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인터뷰는 1999년 10월 26일(화) [중앙일보]에 게재될 인터뷰를 기초로 새로운 질문을 추가한 ‘익스팬디드 버전’입니다. [중앙일보]의 질문은 문석 기자가 맡았고, [웨이브]에서는 신현준이 문석 기자의 질문을 수정하고 새로운 질문을 몇가지 추가했습니다. 본래는 박수영과 심에 대해 잘 아는 국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취합하여 인터뷰 질문을 만들려고 했지만, 시간이 촉박하여 이런 방식을 취했습니다. 박수영이 내한하면 대화를 통해 보완할 구상이 있음도 알려드립니다. 질문자를 구분하여 명기하지는 않았고, 한글과 영문을 오가는 번역은 신현준이 주로 담당했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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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우선 반갑습니다. 우선 당신에 대해 소개해주십시오(직업, 나이, 출신 지역 등등). 한국계 세 분은 한국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궁금하군요. 특히 박수영씨는 한국 이름을 고집하고 있는 것으로 봐선 1.5세가 아닌가 싶은데…

답: 나는 뉴욕주 북부지방에서 태어났지만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자랐습니다. 그곳은 미국 이스트코스트의 조그만 농촌 지방입니다. 내가–적어도 공식적으로는–한국인 ‘2세대’가 된 것은 그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나는 내가 전업적 음악인이라 생각해왔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음악으로 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근 부업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히고 있습니다. 이건 정말 열망하는 일은 아니지만, 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 일을 즐기고 있습니다.
한국과 나의 관계는 복합적입니다. 특히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기 때문이죠. 나는 27살 되던 해에 한국을 찾았고 그때 이미 성인이었습니다. 그 두 달 반 동안의 경험은 놀라운 것이었지만, 이미 끊임없이 한국이 발전한 역사와 맥락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보다 어린 나이에 방문하는 것이 좋았을 듯합니다. 때로는 지식이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20001018100253-Seam_2문: 부모님이나 가정에 대해서도 조금 알고 싶군요. 언제 한국을 떠났고 등등. 당신이 인디 록 뮤지션이 된 걸 보니, 보통의 한국계 미국인 가정과는 좀 달랐을 것 같기도 한데요. 덧붙여 대학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도 궁금합니다. 너무 ‘취조’하는 것 같나요?. 자료에 의하면 시카고로 이주할 때까지 노스 캐롤라이나, 오하이오 등의 지역에서 밴드 활동을 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어서 혼동스러워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답: 부모님들은 1962년에 대학생으로 각자 미국에 왔고, 1965년 두 분이 만났습니다. 어린 아이였을 때는 두 분이 아주 한국인같다고 생각했지만, 되돌아보면 그들은 매우 서구화된 분들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두 분 모두 하루종일 일해야 되었기 때문에 우리 형제는 항상 현관문 열쇠를 메고 다니는 아이들이었습니다. 두 분 모두 항상 영어로 말했기 때문에 저는 한국어를 말하거나 이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두 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뮤지션이 되겠다는 결심에 대해서는 별로 지지하지 않으셨다는 점은 얘기해야겠습니다. 정말 가난하고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전전긍긍했을 때, 나 혼자라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문: 그러면 이제 심의 결성과정으로 얘기를 넘어가보죠.

답: 심은 1991년에 결성되었는데, 그때는 이전에 했던 밴드[편집자주: 비치 매그닛(Bitch Magnet)]가 해체될 무렵이기도 합니다. 나는 많은 곡을 써놓았었는데, 같이 연주하던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곡들을 연주할 출구로 심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나는 복잡하고 기괴한 음악을 연주하는 일에는 점차 관심이 줄어들었고 단순한 팝 밴드에서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년 동안 심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고 음악적으로 보다 복잡해졌지만, 우리는 아직도 시작했을 때의 미니멀리즘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 심이 활동하고 있는 씬에 관해 알고 싶습니다. 활동의 중심지나 자주 연주하는 곳은 어딘가요?

답: 우리가 특정 음악 씬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따금 우리가 좋아하는 밴드들(버서스, 제이 처치, 코리아 걸, 스펜트 등이 떠오릅니다)과 함께 순회 공연을 다니지만, 우리가 특정한 장르, 예를 들어 펑크, 이모코어(emo-core), 포스트록 등에 속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음반은 로스 앤젤리스, 샌프란시스코, 애틀란타, 뉴욕, 시카고에서 잘 팔립니다. 우리는 이 도시들에서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연주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웨스트코스트에서 연주하는 걸 선호하는데, 왜냐하면 그곳의 청중들이 보다 개방적이고 덜 트렌디하고, 한국 음식이 맛있기 때문입니다. 로스앤젤리스는 정말 재밌습니다. 많은 아시안계 미국인(대부분은 한국계와 중국계) 아이들이 공연을 보러 옵니다. 뉴욕에서 연주하는 건 싫어합니다. 뉴욕에 있으면 미칠 것같습니다.

문: 음반을 통해 음악은 들어보았지만 미국의 인디 록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일단 전반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답: 페이브먼트같은 몇몇 인디 록 밴드는 너무 커져서 인디라고 생각하기는 힘듭니다. 나에게 인디는 자립을 의미합니다. 밴드는 스스로 모든 것을 돌봐야 하고 주류 배급망 외부에서 음반을 배급합니다. 인디 밴드들은 돈버는 일은 신경쓰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의 음반이 어떻게 마케팅되는지에 보다 관심있죠. 그리고 비즈니스가 반드시 공정하고 윤리적인 방식으로 수행되도록 노력합니다. 물론 그게 항상 잘 되는 건 아니지만, 그게 일반적 정신입니다. 최근에는 훌륭한 인디 밴드들이 네덜란드, 일본, 독일, 타이완 등지로부터 나오고 있기 때문에, 인디가 꼭 미국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 어리석은 질문으로 보이지만 심을 포함해서 인디 밴드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답: 간단합니다. 연주하는 것을 즐길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레코딩하기를 바라는 것이죠. 음반사가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말을 듣지 않고서 말이죠.

문: 인디 밴드들이 음악 활동을 전업적으로 지속할 수 있으려면 하나의 음반이 평균적으로 어느 정도 판매되어야 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심의 경우 음반 판매고는 어느 정도인지요? 그곳 인디 씬의 경제적 구조를 알고 싶을 뿐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껄끄러운 질문이라면 답변하지 않아도 좋고 답변해주어도 [웨이브]에는 싣지 않겠습니다.

답: 괜찮습니다. 각 밴드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적어도 한 음반 당 15,000 내지 20,000장의 카피를 팔아야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직업적으로 성공하여 순회 공연을 꾸준히 유지할 만큼 충분한 청중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최근 두 장의 음반은 전세계적으로 그 정도 판매되었습니다.

문: 인디 밴드가 메이저 밴드와 다른 점은 어떤 것인가요? 예를 들어 투어, 레코딩, 클럽 콘서트 등.

답: 인디 밴드들은 생존하기 위해 투어를 해야 하므로, 그 점에서는 메이저 밴드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미국은 큰 나라라서 한 해에 두 번 미국 순회 공연을 하는 데 4개월이 족히 걸리고, 유럽까지 순회 공연을 하려면 거기에다가 한 달 이상이 더 걸립니다. 공연하는 데만 6-7개월을 소비하기 쉽죠, 이런 식의 여행은 정말 밴드를 소모시킵니다. 또한 레코딩 예산이 작기 때문에, 인디 밴드들은 스튜디오에 있을 때도 재치와 수완이 필요합니다.

문: 본인들의 음악에 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실제로 대중들이 받아들이기엔 좀 어려운 느낌을 없지 않은데. 즉 당신들의 음악은 ‘익명의 대중’이 즐길만한 것은 아닌 듯한데요.

답: 우리의 미학은 ‘둘다의 미학’입니다. 즉, 조용한 것과 시끄러운 것, 복잡한 것과 엉성한 것, 빠른 것과 느린 것 등 모든 음악적 요소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누구라도 우리 음악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노래방을 위한 음악은 아닙니다.

20001018100253-Seam_3문: 당신의 음악의 주요 청중의 성격이 어떠냐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에서는 주로 ‘대학생(나이의 세대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성향이나 취향은 어떤가요?

답: 우리 팬들 대부분은 20-30대이고, 아직 대학교에 다니고 있거나 갓 졸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 각각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들 모두를 하나의 동질적 집단으로 생각하기는 곤란하군요.

문: ‘시카고 음악 씬’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지, 있다면 그곳에서 당신의 역할이나 지위는 어떤 것인지도 묻고 싶습니다. 한국에서는 소수의 음악 팬들이 ‘포스트록 무브먼트’와 관련지어 시카고 씬에 대해 주목한 적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비치 매그닛에서 함께 있었던 데이빗 그러브스나 토오터스에 참여했던 데이비드 파조와 번디 브라운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답: 시카고는 많은 뮤지션을 보유한 대도시고, 그래서 갖가지 상이한 음악 씬들이 존재합니다. 지금은 많은 시카고 출신의 포스트록 밴드들이 존재하고 있고, 이 씬이 전국적 수준에서 미디어의 주목을 낳고 있지만, 다른 많은 음악적 씬도 게속 나오고 있습니다. 힙합, 재즈, 블루스, 펑크 록, 일렉트로니카가 모두가 그들 스스로의 활기있는 씬을 가지고 있습니다. 데이브 그룹스를 본 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그는 시카고 주위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연주해 왔지만, 요즘에 우리는 서로 너무 다른 음악을 하고 있어서 별로 만날 기회가 없군요. 번디 브라운(그의 부모 중의 한 분이 한국인입니다)은 약사로 일하고 있고 가끔은 음악을 연주합니다. 다음 달 번디는 시카고 아시아계 미국인 재즈 페스티벌에서 찰스 킴과 함께 연주할 것입니다. 둘 모두 훌륭한 뮤지션이라서 그 공연이 기대됩니다. 번디 브라운의 최근작인 [Directions in Music]은 대단합니다. 그 음반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데이브 파조는 켄터키에 살고 있어서 그를 거의 보진 못했습니다. 저는 그의 밴드인 에어리얼 엠의 열렬한 팬입니다.

문: [The Problem With Me]와 [Are You Driving Me Crazy?]이 심의 음악의 ‘전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서서히 타오르다가 불타오르는 전개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최근작 [The Pace Is Glacial]은 제가 듣기에는 새로운 시도로 보였지만 그곳 평단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아 보입니다. 이 점에 대해 얘기해주시죠. ‘평론가들은 X같다’는 말 빼고요.

답: 평론가들이 우리 음반에 대해 뭐라고 하든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만든 음반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The Pace Is Gracial]의 사운드는 실망스럽습니다. 레코딩 동안에 기술적인 문제가 있었고 그 때문에 책정된 예산을 넘어버렸고 몇 가지 문제는 타협했습니다. 그렇지만 [The Pace Is Glacial]의 작곡은 이전의 어떤 음반보다도 강렬하다고 생각합니다.

문: 조금 통속적인 질문이지만 주류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한국에서도 인기있는 한때 ‘얼터너티브’했던 슈퍼밴드들–예를 들어 알이엠, 너바나, 펄 잼, 스매싱 펌킨스–에 대한 당신의 생각도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할 듯도 합니다.

답: 그들 중 몇몇이 그들의 경력을 쌓는 과정에 쏟아부은 힘든 작업을 존중하지만, 그들의 대중성(인기)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군요.

문: 당신들의 음악에서는 짙은 우울함이 느껴집니다. 그 우울함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혹시 그것이 당신이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나요?

답: 내가 쓴 몇몇 가사는 이곳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 살아가는 경험을 특별히 다루었습니다. 비록 미국에서는 상대적으로 특권적인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나라에서 몇몇 일들에 대해서는 매우 씁쓸한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이 나라가 채택하고 있는 무자비한 종류의 자본주의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지만, 20% 이상의 사람들은 빈곤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프랑스, 일본 혹은 다른 선진국에서 이런 종류의 불평등은 없을 듯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이 점이 증오의 원천입니다.

문: 당신의 음악에서 특별히 ‘한국적인 것’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한국에 오고 싶어 한다는 열망도 ‘의외’였습니다. 가사가 잘 들리지도 않죠. 오히려 한국에 있는 당신의 팬들은–나를 포함하여–오히려 당신이 ‘한국인같지 않게 록 음악을 잘 연주해서’ 좋아합니다. 당신의 음악은 ‘한국에 사는 한국인’의 정서와는 거리가 멉니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의 정서를 표현한 것인지는 알 수 없군요. 한마디로 말해, 당신의 음악에서 ‘한국적인 것(아시아적인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설명 부탁합니다.

답: 당연히 우리는 한국에서 연주하기를 원했습니다. 언뜻 보면 우리가 한국과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은 많지 않아 보이지만, 나는 서울이나 시골의 거리를 걸어다니면서 매우 편안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많았지만요. 시카고나 미국의 어디에서도 불가능한 익명성을 즐길 수 있습니다.
우리 음악은 대부분의 한국계 미국인에게는 호소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신념을 담은 음악을 만들 뿐이고 사람들이 우리 음반을 듣고 공연을 보러 오기 바랄 뿐입니다. 한국계 혹은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나의 정체성은 무엇을 선택하여 음악을 만들까라는 문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우리는 특정하게 한국계 미국인 청중을 타겟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국계 미국인 커뮤니티의 주변에 있으면서 흥미로운 작업을 하는 일군의 집단이 존재합니다. 유태원(밴드 키킹 자이언트와 KG의 일원), 헬렌 리(한국계 캐나다인 영화감독), 마이클 킴(팬진 [시크릿 아시안 맨]의 발행인, 엘리자베스 이(밴드 코리아 걸의 일원), 클리프 손(영화감독) 등이 그들입니다.

문: 소문으로만 알고 있는 FAAIM에 대해서도 묻고 싶습니다. 위 단체를 설립한 취지나 주요 행사, 재정 운영 등에 대해 길게 말씀해주셔도 좋습니다. 물론 이와 관련하여 [Ear of the Dragon]에 대해서도 언급이 필요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시안계 아메리칸들의 문화적 소통과 연대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에스닉 아시안’이라는 정체성이 ‘록 음악인으로서의 당신의 정체성’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궁금하군요. 기우이지만 혹시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당신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계속 그곳 인디씬의 영웅이 되기를 바라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20001018100253-seam_4답: FAAIM은 아시아계 미국인의 미디어 재현이 부족한 점에 대해 항의하는 의미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에게 FAAIM은 비밀스럽게 느껴지겠지만, 우리는 이 나라에서 소수이므로 비아시아인들이 우리의 존재를 잊기 쉽습니다. 글로써는, 자신과 닮은 사람을 보지도 못한 채 텔레비전과 영화를 보면서 자란, 좀 이상한 청춘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겠군요. 줄여 말하면, 바로 이런 경험이 아시안 아메리칸을 함께 묶는 것입니다.

문: 한국에는 몇 번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 들어와서 했던 일들을 설명해 주시고(한 자료에는 영어 교사를 했다고 적혀 있더군요), 그때 느꼈던 감정들을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한국 음악은 들어보셨습니까. 그랬다면 어떤 밴드가 귀에 들어오던가요. 또한 한국 음악인과의 교류는 있습니까.

답: ‘가요’는 많이 듣지 않지만, 들어본 음악 중에 퓨어디지틀사일런스(PDS), 델리 스파이스(Deli Spice), 옐로우 키친(Yellow Kitchen)처럼 보다 언더그라운드적인 음악은 좋아합니다. 서울에 갔을 때 홍대 앞의 [시티비트] 음반점에 들러 CD들을 산 일도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이메일로 몇몇 한국 밴드들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국의 펑크 밴드나 인디 밴드가 미국에 와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일본 밴드들은, 대부분 혁신적이거나 흥미롭지 않지만, 항상 이곳에 와서 연주합니다.

문: 한국의 인디 씬은 이제 막 싹트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당신이 참가하기로 한 ‘소란’ 공연도 조촐한 행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개별 밴드와의 접촉을 넘어서 한국의 인디 씬에 대해서는 어떤 정보와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답: 그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S.E.S나 H.O.T말고 다른 한국 음악이 있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그런 종류의 ‘하이 에너지’ 음악은 머리가 아파서요.

문: 이번에 레코딩에 참여하기로 한 델리 스파이스의 음악에 대해서도 잠깐 물어보고 싶습니다. 덧붙여 물어볼 것도 있는데… 그들을 비롯한 한국의 인디 밴드들은 국내의 음악 시장 내에서는 더 이상 팬을 확대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들이 미국 시장에 ‘실질적으로’ 진출하여 보다 많은 팬들과 소통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가능하다면 어떤 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내가 들은 델리 스파이스의 음반은 여러 장르에 걸쳐있더군요. 그 점이 흥미롭습니다. 난 한국에서 델리가 ‘거물’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저는 한국 음악 시장에 대해서도 잘 모르거든요. 언어 장벽 때문에 아마도 미국 시장에 진출하기는 힘들겠죠. 그렇지만 대단한 곡들이니깐 또 모르죠. 미국 시장은 중요하지만, 일본, 홍콩, 한국, 타이완 또한 각각 나름대로 큰 시장을 갖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 년 간 여기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문: 당신들의 음반이 한국에 라이선스 출반된다니 축하드립니다. 음반을 듣고 공연을 보게 될 한국 팬들에게 할 말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답: 열심히 공부하고 부모 말씀을 잘 들으라는 말요?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서울에서 연주하고 우리 음반이 한국에서 발매된다는 사실에 정말 흥분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는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 연주했지만, 한국에서는 연주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정말 다른 느낌일 테고, 특히 나와 신승우(William Shin), 존 리(John Lee)게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결코 잊지 못할 느낌이라고 확신합니다.

문: 마지막으로 지속적인 교류를 위해서 필요한 일들은 무엇인지 당신의 구상이 있다면–잠재적인 것이라도–말씀해 주십시오.

답: 균형과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19991023 | 신현준 homey@orgio.net

[english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