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923074741-red04Red House Painters – Ocean Beach – 4AD, 1995

 

 

다소 대중적인, 그러나 여전한 붉은집 도공들

최근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고 있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파스칼의 다음과 같은 경구로 시작한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 체코의 작가인 밀란 쿤데라는 [느림]에서 아예 탄식조로 흐느낀다.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현대 사회는 속도가 지배하는 사회다. 그래서 느림은 그 자체만으로 불순한 힘을 지닌다. 마크 코즐렉(Mark Kozelek)의 레드 하우스 페인터스(Red House Painters)를 듣고 있으면 마치 이들이 ‘느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진실은 알 수 없으며, 경박해지는 삶의 속도에 무게를, 조급해지는 조바심에 인내심을 가져오려는 의도를 읽는 것도 실은 내가 그렇게 읽고 싶은 것일지도.

1989년 샌 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된 레드 하우스 페인터스의 여정은 이 앨범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맞는다. 통산 네 번째이자 결국 4AD에서의 마지막 앨범이 되고 만 [Ocean Beach]는 이들의 디스코그래피에서 가장 대중적인 소리를 담고 있다. 그렇지만 사운드가 대중적이라고 해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며, 관점에 따라서는 평범한 포크 록에 가까워졌다는 불평을 자아낼 수도 있다. 초기 이들의 음악은 뿌연 안개처럼 흐릿한 기타 드론(drone)이 깔리면서 자못 실험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Ocean Beach]는 어쿠스틱 기타 반주가 상대적으로 많으며 다소 밝고 친근한 선율을 담고 있다.

앨범은 전원적인 분위기의 경쾌한 어쿠스틱 넘버 “Cabezon”으로 시작한다. 고즈넉한 첼로 연주의 감상적인 “Summer Dress”를 지나면 제법 임팩트 강한 기타 훅을 가진 “San Geronimo”가 이어진다. 이 곡은 왠지 닐 영(Neil Young)의 “Heart of Gold”를 떠올리게 하는데 마크 코즐렉이 커버 곡에 남다른 재주가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연이 아닌 듯 싶다. 앨범에서 가장 귀에 들어오는 선율을 담고 있는 “Shadows”는 피아노 반주로 진행되다 오르간이 가세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하지만 앨범은 중반을 넘어설수록 응집력을 잃는다. 초기 사운드에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는 “Moments”는 어쩐지 제자리가 아니라는 인상을 주며, 마지막을 장식하는 “Drop”은 “Shadows”를 횡적으로 확장시켰다는 느낌을 넘어서지 못한다. 특히 앨범이 끝날 무렵 반복되는 사이키델릭한 연주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

레드 하우스 페인터스는 ‘감성’이라는 말이 남용되는 모던 록에서도 특히 감성적이기로 유명하다. 서정을 분류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시도이긴 하지만 닉 드레이크(Nick Drake)와 엘리엇 스미스(Elliott Smith)의 서정을 극단적으로 밀고 갔다고 하면 될까. 때문에 코드가 맞는 모던 록 매니아들에게는 전폭적인 사랑을 받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지루하고 졸린 밴드’이다. [Ocean Beach]는 레드 하우스 페인터스의 세계로 들어가는 비교적 손쉬운 문이라 할 수 있다. 이들에게 관심이 있다면 말이다. 20000906 | 장호연 ravel52@nownuri.net

6/10

수록곡
1. Cabezon
2. Summer Dress
3. San Geronimo
4. Shadows
5. Over My Head
6. Red Carpet
7. Brockwell Park
8. Moments
9. Drop

관련 사이트
레드 하우스 페인터스 비공식 팬사이트
http://www.geocities.com/Paris/LeftBank/1854/

게으름과 느림에 관한 몇 가지 읽을거리
폴 라파르그, 게으를 수 있는 권리 (새물결, 1997)
버트란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사회평론, 1997)
밀란 쿤데라, 느림 (민음사, 1995)
스탠리 코렌, 잠 도둑들 (황금가지, 1997)
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동문선,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