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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rl Jam – Binaural – Sony, 2000

 

 

팬과 함께 성숙해가는 느림의 미학

첫 느낌이 항상 정확하리라는 법은 없다. 펄 잼(Pearl Jam)은 첫 느낌과 계속된 느낌이 다른 음악에 속한다. 평범해 보이지만 한번에 실체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이들의 음악이 느림의 음악이기 때문이다(예외가 있다면 2집 [Vs] 정도이다). “Spin The Black Circle”처럼 휘몰아치는 개러지 펑크 넘버이거나, “Who You Are”처럼 에스닉한 곡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회화에 비유하자면 수많은 덧칠 작업으로 원래의 형태와 색을 분간하기 힘든 유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인내심을 갖고 차분하게 그러나 뚜렷이 응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는 것이 좋다.

어쩌면 이번 6집은 이들의 디스코그래피에서 가장 재미없는 음반일지도 모른다. 사실 이들의 음악 세계는 4집을 끝으로 하나의 순환을 완성했다. 그런지의 정의를 내린 1집과 스트레이트한 로큰롤의 2집, 비의문(秘儀文) 같은 실험으로 채색된 3집, 그리고 복고적이고 스피리추얼한 4집… 이미 펄 잼은 록 음악의 역사에서 떠나 밴드 자체의 역사로 옮겨간지 오래다. 그래서 시대를 앞서간 선지자의 계시를 기대하기보다는 팬들과 더불어 무르익고 성숙하는 그런 음악을 기대하게 된다. 전성기 때에도 사실 펄 잼은 전위에 서 있지 않았다.

좋게 말해, 이 음반에는 펄 잼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활력이 넘치는 로큰롤도 있고(“Gods’ Dice”), 영적인 필로 충만한 블루스도 있으며(“Nothing as It Seems”), 또 어쿠스틱한 컨트리 풍의 포크도(“Thin Air”) 실험적인(?) 트랙도(“Sleight of Hand”) 있다. 그렇지만 관록의 밴드답게 일관된 호흡으로 앨범 전체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다. 특히 “Gods’ Dice”와 “Light Years”는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곡은 아니지만 펄 잼만이 낼 수 있는 독특한 향기를 발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웅장하고 당당한 곡들보다 여백이 느껴지는 조용한 곡들이 마음에 든다. 스톤 고사드(Stone Gossard)가 작곡한 사랑 노래 “Thin Air”와 우쿠렐레(ukulele) 반주로만 진행되는 “Soon Forget”이 좋은 예이며, 여기서 에디 베더(Eddie Vedder)의 보컬은 그야말로 눈부시게 빛난다.

사람들은 그것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신화와 전설에 매료된다. 밴드의 신화가 사라진 시대일수록 오히려 슈퍼 밴드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알이엠(R.E.M.)과 유투(U2)를 제외한다면 펄 잼이야말로 현재 활동 중인 밴드들 중 그 자격에 가장 근접했다고 할 수 있다. 명성이라는 것은 값어치를 하는 자에게만 붙여지는 훈장이다. 하지만 가끔은 펄 잼이 벌써 조로증(早老症)에 접어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확실히 이들의 음악을 제대로 즐기려면 인내심이 필요한데 이번에는 그 인내심을 갖기가 좀처럼 어렵다. 이들의 성장을 처음부터 찬찬히 지켜본 사람이 아니라면 이번 앨범은 글쎄… 펄 잼의 진정한 팬이 되기란 이처럼 어려운 일일까. 20000809 | 장호연 ravel52@nownuri.net

5/10

수록곡
1. Breakerfall
2. Gods’ Dice
3. Evacuation
4. Light Years
5. Nothing as It Seems
6. Thin Air
7. Insignificance
8. Of the Girl
9. Grievance
10. Rival
11. Sleight of Hand
12. Soon Forget
13. Parting Ways

관련 영상

“Light Years” Live

관련 사이트
펄 잼의 오디오 자료실
http://www.evenflow.org
펄 잼의 다양한 오디오 자료를 만날 수 있다.