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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댄스 그룹의 특징 중의 하나는 ‘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유승준이나 김현정같이 혼자서도 ‘그림’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곤 대부분 그렇다. 유명한 그룹의 예만 들어봐도 H.O.T.는 5인조, 젝스키스는 6인조, 신화는 6인조, N.R.G.는 5인조, G.O.D.는 5인조다. 이상의 예는 모두 남성 그룹들이다. 여성 그룹의 경우는 S.E.S.나 디바처럼 3인조거나 핑클처럼 4인조로 비교적 단촐했지만, 최근 정상을 차지한 베이비복스같은 그룹은 5인조다. 여성 그룹도 앞으로는 떼를 이루는 성원이 좀 많아질 듯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사람의 수가 많아지면 그룹의 수입에 대한 각자의 분배몫은 줄어들 게 뻔하고 팀워크를 갖추는 일도 어려워질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룹의 성원 수가 갈수록 많아진다. 공연히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이들은 어쨌든 ‘음악’을 하는 그룹이므로 음악적 이유는 없을까. 그런데 떼 그룹의 음악을 들어보면 굳이 그렇게 많은 멤버를 필요로 하지 않아 보인다. 악기 연주자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개성있는 목소리를 필요로 하는 가창 부분도 없다. 청각적인 이유보다는 시각적인 이유를 찾는 게 빠를 듯하다. 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풀어가는 것도 식상하긴 하지만 말이다.

하나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다. TV 수상기의 화면 사이즈가 갈수록 커지는 현상 말이다. 1980년대까지 TV 화면은 솔로나 듀엣 정도가 적절한 화면이었지, 그 이상 나오면 좀 정신사나웠다. 5인조 록 그룹인 송골매가 등장했을 때 14인치 TV로는 ‘화면이 꽉 찬’ 느낌을 주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나마 몸을 흔들지는 않으니까 봐줄만 했지…. 하지만 나날이 발전을 거듭했던 한국의 전자산업과 가계 소득 수준의 상승으로 TV 사이즈는 커져만 갔고, 반상회 때 쪽팔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아줌마들은 더 큰 TV를 무리해서라도 구매해왔다. 그래서 1990년대 초 서태지와 아이들같은 3인조가 흔들어대는 모습은 20인치 정도의 TV에나 적절하지 요즘같이 커다란 TV로 보면 썰렁해 보일 듯하다. 요즘같이 25인치도 후져보이는 상황에서 넓은 화면에 ‘그림’을 다채롭게 채우려면 그룹 멤버들이 여러 명이 있는 게 유리할 듯하다.

하지만 ‘화면 사이즈’ 얘기는 그냥 해보는 얘기지 이걸로 모든 걸 설명하기는 무리다 무리. 또 안무를 통한 시각적 효과는 ‘백 댄서’를 고용할 수도 있는 일이다. 비용과 효과 양면에서 그러는 편이 더 효율적일 듯하다. 요즘 춤 잘추고 ‘값싼’ 애들 찾는 건 일도 아니다. 실제로 1990년대 초반의 떼그룹의 원조들 — 잼(Zam)이나 잉크(Ink) 등의 이름을 기억하세요? — 은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현재의 현상을 이해하려면 제작자의 어려운 입장을 생각하는 게 나을 듯하다. 한마디로 요즘은 음반이 예전처럼 안 팔린다. 음반 타이틀 수는 1996년도 연간 1,200개 정도를 절정으로 내리막을 걸어 요즘은 6-700개 정도로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또한 도매상의 연쇄 부도 이후 음반유통 사정이 위축되면서 소매상들은 선입금을 납부해야 하므로 확실한 음반 아니면 물건을 떼어오지 않는다. 한마디로 신인 그룹이 시장에 얼굴을 들이밀기 힘든 상황이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작자의 선택은 여러 명을 모아 하나의 그룹을 만들고 여러 명의 스타를 동시에 보는 효과를 노리는 수밖에 없는 듯하다. 이렇게 하는 게 비싼 제작비를 들이고 솔로 가수를 키웠다가 실패하면 본전도 못 건지는 것보다는 낫다. 마치 예금 통장이나 증권을 여러 군데에 ‘위험 분산’시키듯 멤버 각각에게 분산 거치하는 셈이다. 떼 그룹들이 마치 제복을 입듯이 브랜드 이름이 선명하게 보이는 똑같은 의상을 입고 등장하는 현상도 ‘협찬’을 받아야 하는 최근의 어려운 사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나아가 어느 정도 그룹의 이름이 알려지면 멤버 각각의 특유한 캐릭터를 만들어내면 더욱 큰 성공이 보장된다. 팬들 사이의 경쟁 심리를 유발하고 그 속에서 상승작용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스타 시스템에서는 한국보다 한 수 위인 일본의 경우 최고 인기그룹인 SMAP의 경우 음반 판매량은 H.O.T.보다 훨씬 적다. 반면 멤버 각각이 상이한 캐릭터로 여러 곳에 판매된다. 이들이 작사가나 작곡가는 아니므로 저작권은 아예 없을 테고 저작 인접권을 통한 수입이야 홍보비로 다 지출되었으므로 남는 건 초상권밖에 없을 듯하다.

한국도 곧 그러려나. 핑클의 팬들이 유리 팬, 효리 팬, 진이 팬으로 나뉘는 것은 그런 전조로 보인다. 나같은 올드 팬은 노래가 되는 주현이 팬이었다(뭐 약간의 연민과 동정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주현이도 얼굴에 칼을 댔는지 어쨌는지 본격적으로 캐릭터 상품으로 나선 모양이다. 거기에 목숨 걸지 않으면 ‘가수’ — ‘노래도 부르는 연예인’이 아니라 ‘노래 잘 부르는 기능인’ — 으로는 먹고 살기 힘든 모양이다. 그래서 궁금증이 생긴다. 한 15년 뒤 지금의 ‘스타’들은 뭐하면서 먹고 살고 있을까. 뭐 굳이 걔들만 불확실한 건 아니니까 더 이상 궁금해 할 필요 없다.

그런데 정말 떼 그룹이 등장했다. 이건 그룹이 아니라 ‘패밀리’란다. 별 거 아닌데 포장만 요란한 건지 심상치 않은 구석이 있는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 죄송! 다음 기회에… (그런데 떼 = 그룹이네…) 19990815 | 신현준 homey@orgi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