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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스탁 페스티벌(Woodstock Music and Art Fair)은 1969년 8월 15일부터 3일간 뉴욕 주 북부 베델 근처 화이트 레이크의 한 농장에서 열렸다. 30-50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그 농장으로 몰려갔다(입구를 부수고 들어간 사람의 수가 너무 많아 신뢰성 있는 추정치를 얻기 어렵다).

이들과 함께 히피 공동체의 ‘지상 낙원’을 꾸민 출연자는 지미 헨드릭스, 컨트리 조 & 더 피시(Country Joe & the Fish), 후,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조 카커(Joe Cocker), 산타나(Santana), 텐 이어스 애프터(Ten Years After),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 블러드, 스웻 앤 티어스(Blood, Sweat & Tears), 존 바에즈(Joan Baez), 알로 거스리(Arlo Guthrie), 크로스비, 스틸스, 내쉬 앤 영(Crosby, Stills, Nash & Young), CCR, 더 밴드(The Band), 그레이트풀 데드, 제퍼슨 에어플레인, 라비 샹카 등이었다.

우드스탁은 앞서의 페스티벌과 마찬가지로 음향 시설이 형편없었고, 음식과 물과 화장실도 턱없이 부족했으며, 게다가 폭우가 쏟아져 농장은 거대한 진흙뻘 같았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상황도 우드스탁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 히피 반문화 공동체의 열기를 누그러뜨리진 못했다. 부족한 샤워 시설과 폭우는 천진난만하게 물장구를 칠 물 웅덩이로 대체되었으며, 진흙 뻘은 히피들의 낭만적인 놀이터가 되었다. 사랑과 평화의 모토를 단 그곳은 ‘우드스탁 네이션’으로 명명되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성공적이었지만 동시에 거대한 규모의 페스티벌의 상업적 성공의 전례가 되었다. 뮤지션의 높은 개런티(후와 그레이트풀 데드는 현금으로 1만 5천 달러를 요구했다)와 입구를 부수고 무임승차한 청중으로 인해 페스티벌 자체는 130만 달러의 큰 손실을 기록했다. 하지만, 개봉 첫 5주 동안만 2천 5백만 달러를 벌어들인 영화 [Woodstock], 3장짜리 사운드트랙, 비디오 출시가 이어져, 결과적으로 우드스탁은 총 5천만 달러라는 엄청난 수익을 남겼다.

그렇지만 우드스탁에서 미국 국가 [Star Spangled the Banner]를 조롱하던 지미 헨드릭스의 호기롭던 연주는 알타몬트(Altamont)의 사건으로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1969년 전미 투어를 마친 롤링 스톤스는 팬들을 위한 무료 콘서트를 열었는데, 공연 하루 전에 장소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약 30만명이 샌프란시스코 남동쪽 알타몬트 고속도로 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롤링 스톤스의 공연 막바지에, 경비대로 고용된 오토바이족 헬스 앤젤스(Hell’s Angels)가 한 흑인 청년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그 광경은 투어 필름에도 담겼다. 우드스탁에서도 사망자가 나왔지만 낭만주의적 청년 문화의 화려함에 묻혀 잊혀진 바 있다. 그러나 알타몬트의 사건은 곧 이슈화되었고, 언론과 기성 세대의 집중 포화를 맞았다. 몬터레이 이후 여러 페스티벌에서 약물과 소요에 의해 사상자가 발생해왔지만, 알타몬트의 비극은 1960년대, 히피 반문화의 끝을 보여준 너무나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1960년대 록 이데올로기의 한 단면을 드러낸 것이었다.

몬터레이와 우드스탁은 청년을 하나의 문화 블록으로 형성시켰다. 우드스탁은 1960년대의 낙관주의와 청년 연대의 상징이 되었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이상향 혹은 향수의 대상이 되었다. 신화로 치장된. 19990815 | 이용우 pink72@nownuri.net

관련 사이트
뮤직 페스티벌 홈페이지
http://www.geocities.com/~music-festival

우드스탁 69 홈페이지
http://www.woodstock6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