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연말이 되면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이라든가 특집이 꾸며진다. 올해는 연말이자 10년말이자 세기말이므로 범위가 좀 넓어질 모양이다. 그래도 대략 1950년대 후반 이후의 대중음악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프로그램을 접하는 나의 솔직한 심정은 ‘뻔할 뻔자’ 이상이 안된다. 1등은 확실히 예측가능하고, 2위부터 10위까지도 순위를 정확히 맞히지는 못하더라도 대충 어떤 곡이 나올지 예측할 수 있다.

한국인의 팝송 취향에는 몇 가지 불문율이 있고, 이게 파괴되는 경우는 천재지변에 가깝다. 팝송의 경우 본토에서의 인기와는 다른 여기 고유의 기준이 있다는 게 첫 번째 불문율이다. ‘한국인은 아름다운 멜로디를 좋아한다’는 것이 두 번째다. 마지막은 ‘시대의 유행과 무관하게 꾸준히 사랑하는 곡이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에 대해 어떤 베테랑 라디오 DJ는 ‘올타임 리퀘스트’라는 용어를 사용했다(이 용어는 아마도 ‘사투리’일 듯하다). 그래서 한국인은 같은 음악인이라고 하더라도 “Heartbreak Hotel”보다는 “Love Me Tender”를, “I Wanna Hold Your Hand” 보다는 “Yesterday”를, “Layla”보다 “Wonderful Tonight”을 선호한다는 ‘검증된’ 결과가 나온다. 한마디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은 ‘이지 리스닝 팝 발라드’다.

나는 이런 주장에 반대할 생각은 없다. 나도 그런 취향과 그리 다르지 않으니까. 단지 이런 주장이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낳는다’는 생각을 완전히 없애기는 힘들다. 무엇보다도 이런 취향은 ‘성인’의 것이다. 이런 특집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시간대가 그렇고, 엽서나 메일을 보내는 사람들의 계층이 그렇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취향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게 아니라 ‘편중된’ 층의 취향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 층이 ‘음악을 가장 열심히 듣는 층’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취향을 선도한다기 보다는 유지하는 층이라는 ‘의심’은 든다. 대담할 수 있다면, 이 층에게 음악의 기능은, 먹물 냄새나게 말하면, ‘과거의 기억을 조직하는 것’이고, 쉽게 말하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 이상이 아니다(이렇게 말을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은 ‘*줌마 취향’이라는 단정적인 용어를 쓰면 그러면 “우리가 그 곳 말고 권력을 느낄 데가 어딨냐?”라고 반문할 사람들에 대해 반문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긁적긁적. 절대 비하한 거 아닙니다).

그것도 괜찮다. 불만스러운 점은 이렇게 취향을 ‘고정’시키는 지상파 방송국의 노력이 소수의 취향을 배제한다는 점이다. 순위 리스트에 끼지 못하고 후보곡으로 남은 곡들이라 해도 리스트에 오른 곡과 상이한 스타일이 아니라 비슷한 스타일이지만 단지 지명도가 덜할 뿐이다. 결국 특정한 음악 스타일만을 좋아하도록 다시 한번 확인하는 셈이다. 이 리스트는 노래방 선곡 메뉴의 ‘팝송 코너’와 거의 다르지 않다. 한국 가요와 달리 몇 년이 지나도 변화는 별로 없다. 팝송은 가요와 비슷한 게 아니라 오히려 동요, 민요, 군가랑 비슷하다.

그런데 사실 이런 말 자체가 진부한 말일 수 있다. 시청률을 의식해서 시청자의 기성의 취향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방송 관계자의 이유있는 항변도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또 ‘대안을 말해 봐라’고 묻는다면 ‘본토의 취향에 가까운 것이 좋은 취향이다’라는 말밖에 안될 듯하다. 본토의 취향이래봐야 정작 그 바닥에서는 특별히 고상할 것 없는 ‘대중적’ 취향 이상은 아니니 그것도 좀 그렇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런 ‘취향의 게임’이 좀 재미없는 것은 사실이다. 복잡한 얘기 다 떠나서 특집 프로그램에서라도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취향의 다양성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한국인의 생활양식이 그리 다양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팝송은 중학교 시절 처음 접해서 고등학교 때 ‘열심히’ 듣다가 대학교를 마치면 동시에 ‘졸업’하는 대상이 된다. 성별의 차이도 없지는 않은데 ‘가장’이 되어야 하는 (대부분의) 남자는 ‘망각’의 세월을 살고, 그렇지 않은 (많은 수의) 여자는 노스탤지어의 바다에 빠져 산다. 대부분은 자기가 직접 고른 음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틀어주는’ 방송을 통하는 게 성인들의 음악 문화다.

골치아픈 문제 다 잊어버리고 노래방에 가서 팝송이나 한 곡 부르자. 그런데 반주가 영 꽝이다. 가요 반주는 그럴 듯한데. 팝 반주기를 따로 만들어야 하나, 요즘 ‘테크노 음악’ 한다는 사람 많던데 이것도 좀 하면 안되나? 그건 음악이 아니라 무작(muzak)이라고 그러겠지… 19991207 | 신현준 homey@orgi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