1988)

1980년대 뉴욕 힙합의 정점은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의 지극히 정치적인 앨범,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1988)에 있다. 척 D(Chuck D)의 신랄한 가사와 거칠 것 없는 랩, 플레이버 플라브(Flavor Flav), 테미네이터 X(Terminator X), 프로페서 그리프(Professor Griff)가 만들어내는 박력있는 비트는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잡다한 샘플과 멋들어지게 조화를 이룬다. 그들은 게토에 대한 무관심을 정치적으로 성토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힙합의 역할을 제시했으며, 동시에 상업적 성공을 통해 정치적 힙합도 팝(?) 음악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이 음반의 성공 이후 척 D와 퍼블릭 에머니는 흑인 대중문화/정치의 대변자로 자리매김되는데, 비슷한 시기 뉴욕을 근간으로 미국 흑인 영화의 새로운 기수로 떠오르기 시작하던 스파이크 리(Spike Lee)는 자신의 새 영화 [Do The Right Thing](1989)에서 그들을 파트너로 영입함으로써 서로 간의 네임 밸류를 강화하게 된다. 양자 간의 파트너십은 10년째 지속되었는데, 퍼블릭 에너미는 스파이크 리의 영화 [He Got Game](1998)의 사운드트랙을 통해 재결합하여 재기의 바탕을 마련했다.

Salt-N-Pepa, Hot, Cold & Vicious (1988)

흑인 남성의 전유물로만 생각되던 힙합 음악이 본격적으로 새로운 가지를 치기 시작하던 시기 또한 1988~9년 무렵이다. 이 시기에 흑인 여성과 백인 남성에 의한 힙합과 랩이 목소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아프리칸 아메리칸 흑인, 그리고 캐러비안 흑인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공통되는 특징 중의 하나는 남성적 마초이즘이 지극히 당연시 된다는 점이다. 여성에 대한 비하, 성적인 음담패설과 욕설이 랩에서 난무하는 것은 이러한 측면의 반영일 것이다. 따라서 힙합 음악에서 여성 뮤지션이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아마도 최초로 상업적, 그리고 비평적으로 힙합 씬에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한 여성 뮤지션은 브롱스 출신의 여성 트리오, 솔트 앤 페파(Salt-N-Pepa)일 것이다. 그들의 데뷔앨범 [Hot, Cold & Vicious](1988)는 힙합의 빅 비트와 온건한 페미니스트적인 가사의 결합을 통해 여성 힙합 사운드의 전형을 제시하였다. 이 앨범은 “Tramp”, “Push It”과 같은 댄스플로어 히트곡들을 양산하면서 뉴욕 여성 힙합 뮤지션에게 길을 터주었다. 하지만 이후 “Let’s Talk About Sex”와 같은 히트곡에서는 흑인 여성의 여성성을 상업적으로 이용했다는 혐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LC 류의 여성 흑인 팝 사운드와 미시 엘리엇(Missy Elliot) 류의 공격적인 여성 힙합이 솔트 앤 페파로부터 분기되어왔다는 점에서 그들의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Beastie Boys, Paul’s Boutique (1989)

1980년대를 마무리하는 1989년은 힙합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흑인 힙합의 헤게모니는 이쯤이 되면서 LA를 중심으로 한 웨스트코스트 갱스타 랩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NWA는 이미 1988년에 이정표적인 [Straight Outta Compton]을 발표한 터이다). 뉴욕의 힙합 뮤지션들이 스스로 어디서 정체성을 찾아야할지 헤매기 시작하고 차츰 흑인 대중들로부터도 잊혀지기 시작하는 것은 이때부터이다.

이 와중에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지닌 뉴욕 출신의 백인 트리오가 힙합과 록 음악계를 동시에 사로잡게 되는데, 이후 10여년 간 이들의 음악적 행보가 미친 대중적, 산업적 영향력은 가히 독보적이다. 누구나 다 아는 그들의 연대기를 굳이 여기서 상세히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다. 비스티 보이스(Beastie Boys)는 뉴욕 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백인 아이들에게 여전히 최고의 우상이며, 그들의 10년 전의 라임, “I’m Just Calling Like Bob Dylan”이 아직도 아이들의 입에서 지껄여진다는 것만으로도 설명은 충분하다. 이 유명한 라임과 함께, 비틀스의 리프를 비롯한 다양한 음악적 소스들이 그 당시만 해도 초짜였던 LA의 더스트 브라더스(Dust Bothers)에 의해 절묘한 모자이크를 이룬 비스티 보이스의 두 번째 앨범 [Paul’s Boutique](1989)는, 그들이 데프 잼의 비호없이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오늘날 1990년대 힙합에 가장 영향력을 준 기념비적 앨범으로 평가받기에 이른다.

De La Soul, 3 Feet High and Rising (1989)

앞서 말한 것처럼 뉴욕 흑인 뮤지션의 힙합은 1989년을 기점으로 자신들만의 정체성과 파워를 상실했던 것 같다. 한편으로 이러한 흑인 힙합의 정체성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메이저 음반산업에게는 힙합의 인위적인 상품화와 팝적인 변형을 훨씬 수월하게 만들었다. 래퍼 톤 록(Tone-Loc)의 “Wild Thing”이 랩 싱글로는 최초로 빌보드 정상에 오르면서 MC 해머(MC Hammer)와 바닐라 아이스(Vanila Ice)가 1990년대 초반 미국의 10대(흑백을 막론하고)를 사로잡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동시에 LA를 중심으로한 갱스타 랩은 90년대의 시작과 함께 흑인 힙합 씬의 헤게모니를 장악한다. 닥터 드레(Dr. Dre), 아이스 큐브(Ice Cube) 등 NWA 출신 멤버들과 아이스 티(Ice-T), 그리고 이들의 차세대인 투팩(2Pac)과 스눕 도기 독(Snoop Doggy Dogg) 등은 1990년대 중반까지 절대적인 부귀영화를 누린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뉴욕의 힙합 뮤지션들은 기가 죽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선배들이 선호했던 정치적 투쟁과 파워 코드에 대한 의존을 지양하고, 개인주의와 사운드적 실험을 통해 또다른 주목을 받았던 힙합 뮤지션들이 있었다. 뉴욕 흑인으로서는 아웃사이더일 수 있는 롱 아일랜드 중산층 교외에서 성장한 세 명의 흑인 청년, 드 라 소울(De La Soul)의 데뷔 앨범 [3 Feet High and Rising](1989)은 그 당시로서는 새로운 느낌의 힙합 음악을 담고 있었다. “Me, Myself And I”의 개인주의와 “Ghetto Thang”의 흑인 프라이드가 절묘히 결합된 그들의 메시지는 퍼블릭 에너미와는 확연히 구별되었으며, 최고의 흑인 힙합 프로듀서로 성장하게 될 프린스 폴(Prince Paul)의 재기넘치는 사운드는 향후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드라마틱, 오페라틱하고 앨범 중심적인 힙합 앨범의 초석이 되었다. 레게와 60년대 팝, 그리고 다분히 사회의식적인 개인주의의 유머러스한 결합은 이 앨범을 그들 최고의 역작으로 만들었다.

A Tribe Called Quest, The Low End Theory (1991)

사운드적으로 구별됨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지녔다는 점에서 90년대 초, 중반 드 라 소울과 항상 같이 언급되었던 퀸스 출신의 어 트라이브 콜드 쿠에스트(A Tribe Called Quest)는 작년까지 지속적으로 수작 앨범을 내놓았는데, 그 중에서도 두 번째 앨범 [The Low End Theory](1991)는 1990년대 초반 최고의 힙합 앨범으로 꼽을 수 있는, 가장 완성도 높은 앨범이다. 파이프(Phife)의 진중한 보컬과 사운드의 마술사 큐 팁(Q-Tip)의 매혹적이고 추상적인 라임은 14개의 트랙에 다양하면서도 일관된 사운드의 흐름을 제공함으로써 앨범 전체가 하나의 곡을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펑키한 비트의 재즈를 듣는 듯한 이 느낌, 바로 이 앨범은 ‘힙합 재즈’의 사운드를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Wu-Tang Clan, Enter the Wu-Tang(36 Chambers) (1993)

몇 장의 완성도 높은 앨범들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의 시작과 함께 침잠했던 뉴욕의 힙합은, 9명의 MC가 떼거지로 랩을 퍼붓는 우탱 클랜(Wu-Tang Clan)의 등장과 함께 다시금 주목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다. 스눕 도기 독의 [Doggy Style]이 차트 정상에 무혈 입성한 1993년, 대륙의 반대편에선 우탱이 [Enter the Wu-Tang(36 Chambers)](1993)이란 데뷔 앨범을 통해 힙합에 새로운 사운드를 결합하면서 흑인 대중과 비평가 양자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음산한 바이올린, 쿵푸의 아우라를 재생한 사운드 바이트 등 다양한 실험을 통해, 스테이튼 아일랜드는 새로운 힙합의 본거지로 재탄생했다. 지금 한참 유행하고 있는 동양, 특히 중국의 무술과 문자 그리고 흑인 애티튜드의 퓨전을 특징으로 하는 대도시 흑인의 청년문화 혹은 대중문화는 바로 우탱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멤버 전원이 솔로 앨범을 쉬지 않고 내고, 다양한 프로젝트 앨범, 히트곡 모음집을 양산하면서 이들의 사운드는 지금 많은 이들을 식상하게 만들고 있다. 종합 오락산업을 표방하는 우탱 왕국은 이제 노골적인 장사 속과, 지나치게 튀는 일련의 사회적 일탈 행동으로 많은 이의 빈축을 사고 있다. 음악적 리더인 RZA의 최근 앨범은 이들의 음악적 에너지가 상당히 소진되었음을 증명한다.

The Notorious B.I.G., Ready To Die (1994)

우탱에 뒤이어 두 명의 걸출한 MC가 등장함으로써, 뉴욕 힙합은 1990년대 중반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비기 스몰스(Biggy Smalls), 혹은 크리스 월러스(Chris Wallace)로 불리던 더 노터리어스 B.I.G.(The Notorious B.I.G.)는 영민한 힙합 프로듀서 퍼프 대디(Puff Daddy)의 손을 거쳐 [Ready To Die](1994)라는 기념비적 데뷔 앨범을 내놓았다. 자신의 비극적인 죽음을 예견한 듯한 타이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이 앨범을 통해 뉴욕 시에서 생존 투쟁을 벌이는 한 인간의 연대기를 극적으로 재생시키고 있다. 자기 자신의 거리 사투에서 체득한 신화와 교훈은 풍부한 그의 가사와 안정된 라임을 통해 시각적인 효과마저 느끼게 만든다. 200만 장을 팔아치우는 상업적 성공과 자신만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그는 이스트코스트 힙합의 간판이 되었고 웨스트코스트의 투팩의 라이벌이 되었지만, 이는 동시에 그의 비극적인 최후의 전조가 되었다. 그의 죽음은 갱스타 힙합의 죽음을 상징하며, 동시에 그의 사후 앨범과 추모앨범을 바탕으로 퍼프 대디가 팝적인 힙합의 대부가 되는 계기가 된다.

Nas, Illmatic (1994)

한편 B.I.G.와 같은 카리스마는 없지만 이후 뉴욕 힙합 씬의 간판이 되는 약관의 MC가 같은 해에 데뷔 앨범을 내놓는데, 그가 바로 나스(Nas)이다. [Illmatic](1994)의 완성도는 그의 영감어린 가사와, 당대의 사운드마스터인 DJ 프리미어(DJ Premier), 큐 팁, 피트 록(Pete Rock)의 견고한 비트 간의 단단한 결합을 바탕으로 한다. 퀸스브리지 아래에서 체험한 그의 경험을 토대로 나스는 누구보다도 “New York State Of Mind”를 철저하게 재현하고 있다. 그는 2년 후 팝 샘플링의 묘미를 노골적으로 과시하는 또 다른 수작 [It Was Written]으로 간판스타로서의 입지를 굳히지만, 최근의 세 번째 앨범은 호화 진용의 게스트와 폭넓은 사운드스케이프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같은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이미 그의 마음에서 퀸스브리지는 잊혀진 것일까?

21세기를 눈앞에 둔 1999년 현재, 뉴욕의 힙합, 아니 미국의 힙합은 어디까지 와있는 것일까? 캐러비안에서 미국과 영국으로 분기된 힙합 비트와 리듬은 독자적인 발전 단계를 거쳐, 이제 뉴욕과 LA의 언더그라운드를 바탕으로 다시 융합되는 과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인종, 에쓰닉, 지역, 언어의 경계 또한 힙합 씬에서는 더 이상 무의미한 상황에 이르렀다. 뮤지션뿐 아니라 청중에게 있어서도 더이상 흑, 백, 황의 경계, 언어적, 문화적 장벽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한가지 에피소드. [우드스탁 99]에 모인 20만 명의 청중(대다수는 백인청년) 앞에, 누구보다도 엄격한 흑인 청중 취향의 음악을 하는 하드코어 흑인 힙합의 대명사 DMX가 등장하였다. 썰렁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한낮 기우에 불과했고, 오히려 백인 청년들은 무대 위의 DMX와 함께 열렬히 “My Niggas”를 외친다. 설명하기 난감한 부분이다. 대중음악 평론가들이 늘 써먹는 소위 ‘문화산업의 논리’라는 것은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갈수록 복잡할 뿐이다. 19990915 | 양재영 coct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