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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가 인기가 있긴 있나보다. 연예계에 과문한 나도 멤버들의 이름이 낯설지 않을 정도니 (아직 누가 누군지는 잘 모른다).

운이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작년 초겨울 어느 주말을 집에서 뒹굴다 g.o.d의 2집 컴백 무대를 TV로 보고야 말았다. 힘겨웠던 IMF 시대의 송가 “어머님께”의 어처구니없는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의 기막힌 안무와 장엄한 합창을 듣게 되다니. 나의 이런 g.o.d에 대한 인상이 바뀌게 된 것은 문제의 곡 “애수”를 듣고부터였다. 물론 그 곡은 박진영의 손끝에서 나온 곡이었다. 하긴 이들 뒤엔 항상 그가 있었지.

그래, 중요한 것은 g.o.d가 아니라 박진영이다. 그런데 그의 슬하에는 g.o.d뿐만 아니라 박지윤, 진주, 량현량하 등이 있다. 도도한 여고생 가수, 살벌한 가창력의 디바, 여기에 기이한 쌍둥이 댄서까지 저마다 독특한 개성으로 무장한 스타들이다. 이처럼 쟁쟁한 스타들에 대해 박진영에게 붙여지는 칭호는 ‘프로듀서’다. 그러고 보니 몇 해 전부터 가요계에서 프로듀서라는 말이 심심치않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물론 (주로 ‘사장님’이 맡는) 이른바 ‘executive producer’는 예전부터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제작자’나 ‘매니저’가 아니라 ‘진짜’ 프로듀서가 나오고 있는 걸까.

박진영 외에 프로듀서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또 한 명의 스타는 이현도이다. 그는 지누션, 룰라, 유승준 등의 음반 제작을 통해 가요계의 또 하나의 마이더스의 손으로 자리잡았다. 한편 최근 인도풍의 음악 “한”으로 TV에 부지런히 얼굴을 팔고 있는 샤크라의 배후에는 이상민이 있다. 룰라의 멤버로 표절과 상업성 시비의 한가운데서도 후진양성의 꿈을 키워온 그는 컨츄리꼬꼬, the BROS, S#ARP 등 성공작과 실패작을 두루 내면서 드디어 스타 프로듀서 대열에 합류했다.

공교롭게도 이들이 하는 음악은 모두 댄스 음악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궁금증이 생긴 다. 왜 하필 프로듀서인가? 작곡가가 아니라… 발라드는 여전히 작곡가가 음반 제작의 중심이지 않은가? 그럼, 작곡가와 프로듀서는 어떻게 다른가?

원칙대로라면 작곡가는 ‘곡'(기본 코드를 동반한 멜로디)을 만드는 사람이고, 프로듀서는 만들어진 곡에 음향을 입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발라드는 멜로디가 중요하고 댄스 음악은 스타일이 중요해서? 그런데 사실 발라드에도 프로듀서가 있고 댄스 음악에도 작곡가가 있다. 한국의 대중음악계에서 작곡가와 프로듀서의 역할이 분명하게 구별되는지도 의문이고, 어쩌면 작곡가보다 프로듀서가 좀더 그럴 듯하게 들리기 때문에 명함만 프로듀서라고 내미는지도 모른다. 뭐, 이건 추측일 뿐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일반인들은 발라드 곡의 작곡가가 누군지 잘 모르지만, 댄스 음악의 경우 누가 프로듀스를 하는지, 좀더 정확히 말해 누가 키우는 애들인지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즉, 샤크라를 이상민이 키웠다는 것은 스포츠 신문만 열심히 보면 알 수 있지만, 조성모, 임창정, 김민종 뒤에서 각각 이경섭, 김형석, 서영진/조규만이 부지런히 곡을 써다 바친다는 것은 음반 부클렛을 꼼꼼히 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이는 잘 나가는 댄스 음악 프로듀서가 스타급 가수이기도 하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점인데, 한편으로는 왜 발라드에는 스타 작곡가가 없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하게 되었다.

발라드는 속성상 작곡가가 누구든지 간에 가능한 한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노래부르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작곡가의 존재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댄스 음악은 그럴 필요가 없을 뿐더러 어차피 음악성보다 춤 잘 추고 외모 받쳐주는 것이 더 중요하므로 분업화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 또 상대적으로 유행 주기가 짧고 경쟁이 치열한 댄스 음악의 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미 성공한 자의 줄을 타는 것이 좋다. 역으로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중들의 변덕을 감당하면서 위험 부담을 감수하느니 얼굴 반반한 젊은애들을 대신 무대에 올리고 자기는 뒤에서 ‘작가’ 대접을 받는 것이 보기에 좋다. 이 얼마나 합리적인 시스템인가.

어쨌든 이것도 작곡 실력과 트렌드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가능한 얘기다. 그런데 성공한 프로듀서에 대한 시각은 뮤지션과 ‘비즈니스맨’이라는 양면을 공유하고 있다. 특히 박진영은 1999년 초 군대 문제로 파문을 일으킨 뒤 계속 신인가수 발굴에만 전념하고 있는데, 그의 들쭉날쭉한 곡 수준으로 인해 평가가 분분하다. 단적으로 말해 엄정화의 “초대”와 량현량하의 “춤이 뭐길래”처럼 극과 극을 오고 간다. 어쩌면 이런 점이 오히려 그의 긴 생명력의 증거가 될는지도 모르겠지만.

최근 이런 양립 구도에 새로운 조짐이 보인다. 발라드 쪽에서 이승환이 중심이 된 ‘드림 팩토리’가 이소은과 이수영이라는 신인 여가수를 차례로 데뷔시키면서 스타 프로듀서의 대열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015B의 정석원을 이 분야의 선구자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H.O.T의 강타가 최근 발표된 이지훈의 4집에 곡을 써 주었다는데 설마 그가 새로운 스타 프로듀서를 꿈꾸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데 아예 작곡가에서 가수로 성공하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 있어 눈길을 끈다. 어쩌면 이 글이 실릴 즈음이면 “노을의 연가”가 꿈에 그리던 가요순위 프로그램 1위를 차지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지는 않을까. 20000429 | 장호연 ravel52@nownur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